요즘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 책들은 주로 "괴물(성)(monstrosity)"에 관한 것들이다.(푸코나 문화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블로그의 글을 주의깊게 봐왔던 사람이라면, 이 주제가 그리 뜬금없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처음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괴물이자 동시에 이웃(neighbor)의 형상인 "사이코패스"를 둘러싼 담론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대중적으로 순환되는 담론들 속에서, 사이코패스는 외형상 식별해내기 어렵지만 타고난 두뇌 결함 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과잉된" 나르시스트들이다. 그리고 이것만큼 사이코패스가 우리 시대 괴물-이웃의 대표적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
아무튼 사이코패스로 촉발된 관심이, 지금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드라큘라 백작과 미스터 하이드 그리고 범죄 인간(homo criminalis)을 탄생시킨 바로 그시기)의 문학과 범죄학까지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괴물이란 주제에 대한 영어 자료들은 꽤나 방대하고 그 분야도 세분화되어 있는데 반해(예컨대, 레즈비언 뱀파이어 형상에 대한 연구서들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어로 된 자료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참고할만한 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몇 년 전에 번역되어 나온 리처드 커니(Richard Kearney)의 <이방인, 신, 괴물>(이지영 역, 개마고원, 2004)과 이번에 출판된 백문임씨의 <월하의 여곡성>(책세상, 2008) 정도가 그럭저럭 추천할 만한 책일 것이다.(이 두 책은 내가 올해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낸 책들이기도 하다.:-)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도찰"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이 보통 그렇듯이:-) 실제로는 그다지 도전적인 책이 아니다. 사실 이 책에서 커니의 입장은 오히려 전통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책에서 그는 신과 괴물의 도착적 결합으로 나타나는 이방인에 대한 해체론적 형상들을 일관되게 비판하면서, "좋은" 타자와 "나쁜" 타자를 판별할 수 있는 서사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니에 따르면 타자를 식별해내는 서사를 포기한다면 타자는 신 아니면 괴물 혹은 양자 모두라는 극단적 형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극단적인 정치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커니는 데리다나 지젝처럼 신과 괴물의 궁극적 동형성(同形性)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실제로 이들이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는 또 다른 논란꺼리이다.), 우리에게는 신과 괴물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수많은 타자들의 형상을 구분해낼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얼핏보면 타당한 문제제기라고 생각되지만, 커니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의 포지셔닝과 접근 방식이 지금까지 타자성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수많은 논의들의 성과를 자의적으로 간과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커니는 타자와 자아의 불분명한 경계를 특징으로 하는 멜랑콜리(melancholy)와 서사에 기반한 애도(mourning)를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멜랑콜리가 아닌 애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가진 문제는, 타자성에 대한 윤리를 고민해 온 이들이 극복하고자 노력해온 대상이, 바로 이러한 "애도냐, 멜랑콜리냐"라는 단순한 이항 대립 자체라는 데 있다. 커니는 당연한 듯이 우리에게 멜랑콜리와 애도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지만, 이러한 단순 구도 속에서는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allegorical melancholy)나 푸코의 반-기억(counter-memory)과 같은, 애도와 멜랑콜리의 아슬아슬한 사이길을 탐색하려는 개념적 도구와 시도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좀 더 나아가자면, 커니의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시도들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순 이항 대립으로 환원시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진정성"을 손쉽게 확보했던 과거 영미 "좌파" 학자들의 농간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커니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더 큰 이유는, 타자의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서사에 대한 그의 호소가, 원인을 잘못짚은, 그리고 그나마 때늦은 처방이 아닐까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커니는 해체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서사와 해석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타자에 대한 서사의 붕괴가 어디 데리다같은 해체주의자들의 무분별함 때문이던가? 그 원인이 내외부를 교란시키고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확산이라는 조건 때문이던지, 벤야민이 일찍이 간파했듯이 이야기가 가진 효력의 상실 때문이던지 아니면 간편하게 큰 이야기의 붕괴라는 포스트모던적 전환의 결과이던지 간에, 오늘날 타자에 대한 서사의 붕괴와 그에 따른 윤리의 위기는 우리가 발딛고 선 하나의 조건인 것이 아닐까?
이러한 주제는 그 자체로 너무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니, 문제를 조금 틀어보자. 흥미롭게도 위에서 언급한 또 하나의 책 백문임의 <월하의 여곡성>은, (애도적)서사의 붕괴라는 현대적 조건을 한국 공포영화들의 내러티브 분석을 통해 짚어내고 있다. 저자의 박사논문이기도 한 이 책은, 실은 <월하의 공동묘지>로 대표되는 60년대 후반의 한국 공포 영화 분석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지만(이러한 분석 역시 상당히 재미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60년대 공포영화와 90년대 후반 <여고괴담>과 <링: 바이러스>를 계기로 부활한 공포영화 간의 차이에 대한 백문임의 간단한 언급이었다.
백문임에 따르면, 고전 한국 공포 영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월하의 공동묘지>는 완벽한 "애도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억울한 모함으로 자살한 월향은, 귀신으로 돌아와 자신을 괴롭혔던 악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자신의 한을 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월향의 묘에 비석을 세워주는 오빠 춘식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월향에게 용서를 비는 남편 한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애도 행위의 결과 월향은 비로소 귀신의 형상을 벗고 승천하게 된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속에서 월향의 괴물화(여귀화)는 정당한 이유를 가진 것이며, 복수가 완결되어 이러한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녀의 괴물성 역시 함께 사라진다. 그녀는 이제 타자가 아니라 (비석에 새겨진 이름으로 상징되는) 거대 서사 속에 적절한 자리(proper place)를 배치받은 동일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30년 후 1999년에 제작된 <링: 바이러스>는 어떤가? (사실 난 영화가 아니라 스즈키 코지의 소설로 <링>을 접했는데, 백문임의 설명을 보면 한국 영화 <링: 바이러스>은 스즈키 코지의 소설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것 같다.) <링: 바이러스>에서 저주받은 테이프를 보게 된 선주는, 테이프에 원한을 염사한 박은서(사다코)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고, 그녀의 시신을 재매장함으로써 그녀의 한을 풀어주려한다. 여기까지 <링: 바이러스>는 괴물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주는 애도의 서사라는 기존의 공포영화의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다코의 저주는 이러한 애도의 몸짓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다코의 저주는 자신의 한의 해소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저 저주의 전염과 자기 복제와 관련된 것이다. 즉, 사다코의 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비디오테이프를 복제하여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전염시키는 사람만이 저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백문임은 이 두 영화의 비교 속에서 자가 증식과 테크놀로지라는 공포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읽어내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링: 바이러스>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애도의 서사에 대한 냉소적 반응 혹은 회의적 태도이다.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애도의 서사가, 뚜렷한 내부와 외부, 선과 악의 대립구도 속에서 이들의 질서를 재확립하는 거대 서사에 대한 믿음 위에서 작동한다면, <링: 바이러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애도의 궁극적인 실패이다. 사다코는 선주의 애도 행위에도 불구하고 월향과는 달리 서사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며, 바이러스처럼 자기 증식하며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아마도 이러한 애도의 실패와 괴물의 자기 증식이 주는 절대적인 공포가, <링>을 주제로 한 공포영화 관련 연구서가 몇 권이나 될 정도로, 이 영화가 공포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이자 전세계적 문화현상이 된 이유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올해 초 내가 본 공포 영화들 -<클로버필드>나
그러면 앞서 문제로 돌아가서, 타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줄 수 있는 서사의 붕괴(혹은 적어도 이러한 서사에 대한 불신의 만연)가, 커니의 주장처럼 판별적 해석학의 부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발딛고선 하나의 시대적 조건이라면 어떨까? 오히려 나의 관심은, 서사의 붕괴라는 이러한 조건을 수용한 상태에서 타자-괴물과 우리의 관계맺음 방식과 관련된 것이다. 타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날 때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자리를 판별한 어떤 공통적인 서사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아마도 이들을 단지 견뎌내거나(관용), 공포 속에서 배척하는 것(안전)일게다. 그리고 이것이 "타자를 자기 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오늘날, 관용(tolerance)과 안전(security)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핵심적인 정치적 용어로서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는 이유가 아닐까?(이 두 키워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따로 포스팅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괴물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각각 진보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고 그런만큼 실은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관용과 안전의 방식이 아니라, 괴물-타자와 관계맺는 또 다른 형태의 윤리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까? 서사로의 회귀라는 커니 식의 손쉬운 해결책에 기대지 않고, 좀 더 근본적이고 좌파적인 입장에서의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괴물-이웃에 대한 이웃사랑(neighbor love)의 실천은 어떠한 형태일 수 있을까? 지금 보고 있는 괴물과 그것의 재현에 대한 연구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혹은 적어도 그 실마리라도) 던져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그저,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를 소심하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