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1년의 마지막 밤은, 주코티 파크(혹은 리버티 스퀘어)에서 보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에>를 꼭 봐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룸메이트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난 후, 공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경찰과의 충돌이 대충 정리되고 난 후.. 바로 옆 동네 타임스스퀘어에는 백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는데, OWS 신년맞이 행사에는 넉넉히 잡아도 이백명 남짓해 보이는 숫자만 옹기종기 모여있다.(나중에 알고보니 경찰과의 충돌 이후에 많이들 돌아갔다고 한다.) 한 해를 달궜던 이슈였던 것에 비해서는 다소 초라한 마무리란 서운함에 할일 없이 공원 주위를 서성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밤바다나 보자며 가까운 부두로 향한다.
2.
뉴욕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평소 연락 없던 지인들에게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대해 물어보는 편지를 몇 통 받았다. (뭐 사실은 고맙게도 그걸 핑계 삼아 안부를 전한 거겠지만 :)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한테나 미디어로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집회에 몇 번 참여한 게 전부인데다 미국의 정치 운동 지형에 대해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는 나로서는 자연스레 말을 아끼게 된다. 다만 (미국) 좌파 학자들의 (반쯤은 호들갑 섞인) 반응을 알고 싶다면 Theory and Event 특집호에 실린 논문들을 참고하라는 답변 정도는 드릴 수 있겠다. 아마도 2-3개월 간은 open access일테니 천천히 다운받아 보시길.
3.
하지만 그 동안 이 운동에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이 난 지도교수부터 시작해서 주변에서 온통 그 얘기 뿐이니 사실 관심을 안 갖기도 힘든 일이지만, 이 운동의 어떤 면들은 사실 흥미롭기 그지없다. (한국에서 이미 "소리통"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었던 human microphone에 쏟아진 찬양들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분절articulate하고 번역해내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 운동이 일차적으로, 99%를 자임하는 이들(개인적으로는 이 구호의 긍정적 힘과는 별도로, 이 구호 속에서 언제나 보편계급임을 자임해온 미 백인 중산층들의 환상을 엿볼 수 있음을 지적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 그들의 불만을 "탐욕greed"에 가득찬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경제위기에 대한 자본가들의 "책임responsibility"를 요구하는 것으로 표출한 것은, 한 마디로 "징후적"이다.
혹시 이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가들과 옹호자들이 드디어 같은 언어, 즉 "윤리"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이들이 이야기하는 "탐욕"에 대한 비판과 자본가의 "책임"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경제위기의 대안이라며 열렬히 선전되고 있는 "윤리적 자본주의ethical capitalism" (한국에는 "자본주의 4.0"으로 소개된)의 기획, 즉 투명성과 책임accountability, 공정 거래와 착한 자본가라는 "윤리적" 이상에 기반한 새로운 자본주의의 기획과 얼마나 떨어져있는 것일까?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전사前史였던 반지구화 운동과 반전집회에는 지구화 대 반지구화, 테러와의 전쟁 대 반전이라는 다른 "슬로건들"이 있었지만, "슬로건 없음"을 내세우는 이 새로운 운동 속에서는 1%와 99%라는 표면적 대립 속에 사실 동일한 윤리적 자본주의의 언어들이 은밀히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운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다른 목소리들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즉 많이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 운동은 사실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기획이 일정한 헤게모니를 획득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전해진 그 날 점거자들의 트위터와 블로그에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다양한 반응들이었다. 그도 1%의 일부일 뿐이라는 냉소적 반응에서, 잡스는 경제위기 주범인 금융자본가들과 다르다는 변호, 애플의 폐쇄성과 기부에 대한 잡스의 무관심을 지적하며 애플이 생각보다 "착한" 기업이 아니라는 지적과, 잡스가 주도한 네트워크 혁명이 이 운동을 가능케 했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주장, 잡스가 중국에 아웃소싱을 하여 미국의 일자리를 없앴다는 비판에서부터, 그의 "혁신" 정신은 이 운동과 맞닿아 있다며 시위대에서 공식적으로 그를 애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 기업가의 죽음에 쏟아진 이처럼 혼란스러운 반응들(만약 도날드 트럼프의 부음이었다면, 시위대의 반응은 어땠을까?)은 그 자체로, 잡스라는 대표적인 "윤리적" 자본가의 기표가, 사실 1%와 99%라는 표면적 선명함 이면의 어떤 은폐된 지점을 건드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다소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보이는 지적은,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에 냉소적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할 말 많고 중요한 이 운동에서 굳이 이러한 부분을 끄집어내는 것은, 무엇보다 오늘날 이러한 "윤리"와 자본주의의 만남이 꼭 지적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얼마 전부터 (사실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고민해오고 있는 "통치"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이 언어의 합치를 눈 앞에 두고 또 다른 형태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우리는 이 정치적 입장을 뛰어넘는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언어의 합치 속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을,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정치의 죽음을 보아야하는 것일까? 즉 "정치"를 새롭게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통치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즉 보편적 적대를 표현하는 언어를 재발명 해야한다고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통치성 연구자들이 조금은 주저하며 인정하듯이) 통치가 끝나고 저항이 시작되는 명확한 지점같은 것은 없다고, 다만 우리는 그 사이의 미세한 선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 공통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통치의 기반과 정치의 가능성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걸까?
예컨대, 나는 후자의 예를 (그 자신은 사실 저 두 입장 사이에 미묘하게 걸쳐있는) 삐에르 로장발롱이 복지국가에 대한 좌우파의 비판들을 검토하면서 끌어낸 투명성transparency과 가시성visibility의 구별에서 발견한다. 유사해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투명성이 복지국가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절차적 개편 혹은 제도의 해체를 요구하는 우파의 언어라면, 가시성은 복지국가의 작동을 정치화할 것을 요구하는 좌파의 언어이다. 즉, 좌파와 우파는 복지 국가의 관료제 비판을 공유하면서도 그 목적에 있어 상이한 전망을 갖는다. 예컨대, 좌파는 복지국가의 재정개편을 요구할 때, 소비세를 약간 올리는 것이 좀 더 수월한 복지 재정확충 방식이라 할지라도 이 비가시적인 방식 대신에 부유세를 책정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이 부유세의 도입 과정은 그 자체로 사회적 불평등을 가시화하며, 이를 둘러싼 갈등과 "정치"를 촉발시킴으로써 복지를 순전한 통치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비판했던 겉보기에 동일해보이는 언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차이들을 구분해 내야한다..... 혹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이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공통의 언어 속에서 "공정 사회"와 "공정 무역" 간의 차이를, accountability와 responsibility 간의 차이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경제위기에 대한 자본가의 책임"간의 차이를 판별해내는 미묘한 작업을 전개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복지국가를 공통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러한 언어들이 실제로 어떠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는가라는 물음은 차치하고라도, 사실 이러한 미세한 선긋기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근본적인 정치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즉, (조금은 철지난 유행어들을 쓰자면) 이러한 "최소차이"는 사실 얼마나 거대한 "배치"의 차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이 유사한 언어들이, 사실 다른 맥락 속에서 순환하며 다른 정치적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다른 사회적-정치적 환경이 요구되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부자에게 세금을"이라는 온건한 구호에서 "연준해체, 정부해체"라는 유사-급진적인 아니키적 요구까지 뒤엉켜있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목소리들이, 사실상 금융기관의 사회화나 재산 몰수와 같은 기초적인 이행기적 요구들의 철저한 폐제foreclosure에 기반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징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과 도덕, 권력과 힘의 문제로 철저히 환원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의 담론은 이러한 폐제를 정당화하고, 역으로 이러한 폐제는 이 운동이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기보다는 "탐욕"과 "책임", "나눔"이라는 기존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언어 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이러한 교착deadlock을 뚫고 이 운동이 정말 다른 "배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언어의 최소 차이를 실제적인 정치적 차이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반복될 이 운동에 걸려있는 진짜 판돈은 오히려 이 같은 질문이 아닐까 싶다.
4.
야경을 즐긴 후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언제나 나보다는 조금 더 긍정적인) 룸메이트가 훗날 2011년이 1848이나 1968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묻는다. 아랍의 봄에서 런던 봉기와 아테네의 여름을 거쳐 뉴욕의 가을까지.. 사실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고 어떤 새로운 순환의 실마리가 보이는 한 해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 예멘, 그리스는 여전히 투쟁중이고, 런던 봉기는 오히려 보수 정권의 역공에 길을 내 준 것 같으며, 뉴욕의 가을은... 갈 길이 너무 멀다. 오히려 2012년이, 그리고 다가오는 날들이 1848이나 1968이 될 수 있을 것 같냐고, 아니 어떻게 하면 될 수 있겠냐고 묻는 게 현명한 질문이 아닐까? 진부한 말이지만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기에, 작년 한 해 반동의 회귀만을 경험했던 한국이 부디 이 새로운 순환에 낙오(?)되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이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 모두 2012년 복 많이 받으시길, 아니 복 많이 만드시길..
그냥 끝내기 섭섭하여 democracy now의 깔끔한 2011년 정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