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님의 [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 그리고 동물/속물적 주체성 ] & [책 두 권] 에 관련된 글

 

블로그에서 종종 언급했던 코제브의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속물에 대한 유명한 각주를 잠깐 짬을 내 옮겨 놓는다. 일본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 각주는, 조영일 씨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한 역주로 부분 번역된 적은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각주 전체가 번역된 적은 없다. 이 각주가 달려있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헤겔 독해 입문(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은 <역사와 현실변증법>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 초반에 번역된 바 있으나, 이 각주가 속한 장 전체가 번역에서 누락되어 있다.(원래 이 책 자체가 이런저런 강의를 모아서 편집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역자의 잘못은 아니다.)

 

사실 문화연구, 특히 소비문화(비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본 문화는 (직접적인 전공 대상이 아니더라도)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소비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넓이와 깊이 면에서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는 방대한 서브컬처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나같은 경우는, 그저 주변에 일본 유학생들이 많아서라고 해야 하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일본 문화를 둘러싼 논의 중 가장 유서 깊은 것이 바로 일본 문화가 뿌리부터 서구의 근대와는 구분되는 탈근대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문화의 "태생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 논의일 것이다. 이 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까지 연결될 수 있고, 그 역사가 깊은 만큼, 서양의 문화연구자들이나 일본인 자신들의 오리엔탈리즘(혹은 역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논의를 둘러싼 담론의 두께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논의는 이 포스팅에서 다룰 주제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70년대 이후 일본문화의 뿌리깊은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강조하는데 한 몫한 대표적인 서양 학자들의 텍스트가, 지금 소개하는 코제브의 각주와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이란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참고 삼아, 롤랑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에서 일본 문화를 가로지르는 특징 중 하나로 꼽고 있는 "텅 빈 중심"에 관련된 부분도 일부 옮겨놓는다. 

 

"일본 요리에는 중심이 없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장식물을 위한 또 다른 장식물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식탁이나 쟁반 위의 요리는 부분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그 어느 것도 영양 섭취에서 순서상 우월하지 않다."(30)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도시(도쿄)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이 도시에는 중심부가 있지만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다. 이 도시는 금지된 중립의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다."(40, 도쿄의 중심은 천황궁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숲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도시의 좌표를 구획하는 서양의 왕궁과는 달리, 숲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자 텅 빈 중심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비유는 일본의 천황과 서양의 왕(혹은 황제)를 비교하는 논의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사실 천황의 텅 빈 중심으로서의 속성에 대한 논의는 교토학파의 선조인 니시다 기타로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고 한다).-인용자)

 

 

코제브의 "속물론"이 일본 문화의 "키치"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이어진다면, 바르트의 "텅 빈 중심"에 대한 지적은 일본문화의 유아적 성격 그리고 패스티쉬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연결된다.(이 중 유아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저번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의미없는 형식화에 대한 강박과 텅 빈 중심을 메우는 혼종성과 다문화성은 일본 문화의 "태생적 포스트모던" 가설에 대한 중요한 지지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일본 문화와 포스트모던에 대한 이야기는, 그 논쟁의 기나긴 역사 만큼이나 정교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이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반농담처럼 인류의 미래를 묘사하고 있는 코제브의 각주는 마치 SF소설처럼 상당히 재밌게 읽힌다.(그의 나이 많은 제자 바따이유는 코제브의 이러한 엉뚱한 유머 감각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번역 대본은 Alexandre Kojève, James Nichols(trans.), 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 Cornell Univ. Press, 1969로, 이 각주는 6장의 6번째 각주로서 158쪽에서 162쪽에 걸쳐 실려 있다.  

 

 

초판의 각주

역사의 종말과 인간의 소멸은, 우주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세계는 항상 그러했듯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적인 소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 혹은 주어진 존재(given Being)와 조화를 이룬 채 살아남을 것이다. 소멸하는 것은 고유하게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 즉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행위와 오류, 즉 일반적으로 말해 대상에 대립하는 주체(the Subject)이다. 사실상, 인간의 시간이나 역사의 종말, 즉 고유하게 그렇게 불리워질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역사적인 개인의 소멸은, 행위(Action)의 종결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는 유혈 혁명과 전쟁의 소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철학의 소멸이기도 하다. 인간은 더 이상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진실된) 기본 원리들을 수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외의 나머지 것들, 즉 예술, 사랑, 유희 같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영구히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헤겔주의적 테마가 맑스에 의해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인간들(계급들)이 인정(recognition)을 위해 서로 투쟁하고 노동을 통해 자연에 투쟁하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를, 맑스는 “필요의 영역”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이를 넘어선 “자유의 영역”에서는, 인간은 어떤 유보도 없이 서로를 상호적으로 인정하기에 더 이상 투쟁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노동하지도 않을 것이다.(자연은 완전히 정복되어,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자본론 3권 48장 III절의 두 번째 단락 마지막 부분을 보라.

 

2판에 덧붙여진 각주
앞의 각주에는 모순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다소 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역사의 종말 이후 인간의 소멸”을 받아들인다면, 즉 우리가 “사라지는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며 “인간은 동물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술, 사랑, 유희 같은 나머지 것들은 영구히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다시 동물이 된다면, 그의 예술이나 사랑, 유희 또한 순전히 “자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 이후에 인간은 마치 새가 둥지를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잣듯이 자신의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만들 것이고, 개구리와 매미처럼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덧붙여 그들은 어린 동물처럼 유희하고, 다 자란 맹수처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을 행복(happy)하게 만든다”고 말해선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풍요와 안전 속에서 살아갈) 호모 사피엔스라는 역사-이후의 동물은, 그들의 예술적이고 에로틱하며 즐거운 행위에 만족하는(be contented with) 한, 그 행위의 결과로서 내용(content)이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나가보자. “고유한 인간의 소멸”은,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담론, 즉 로고스(Logos)의 소멸을 의미한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들은 음성과 “언어” 신호에 조건 반사처럼 반응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담론”이란 것은 벌의 “언어”와 유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지는 것은, 철학이나 담론적 지혜에 대한 추구만이 아니라 지혜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이후 동물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과 세계에 대한 어떤 (담론적) 이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의 각주를 썼을 때(1946년)에도, 인간의 동물로의 회귀는 미래의 전망으로서 아직 생각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1948년) 나는 헤겔과 맑스의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은 것(not yet to come)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현재이자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되었다. 현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고 예나 전투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반추해본 결과, 나는 예나 전투에서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의 종말을 본 헤겔이 옳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나폴레옹이 예나 전투를 통해 예나에 입성하던 그 시기,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완성한 사실은 유명하다.-역주) 이 전쟁을 통해 인간성의 전위부대는 인간의 역사적 진화라는 자신의 목적이자 한계, 즉 종말에 잠재적으로 도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에 의해 현실화된 혁명적 힘들의 보편적 공간으로의 확장일 뿐이다.

 

진정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번의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크고 작은 혁명은, 주변 지역의 뒤처진 문명들을 (실재적이건 잠재적이건 간에) 가장 발달한 유럽의 역사적 지위로 끌어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소비에트화와 중국의 공산화가 토고의 독립이나 파푸아뉴기니의 자치 선언 혹은 (히틀러로 귀결된) 독일 제국의 민주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로베스피에르식 보나파르트주의의 실현이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으로 하여금 혁명 전의 낡은 유산들을 제거하는 데 좀 더 열을 올리도록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낡은 유산의 제거는, 유럽 그 자체보다는 유럽의 확장판인 북미에서 더욱 빨리 진척되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는 미국이 이미 맑스주의식 “공산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계급없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이 내킬 때에만 일하면서 그들에게 좋아보이는 모든 것을 전유할 수 있다.

 

1948년과 1958년 사이에 미국과 소련을 몇 번씩 오가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미국은 부유한 중국과 소련이며, 소련과 중국은 빠르게 부유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가난한 미국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미국식 삶의 방식”이 역사-이후에 고유한 삶의 유형이며, 미국의 현존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현재”가 될 미래를 선취한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동물화는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확실한 일처럼 보였다. 


내가 이러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은, 1959년에 일본을 여행한 이후의 일이다. 나는 일본이라는, 이미 3세기 전에 “역사의 종말”을 체험한 사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평민 출신 히데요시가 봉건제를 해체하고, 그의 계승자인 귀족 출신 이에야스가 인위적으로 고립된 국가를 만들어낸 이후로, 어떤 내전이나 외부와의 전쟁도 발생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일본의 귀족들은, 심지어 결투에서조차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 노동에 종사하지도 않지만,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이후”를 살아가는 일본 문명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일본에는, 유럽적인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어떤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순수 형태로서의 속물성(snobbery)은, 강요된 노동이나 혁명적 투쟁 같은 “역사적” 행위와는 또 다르게 주어진 “자연” 혹은 “동물”을 부정하는 규율들을 창조해냈다. 확실히 가면극이나 다도, 꽃꽂이 등에서 드러나는 일본식 속물성의 정점은, 여전히 귀족과 부유층의 특권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전한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 즉 역사적 의미에서 모든 인간적 내용이 부재한 가치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인 경우 모든 일본인들은 완전한 무상(無償)의 자살을 행할 수 있다.(고전적인 사무라이의 할복은 오늘날 비행기나 잠수정의 자살 공격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정치적 내용을 가진 “역사적” 가치를 건 투쟁 속에서 맞는 삶의 위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최근에 시작된 일본과 서구 세계의 상호작용은 결국에는 일본의 야만화가 아니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서구의 일본화로 귀결될 것이다.

 

어떤 동물도 속물이 될 수는 없기에, 일본화된 역사-이후의 시대는 고유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이 인간 내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부분에 머무는 한에서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완전한 소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자연 혹은 주어진 존재와 조화를 이루는 동물은 결코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립하는 주체로 남아있어야 한다. 비록 주어진 것과 오류를 부정하는 행위 자체는 사라진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역사-이후의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내용(content)”으로부터 “형식(form)”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내용을 변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일종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자신과 타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이들과 대립되는 순수 형태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끝] 

 

 

덧.

코제브의 논의를 소개해 준 김홍중 선배는 반농담으로,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속물의 차이는 그들의 포르노그라피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미국의 포르노그라피에서 우리가 성욕의 충족을 위해 돌진하는, 코제브의 표현을 빌자면 "다자란 맹수처럼 사랑하는" 남녀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일본의 포르노그라피 속에서 우리는 마치 의례를 치르듯이 페티시화된 상대방의 육체(보통 여성의 육체)를 자극하는, 성행위에도 어떤 절제된 형식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남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두 나라의 포르노그라피를 접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흥미로운 차이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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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6 02:11 2008/04/26 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