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고보니 근 1년 만의 포스팅. 하지만 불로그질을 재개하는 글이 될 지, 불로그를 접는 인사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사람들의 연락처를 한국에 두고 오는 바람에, 싸이도 트위터도 하지 않는 내게 이 공간은 이메일 답장을 제외하면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어 버렸다. 포스팅을 자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댓글이나 방명록 확인은 꾸준히 할 생각이니 혹시 전할 말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거나 이 곳에 남겨주시길..
2.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올해 내 신상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거의 3년 반 만에 full-time student(라 쓰고 "백수"라 읽는)로 복귀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를 태평양 건너 뉴욕으로 옮긴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이 반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연이어 벌어진 일이라, 사실 지금도 적응기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앞으로 불로그질을 할 수 있는 심적 혹은 물리적 여유가 생길지도 지금으로선 불투명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한 시간을 최대한 즐기고 있다. 요즘 나의 일상은 아침에 눈이 떠질 때 일어나 도서관에서 그 동안 보고 싶었던 책들을 읽다가, 오후에 영어 강의를 2-3시간 듣고 카페나 도서관에 가 책을 보거나 마음이 동하면 다운타운으로 놀러나가는 일의 반복이다. 주말에는 관광객 모드로 변신해 미술관에 놀러가거나 양키 스타디움을 찾기도 한다. 지난 3년 동안 어디론가 도망가버린 집중력이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그대로 신선 놀음이라 할 수 있는데, 9월에 학기가 시작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될 것이다. 말그대로 30대 초엽에 맞게된 그리 길지 않은 휴가인 셈이다.
3.
유학을 결정한 이후, 종종 유학, 특히 미국 유학을 가는 이유에 대한 (절반은 비난조의) 질문을 받았다. 처음 유학 이야기를 꺼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 역시, (약간의 실망을 담은) 의아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유학이 흔하디 흔해진 세상이라지만, 내가 갈지는 몰랐다는 식의..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 되기"같은 얄팍한 윤리가 아니라, "돌아가야 한다"를 외쳤던 바보같은(괴물같은) 뿌리박힌 윤리를 지지한다고 이야기해왔다. 누군가 거리를 두어야 넓게 보인다는 지식 사회학의 공리를 들이밀 때, 나는 넓게 보기보다는 깊게 보고 싶으며 거리를 두기보단 그 속에 있을 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반응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미국이라는 동네에서 한국사회를 공부하는 것이, 좀 더 큰 세상을 보여줄 것이라던가 한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줄 거라는 환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한국 사회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이 나의 기존 이야기들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될 현실적 조건들-같이 공부할 수 있는 교수진과 장학금의 문제에서부터 앞으로 가지게 될지도 모를 기회의 문제까지-을 제외한다면,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단절과 도피의 필요성이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내 기억이 맞다면 <일방통행로>에서 일텐데) 벤야민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인들이 "갑자기 공기의 무게를 느끼게 된 것처럼" 살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내가 받은 느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 자신부터 삶의 무게에 조금씩 짜부라져가는 상황이었다. 몇 가지 개인적인 문제와 사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남은 것은 한국에서 이 무게를 그대로 지고 살아갈 것인가, 잠깐이라도 이 곳을 벗어나 더 늦기 전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였고, 결국 내 선택은 후자였던 셈이다.
물론 여기라고 삶이 고단하고 무거운 곳이 아니겠냐마는, 최소한 나에게 이 곳의 공기는 한결 가볍다. 여기에서는 나의 예전 실수들이 가져온 결과에 부끄러워할 일도, 변해버린 누군가의 모습에 실망할 일도, 가끔씩 솟구치는 울분에 잠 못 이룰 일도 없다. 종종 창처럼 나를 찔러대던 한국의 소식들은, 딱 그 물리적 거리만큼 무뎌져 도착한다. 지금 내 앞에는 그저 읽어야 될 책들과 써야 할 글들, 그리고 어떻게든 통하게 만들어야 할(!) 말들이 놓여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절과 도피가 앞으로의 내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 삶의 무거움이 나를 짓누를 것 같아 두려웠다면, 여기서는 이 가벼움이 나를 망가뜨릴 거라는 공포와 싸워야 하리라. 다만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몇 년째 붙자고 있는 화두들에 새로운 질문이 더 얹혀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영어로 한국을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 중심(혹은 제국)에서 그 언어로 주변(혹은 식민지)를 연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고민. 요즘 틈틈이 스피박과 레이 초우를 다시 집어드는 이유다.
4.
내가 다니게 될 컬럼비아 대학교 앞 골목에는 Book Culture(예전 이름은 Labyrinth)라는 나름 유명한, 서울대 앞의 <그날이 오면> 같은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이 하나 있다. 주로 맑시즘이나 문화연구, 문학 관련 책들을 비치해놓고 몇몇 책들은 매우 싼 가격에 내놓기도 하는데, 오늘 가니 알튀세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단돈 4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뒤적이다 보니, 손님없는 가게를 홀로 지키던 점원이 심심했는지 말을 걸어온다. 알튀세르 좋아하냐고... 한국에서 번역본으로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정치학과 학부생이라는 그 점원이 또 묻는다. 한국에서 알튀세가 많이 읽히나요? 90년대 이후 한국 운동권들에게 알튀세라는 이름이 안겨주는 그 복잡미묘한 끈적함을 이 사람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냥 sure라고 짧게 대답하고 나니, 문득 10여년 전 TS라는 명목하에 녹두거리 골방에 갇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아리송한 말들을 억지로 주워삼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뉴욕에 온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떠올린 한국 풍경이 담배 연기 자욱한 더러운 자취방에서 알튀세를 읽던 기억이라니... 스스로에 대한 어이없음과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기억에 자꾸 웃음이 나온다.
5.
몇몇 분들이 메일로 물어온 <푸코 이펙트: 통치성 연구> 번역은, 예정보다 많이 늦어질 것 같다.(그래도 이 오래된 책이 이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내가 맡은 부분은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럭저럭 마무리한 셈이지만 (아직 <말과 사물>을 다시 보면서 역주를 달아야하는 작업은 남아있다), 다른 역자분들과 한국에 남아 작업하시는 분들이 다들 바쁘신 분들인지라 작업이 예정보다 길어지고 있다. 거기에다 편집자인 Colin Gordon 선생이 써주기로 한 한국어판 후기는 이미 60페이지 가까이 되었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후기 번역까지 염두에 둔다면 아마도 책 자체는 내년은 돼야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있게 좀만 기다리라고 말씀드린 분들께는 죄송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푸코 이펙트>를 끝으로 당분간 번역 작업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정말 널리 읽혔으면 하는 글이 나타나고 혹시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주변의 타고난 번역가 분들과 비교하면 난 아무래도 번역 작업에서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더 느끼는 타입인 듯 하다. 예상했던 바긴 하지만,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채 의욕만 앞세워 번역서랍시고 책들을 낸 것도 시간이 갈수록 더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지난 세 번의 번역 작업을 통해 이론적 자원(<푸코의 맑스>), 자유주의와 탈정치화라는 이론적-정세적 지형(<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 통치성 분석이라는 방법론(<푸코 이펙트: 통치성 연구>)을 다룬 셈이 됐다. 한 편의 논문에서, 학문 지형과 이론적 자원, 방법론을 밝히면 보통 서론이 완성됐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얼마가 걸릴진 모르지만 그럭저럭 읽을만한 본론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주 잠깐만 더 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