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교수신문>에 실린 아즈마 히로키의 인터뷰를 며칠 전에야 발견하곤, 예전 기억을 떠올려 1년 전 쯤 썼던 글 하나를 링크해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에 약간은 두서없이 정리해본다. 요즘 여러가지 일로 폭주 중이라 긴 포스팅을 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한 해가 거의 절반 가까이 넘어가고 있는데, 올해들어 세 번째 포스팅이니 이건 블로그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닌 상태이지만, 조만간 여유가 좀 생기면 EM님처럼 블로그를 한 번 손 봤으면 싶다. 특히 이 어중간한 폰트부터...

 

링크를 거는 글은 재작년에 창간호 0호(혹시 누런 표지와 빽빽한 편집의 이상한(?) 책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를 낸 ACT 1호에 보낸 글인데, 현재 ACT는 재정난 등의 이유로 웹진으로 방향을 바꾼 상태이다.(올해부턴 1년에 한 번 정도 웹진에 실린 글들을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웹진 홈페이지 오픈은 올해 초에 이뤄졌음에도, 아직 이래저래 정돈이 안된 듯한 느낌 때문인지 방문자수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갤러리에서 내는 문화예술비평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전적인(?) 웹디자인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만간 새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는 소식만 들었는데, 오프라인으로 발간될 글들을 모아놓는 半-아카이브 형태의 잡지가 될지, 예전 컬티즌 같은 짧은 평론 위주의 웹진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다른 건 몰라도, 범죄소설의 팬으로서 조영일씨의 탐정론은 계속 연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http://www.a-act.net/act/act.html

 

위 링크의 목차 중 <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이 작년에 기고한 글이다. 당시에는 오프라인 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 분량이 많아 온라인 상에서는 읽기 힘들지도 모르겠다.(PDF 파일을 요청하신 분이 있기에 혹시 다른 분들도 관심이 있을까 싶어, 초고의 PDF 파일도 같이 올려놓는다. 진보네 블로그에 첨부파일을 올리는 방법을 시험하다, 그냥 예전에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 해 링크 걸어 놓는다. 진보네 블로그에 파일 올리는 방법을 아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

 

사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이 블로그의 예전 글들에서 한 번 정도 언급되었던 내용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와 동물-속물적 주체성]  [책 두 권] , [코제브의 동물/속물론] 의 확장증보판인 셈이다. 

 

글을 쓸 당시에는 미처 참고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두 권의 책,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김항 역, 새물결, 2006)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Princeton Univ Press, 2001)도 이번 기회에 짧게 정리해놓는다.(최근 포스트 히스토리라는 조건과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김항씨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 정리할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먼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 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역사의 종결 이후에 "정치"라는 것이 사유되는 방식의 변화를 다룬다. 이 책에서 Brown이 던지는 질문은, 기존의 정치적 행위들을 지탱해주던 기반으로서의 공통의 큰 이야기가 사라진 상황에서, 정치는 어떤 것으로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역사의 종결 이후 "최후의 인간"들의 도덕에 대한 집착을 조롱한 니체를 따라, Brown은 포스트 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의 형태를 역사와 적대에 대한 분석을, 개인과 도덕적 선택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도덕주의(moralism)"의 범람으로 진단한다. 

 

Brown에 따르면, 이 정치적 도덕주의는 총체적인 역사적 내러티브가 붕괴했으나, 여전히 새로운 대안적 담론들을 찾지 못한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 정치적 도덕주의에서 정치에 대한 상상은, 역사적-총체적인 현실 분석을 상실한 채 개인의 선택과 그가 행한 도덕적 실천의 결과로 협소화된다. 즉, 정치적 행위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실천으로 이해되며,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탈정치화-역사화되어 선한 개인의 행위와 악한 개인 행위 간의 대립으로 평면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상상틀의 변화 속에서, 정치는 공통의 이야기 속에서 현존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연대의 기획이라기 보다는, 현존하는 차이들 간의 본질화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임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Brown이 정치적 도덕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녀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정치적 공정함과 증오 발화를 둘러싼 정치적 담론들이지만, 조금 비약해 말하자면, 오늘날 정치에 대한 담론들 전반이 이러한 도덕주의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크게는 제국주의적 전쟁의 문제를 개인의 전쟁 선호증으로 돌리는 담론에서부터, 작게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착한 소비"와 "착한 기업" 같은 담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담론들의 핵심적 특징은 그 분석에서 문제가 발생한 역사적-총체적 분석을 삭제한다는데 있다. 대신 이 분석의 공백을 메꾸는 것은, 어떤 선한 혹은 악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며, 결국 이러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적 행위를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협소화된다. 

 

Wendy Brown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적 도덕주의의 궁극적 효과 중 하나는, 주체를 정치적 책임과는 무관한 "순수한" 주체로 남아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치는 나의 존재 형식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삶 속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도덕적 선택에 한정된 것이기에, 개인은 정치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맡는 것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Brown이 보기에, 오늘날 정치적 도덕주의에 공모하는 주체들을 사로잡고 있는 기본적인 자화상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국가)를 비난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내가 아닌 부모이기에, 이 주체들은 이러한 제한된 상상의 틀을 넘어, 어떻게 부모가 될 수 있을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거나 직접 부모가 되는 어려운 책임을 방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설적으로 국가를 (원래 공정해야 할) 부모로 "구성하고", 자신들의 역능을 투정부리는 아이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나 자신이 부모가 되기 위한 조직의 구성이나 이에 대한 고민도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순수한 목적을 가진 존재들이고, 따라서 남은 문제는 우리의 부모가 이러한 순수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Brown의 말처럼, 바로 이러한 "순수한" 도덕적 정치주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책임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는 될 수도 없고, 되기로 싫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가치를 통해 정치의 실천을 재전유하려는 어떤 부인의 매커니즘이다.(그리고 아즈마 히로키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러한 부인의 매커니즘이야말로 "속물적 주체성"의 기본적인 존재 형식이다.)     

 

Wendy Brown의 책이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속물의 정치"의 최신 판본을 그려내고 있다면,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은 김항 씨가 역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어떻게 새로운 초월성과 그것에 기반한 새로운 "인간의 정치"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도, 진리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이에 대한 극한의 추구도 존재하지 않는, 즉  "끝까지 가지 않는" 전후 일본 사회에 분노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신화"와 초월성을 복원하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미묘하게 정반대를 향해 있다. 

 

즉,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 사회에서 현존해온 초월성의 형태인 천황을 복구하여 굳건히하는 것을 꾀한다면, 전공투는 현질서의 "부정"을 통한 무(無)의 초월성을 구성하기를 꿈꾼다. 어색한 운동권 어투가 난무하는:-) 이들 사이의 격한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점들, 즉 게임과 유희의 차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강조와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에 대항 강조의 차이, 현존하는 관계의 존중과 이 관계에 대한 거부 간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초월성의 구성 방식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 둘러싸고 순환하는 쟁점들이다.

 

김홍중의 표현을 빌려와, 미시마 유키오가 과거로부터 발견된 초월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속물의 정치"를 꿈꾼다면, 전공투는 자기-부정의 폭력 자체를 새로운 신화로 구성하려는 "구원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미시마 유키오가 전공투에게 연대투쟁을 제안하며, "그래서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을 때, 그는 전공투와 자신의 논쟁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날카롭지만, 두 입장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를 뭉개버리려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뭉스럽다. 이 절대적 부정성의 추구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리 없으리라. 

 

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간의 입장차는,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동요하며 오가는 양 극점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를 지극히 단순화하자면, 이 두 입장차는 우파 슈미트와 좌파 벤야민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상반된 입장차가 한 인물의 삶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뒤섞인 예는, 아마도 혁명적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의 대표적 이론가인 동시에 파시즘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리고 슈미트와 벤야민 모두가 참고하고 있는) 조르쥬 소렐(Georges Sorel)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정치 공간 속에서, 폭력과 총파업을 통한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신화 구성을 주장했던 소렐은, 이후 "위대한 프랑스 골(gaul)족의 신화"에 기반한 민족 통일성의 구축을 강조하는 열렬한, (그에게 좌우파란 전통적인 잣대의 적용이 가능하다면) 우파 민족주의자로 입장을 바꾼다.

 

충분히 이해가능하지만, 소렐 자신은 변절자라는 주위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의 일관성을 변호했다고 한다. 아마도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구성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소렐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새로운 초월성의 구성에 있어 존재하는 두 벡터의 차이, 즉 과거의 신화를 재구성하려는 "속물의 정치"의 벡터와 새로운 "구원의 정치"의 벡터 간의 차이였으리라.  그리고, 따라서 오늘날 포스트-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에 대한 사고 역시, 바로 이 구분의 정교화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따로 글을 쓰려다가.. 그냥 덧붙임.

 

도덕주의와 신화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한국 정치에서의 탈역사적 도덕주의의 형태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쏟아진 수많은 애도의 말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애도의 형태는, "노무현의 정치적 입장 혹은 과오를 떠나,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 만은 존경한다"는 입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애도사에서 표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정성과 인간성이라는 가치에 여전히 목말라 있다는 단순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애도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고인의 진정성을 기리는 이 평범한 애도사의 레토릭이, 역설적이게도 고전적인 "진정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에게 "진정성" 혹은 "인간성"의 자리는, 정치적 입장을 뺀 나머지 "인간" 쪽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성의 자리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수영이 자신의 속물성을 탓하며, "진정성"의 가치를 통해 정치적 주체 혹은 예술적 주체로서의 김수영과 생활인 김수영 간의 불가피한 간극을 메우려 할 때, 부정되어야 할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김수영이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김수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적인 죽음을 앞에 두고, 정치적 주체와 분리된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을 말하는 것은, 그것의 정당성을 떠나서, 인간성과 진정성에 대한 어떤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애도사에서 말하는 "인간성"과 "진정성"이란, 아마도 정치적 내용이나 역사성과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혹은 이해되어야만 하는) 어떤 형식적 가치일 것이다. 고인의 인간성과 진정성을 기리기 위해 부정되어야 할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노무현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추구했던 정치적-역사적 주체로서의 노무현이고, 진정성과 인간성의 자리는 이제 정치와 역사 "외부"의 자리로 전치된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형식적 가치가 되어버린 인간성과 진정성은, 그 정치-윤리적 의미가 탈색되어 "청렴성", "사람좋음", "열정" 등으로 치환가능한 단어가 되어 버린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이러한 전치와 형식화를 통해서만, 그는 가장 "인간다운" 혹은 "진정성을 가진" 대통령으로 추모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자살로 "진정성과 인간성의 신화"가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 진정성과 인간성 자체가 아무런 역사적 내용없는 텅 빈 형식적 가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텅 빈 형식의 제시는, 노무현이라는 아이콘과 이 아이콘이 상징하는 "민주화"라는 텅 빈 내러티브(그래서 모든 적대와 투쟁들이 수렴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기능해온 역할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담론은 민주화의 시간을 지속시킴으로써 역사의 종결을 지연시키는 "커다란 비이야기"로 기능해왔고,  이 담론이 작동하는 한에서만, 소위 민주화 세대는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다시 역사의 인간이 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믿음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 "텅 빈 것이라도 어떤 형식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고유한 "속물적" 주체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죽음으로 강화된 텅 빈 노무현의 신화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 죽음이 끊어질 뻔 했던 텅 빈 형식과 가치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영양제가 될 지, EM님의 말처럼 지난시기 퇴화된 꼬리뼈처럼 번거롭게 남아있던 텅 빈 가치를 "애도"로써 청산하는 기제가 될지는, 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비)애도하는 방식을 둘러싼 다층적인 투쟁과 사회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면, 두 경우 모두 새로운 역사와 고유한 "인간"의 정치를 꿈꾸는 "우리"(혹은 "누군가")에게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닐 것 같다는 명확한 사실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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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00:30 2009/05/28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