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zek for Obama?

from 맑글터 2008/09/21 16:33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가끔 들르는 미국쪽 인사들 블로그에는 요즘 대선 논쟁이 한창이다. 공화당-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박빙인데다가, 최근 미국 경제의 붕괴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하면서, 미국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 대선에 대한 관심이 4년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다.(물론 여기에는 오바마라는 대항마가 가진 개인적인 매력과 배경이 한 요인을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4년 전에는 부시-케리 모두에 반대하던 이들이 이번 대선에서는 오바마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부쩍 눈에 자주 띤다.(한참 앞서 나간 걱정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도 다음 대선 때 '비판적 지지'의 악령이 슬그머니 되살아나지 않을까란 걱정마저 든다.)  

 

아무튼 최근 이쪽 블로그들에서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지젝의 오바마 지지 비스무레한 선언이다. 9월 초 그러니까 페일린 효과가 본격화되기 전 지젝이 "In These Times"에 기고한 글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인데, 지젝은 이 글 이후에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설왕설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자체로도 재밌는 글이어서 약속이 펑크난 할일없는 주말 오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옮겨놓는다.

 

 

 

 

담대한 레토릭(The Audacity of Rhetoric)

 

 

translated by 캐즘

 

지난 1월, 미국 전체가 마틴 루터킹 목사의 비극적 죽음을 추도하고 있을 때, 도시사학자 헨리 루이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냉소한 바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그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여기서 테일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1963년 워싱턴에서의 행진 이후(이 행진에서 킹의 그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가 행해진다-역주)의 마틴 루터 킹에 대한 망각, 즉 그가  “우리나라의 도덕적 지도자”라고 추앙받은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한 기억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암살당하기 몇 년 전부터, 킹은 빈곤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종적 화합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평등의 실현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당연히 그는 점점 더 공식적 담론에서 배제되어 갔다. 

 

바락 오바마의 위험은, 그가 킹의 죽음 이후 킹에게 행해졌던 역사적 검열 작업을 이미 스스로 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그는 표심을 얻기 위해 논쟁이 될 만한 주장들을 스스로 삭제하고 있다. 

 

예수 탄생기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는 몬티 파일론의 코믹 영화 <브라이언의 삶(The Life of Brian)>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가 나온다.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혁명적 저항 집단의 리더는 로마인들이 그들에게 안겨준건 오직 비참함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부하 하나가 로마인들이 교육을 도입하고,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 시설도 확충해주지 않았냐고 반박하자, 이 리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맞아. 하지만 위생과 교육, 포도주와 공공질서, 관개 시설과 도로 그리고 상수도 시설과 보건 제도 외에 로마인들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오바마의 최근 주장들은 이와 동일한 것 아닌가? “나는 부시 행정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징한다”, 즉 “좋아, 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을 약속하고, 쿠바에 대한 보이콧을 지속할 것이며, 법을 위반한 통신업체를 눈감아줄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시 행정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징해!”

 

오바마가 “담대한 희망”과 “변화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는 구체적인 내용없이 변화의 레토릭만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희망이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가 위선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미국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경제적 붕괴나 정치적 반발 없이 실제적인 변화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러한 비관적인 관점 또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지구화된 상황을 그저 단단한 현실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이데올로기 틀에 의해 정의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상황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분할에 기반해 있다.

 

십 여년 전에, 이스라엘 신문 "Ha'aretz"가 당시 이스라엘 노동당수 에우드 바락에게 “당신이 팔레스타인에 태어났으면 무엇을 했겠냐?”고 물은 바 있다. 이에 바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입했을 겁니다.”

 

이 말은 테러리즘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다만 이는 팔레스타인과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공간을 여는 행위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고르바초프가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의도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다. 바로 말 자체가 널리퍼져 세상을 바꾸는 사태를 가져왔다.

 

또 다른 예. 오늘날 고문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것을 대중적 논쟁의 대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것은 누렘베르그 전범재판이나 제네바 협정에 비하면, 엄청난 퇴보이다.

 

말은 그저 말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골자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오바마는 이미 우리가 공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말의 경계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그가 이룬 위대한 성취는, 지금까지 말해질 수 없었던 것들을 공공의 논의 주제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즉, 정치에서 인종이 가지는 여전한 중요성과 공적 삶에서의 무신론의 긍정적 역할 그리고 이란과 같은 “적”과 대화할 필요성같은 주제들 말이다.

 

이것은 전체 장의 좌표를 바꾸는 위대한 성취이다. 처음에는 오바마의 이러한 제안을 비판했던 부시 행정부조차, 이제 이란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가 현재의 정체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새로운 말들이 필요하다.

 

관습적 지혜가 보통 그렇다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오래된 속담인 “말만하지 말고, 행동을 해!”는 가장 멍청한 충고임에 틀림없다.

 

최근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한다. 외국의 문제에 개입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잠시 물러서서, 똑바로 생각하고 말할 때이다. <끝>

 

 

 

 

 

이 글을 둘러싼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지젝의 이 글을 오바마에 대한 지지(비스무레한 것)으로 읽어도 되겠냐는 것. 이는 사실 좀 미묘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젝 글의 초점이 오바마 지지 선언에 맞춰져 있지 않을 뿐더러, 큰 그림 속에서 특정한 인물의 의의를 평가하는 것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지젝은 이미 4년 전에 부시의 재집권이 가져올 "효과"에 주목하면서 그의 집권에 대한 환영 비스무레한 글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손호철 교수가 한나라당 지지자가 아닌 것처럼, 지젝 역시 부시 지지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이 오바마와 그가 전개한 담론 투쟁에 대해 "전체 장의 좌표를 바꾸는 위대한 성취"라고 평가한 것은, 확실히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록 형식과 말, 외양의 중요성에 강조는 그의 글 속에서 여러번 반복된 테마이지만, 오바마의 담론이 좌표를 바꾸는 효과를 낳았다는 놀라운 평가는, "담론 분석"을 넘어서 "행위(act)"의 강조로 나아간 그의 지난 행보에 비추어 하나의 일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젝의 정치학의 틀내에서 이러한 지젝의 일탈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동안 지젝은 암묵적 혹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전략이 최소한의 자유민주주의 헤게모니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왔고, 그런 점에서 오바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최근 들어 이러한 헤게모니의 위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그의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지젝이 종종 보여주는 이러한 "뜬금없는 논평"들이, 어떤 특정한 정치 세력 혹은 입장과도 동일시하지 않는 그의 정치적 사유의 불안정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 전에 <300>에 대한 그의 비평을 소개하면서 던졌던 질문이지만, 지젝은 과연 현실 정치(혹은 도래할 미래의 정치) 속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이러한 동일시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래야만 정치적 사유의 안정성이 갖춰진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정치적 사유의 안정성이란 오히려 보수적인 것이리라.) 다만 나로서는 이러한 동일시가 정치를 스펙타클한 게임의 장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와 정세("분석"이 아닌) "구성"의 문제의식을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강제적으로 삽입하는 일종의 전제 조건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이러한 문제를 외면한 채, 현실의 정치적 입장들 "사이" 속으로 빠져나가는(elusive) 존재로 스스로 위치지을 때, 지젝은 그 입장의 급진성과는 별도로, 이 시대 스펙타클화된 정치가 생산해낸 수다한 정치 평론가 중 한명이 되어 버리는 자기-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물론 그는 여타의 사이비 정치평론가들과는 달리 훌륭한 A급 평론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기는 하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묘한 사상가의 차후 행보가, (그 이론이 가진 의의와는 별도로) 현대의 정치적 조건 그리고 이론가와 정치의 관계 등과 관련해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의 다음 행보를 기다려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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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1 16:33 2008/09/21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