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 달린 게슴츠레님의 댓글에 답하려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따로 글로 남깁니다. 다시 읽어보니 앞의 글이 너무 압축적이어서(제 나쁜 버릇 중 하나입니다;;), 조금은 더 자세히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먼저 기우이긴 하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밝히자면 저는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의견을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애도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특정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비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본질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굳이 노무현을 애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개개인에 따라 다층적일 수 있고, 극단적인 경우 개인의 상태에 따라 노무현이라는 대상과는 별개로 죽음 자체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이억만리 떨어진 생면부지 인간의 죽음도 무언지 모를 나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를 지지했건 그렇지 않던 간에 매일 뉴스 화면을 통해 보고 수없이 입에 올렸던 인물의 죽음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아마 자신조차도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러한 감정을 둘러싸고, 노무현을 애도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논의를 벌이는 건 무언가 초점이 엇나갔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오히려 제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양한 (비-)애도의 "형식"과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건, 게슴츠레님 말처럼, 노무현의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누군가가 그의 죽음 앞에서 드는 애도의 감정을 "일관성있게" 설명하려 들 때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담론의 형식이군요. 정작 분석이 필요한 대상은 내용이 아닌 형식이라는 말이 맞다면, 이러한 담론의 형식은 분명 그 주체가 가진 인식의 한 측면, 더 나아가 그 속에 투영된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겠죠.
지금까지 노무현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애도의 감정을 표하기 위해 사용하는 담론은, 크게 보아 두가지 형태인 것 같습니다. (1)집권자로서의 노무현과 구분되는 "원형"의 노무현을 거슬러올라가 "발굴"하여, 후자를 애도하기. (2)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구분하고 역시나 후자를 애도하기.
제가 "정치적 도덕주의" 혹은 "고유한 속물적 입장"이라는 말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두 형태 모두에서 나타나는 어떤 "분리" 자체가 탈역사화와 탈정치화의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담론에서는, 집권자 노무현이 바로 그 이미지를 활용해 집권했으며, 집권 기간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은폐됩니다. 따라서 87년 이후 민주화 세력과 그 담론이 걸어온 역사적 경로는, 그저 "개인" 노무현의 변화 혹은 한계로 "개인화"될 수밖에 없죠. 두 번째 경우는 앞선 글에서 밝혔지만, 진정성과 인간성의 위치를 정치와 역사 외부에 둠으로써 좀 더 노골적으로 노무현을 텅 빈 형식적 가치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따라서 누군가가 만약 일관되고 진정한 노무현 지지자라면, "바보 노무현" 같은 애도 담론에 대해서 오히려 분노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애도사에는 노무현이 정치인이자 집권자로 추구했던 가치는 은밀히 부정되고, "사람좋음" 혹은 "열정"이라는 텅 빈 형식적 가치만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노무현이 형상화하는 가치가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조차 텅 빈 것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게슴츠레님의 말에 냉소주의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로서는 그 동안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 비판했던 "좌파"인사들이 이러한 탈역사적-정치적 담론을 통해 그를 공식적으로 애도할 때, 그래서 이 죽음에서 최소한의 "사람좋음"과 "민주화의 열정"정도는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때, 이 담론이 바로 전형적인 냉소주의 담론이고 이들이 바로 냉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정확한 판본은, 이렇게 되겠죠. "나는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그걸 알고 있을까?)" 여기서 대중은 "믿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속고 있는 것은 주체 자신일 뿐이죠. 지젝이 슬로터다이크로부터 차용한 "알면서 속는자"라는 냉소주의자의 정의에 이보다 잘 들어맞는 예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게슴츠레님이 언급하신 두려움-정치와 무관한 관조적 분석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냉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그 지젝은, 그의 또 다른 글에서 성급한 행동의 촉구가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최소한 제가 아는 한에서는, 이는 전혀 모순되는 입장이 아닙니다. 지젝의 틀에서 냉소주의는 "실천"과 대립적 위치를 갖지 않습니다. 그에게 냉소주의와 대립적 위치를 가지는 것은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분석"이죠.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분석은 또한 "행위(act)"와 대립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건,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분석일 것이고, 그에 기반한 우리의 (비-)애도의 방식을 둘러싼 논의일 것입니다. 진보네 블로그들에서만도 훌륭한 (비-)애도의 방식을 몇 군데서 본 것 같은데, 밤이 깊어 가니, 그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해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