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틈틈이 시간날 때 들여다보고 있는 글들은, IMF 당시 경제위기 관련한 논쟁들... 대학 신입생 때 열심히 세미나했던 글들을 다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해묵은 글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97년 경제위기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에서 "사회"가 국가와 시장 모두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물신화된 대상으로 등장한 중요한 기점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 시기 논쟁글들이 언제나 대안으로서의 "사회"를 제기하면서 마무리된다는 건 꽤나 흥미로워 보인다. 시장주의자들은 모럴 해저드와 정경유착을 견제하기 위한 도덕적 개혁의 공간으로, 조절이론/신제도주의자들은 권위주의 국가를 대체할 새로운 조절시스템으로, 최장집을 비롯한 코포라티즘 주창자들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상호 모순을 봉합하기 위한 노-사-정 사회협약의 공간으로, 신좌파 논자들은 "사회적" 경제와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상호성의 공간으로... 경제위기에 대한 원인 진단과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마치 하나의 만병통치약처럼 각종 논의들의 결론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된다. 물론 각자가 정의하는 사회의 역할은 다르지만, 이러한 각종 담론들의 벡터들이 결합해 90년대 후반 "사회"라는 공간의 가지성이 수립되는 모습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좌우파의 대립이나 노-사 갈등에서 벗어난 어떤 탈정치화된 도덕적 공간이자 상호성의 공간, 하나의 물신화된 공간으로 등장하는 "사회". 최근 한국 좌파 담론의 무기력함은 이 구렁텅이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했던 과오의 값을 뒤늦게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 또 하나 웹서핑 시 눈여겨 보고 있는 논의는 영국 보수당 데이빗 캐머런 정권의 "빅 소사이어티" 정책과 "Conservative Manifesto"를 둘러싼 논쟁들인데, 여기도 진흙탕 싸움인 건 매한가지. 경제민주화 원조 논쟁도 아니고, 빅 소사이어티 원조 논쟁하고 있는 한때 제3의 길 지지자들은;;;

 

여담이지만 근대 정치체제의 모델을 만든 나라답게 영국정치는 슬로건과 어젠다를 생산하는데 있어 다른 나라와는 비교불가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사회같은 것은 없다"에서, "제3의 길" 그리고 "빅 소사이어티"까지..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68혁명->대처리즘의 역풍->제3의 길을 거치면서 나름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온 소위 "신좌파적" 어젠다들이 보수당의 "빅 소사어티" 선언과 함께 그 종언을 고한 듯한 느낌이라는 것. 보수당의 "Conservative Manifesto 2010"은 제목을 가린다면, 문화과학 그룹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온 "문화사회론"으로 착각할 정도다. 문득 한국의 문화좌파들이 이 패러다임의 위기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 이런 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http://suyunomo.net/?p=10598

이미 성범죄자 정보공개를 둘러싸고 십수년은 앞서 나간 미국에서 한 줌도 안되는 좌파 비판범죄학자들이 고군분투하며 제기하고 있는 정책의 가장 큰 문제들이, 이러한 전략이 시민을 범죄 통치의 하위파트너로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안전은 자율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안전 사회의 주체들로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안전=개인의 신체적 안위라는 단순한 공식을 만들어내면서 역설적으로 보다 강력한 정부 개입에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인데, 국가가 포기한 통치 공간을 민중이 채우고 있다/채워야 한다며 환호하고 있는 이 논의는 대체.....? 성범죄자 신상공개가 국가의 통치 포기인가를 포함한 여러 문제는 차치하기로 하고, 아무래도 진지하게 쓴 글은 아니지...하며 이해해보려 하지만, 분석없는 피상적 국가포비아와 "자율성"의 물신화가 신자유주의와 조우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해 조금은 섬뜩해진다. 그에 비해 정작 고병권 선생의 글은 괜찮은 편.. 장기투쟁의 증가와 그로 인해 연대의 문제가 같이 사는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철투에서는 하나의 상식이었고, 노동운동에서는 사실 10년도 더 전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현상(ex.한통)이라, 이런 문제가 증가하는 것을 그의 말처럼 어떤 새로운 가능성의 사례로 봐야하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긴 하지만...

 

 

- 발리바르의 수업을 2년 연속 듣는 셈인데, 정갈한 강의 내용도 좋지만 더 흥미로운 건 그가 강의에 곁들이는 프랑스 지성계 일화들인 듯. 2시간 남짓한 강의식 수업에서 지루해질만하면, 우리가 친구들 뒷담화하듯이, "그러니까 내가 아는 한 선생님이/친구가 말이야..."라는 식으로 조곤조곤 이런저런 일화들을 꺼내놓는데, 그 주인공들이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데리다 등등...

 

이번 주 일화는 아무래도 최다 등장인물인 알튀세르에 관한 것. 알튀세르는 타이핑 속도가 왠만한 타이피스트보다도 빨랐다고 하는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조증일 때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한 번에 앉은 자리에서 밤을 새가며 200페이지 넘는 글을 타이핑해 나가기도 했다고.. 그러다 곧바로 울증 주기로 넘어가면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와서 조증 상태에서 쓴 글들을 찢어버리거나 불사르곤 했다는데.. 확실히 푸코, 드보르, 라캉 등 이 세대 프랑스 남성 지식인들에게는 어떤 낭만주의적 영웅의 아우라가 있는 듯..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라서 내 커미티들이 저 모양이었다면 뭐 이런 인간들이 있나 어처구니 없어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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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0 06:48 2012/09/10 0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