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지인들의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2008년 올해가 68혁명 40주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올해 미 대선에서 68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미주류 언론들의 관점에 따르면, 힐러리는 68세대 그 자체의 상징이고 오바마는 되돌아온 68정신의 상징이다.  한편,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는 68년 힐러리 등이 우드스탁 축제를 즐길 때 자신은 베트남에 전쟁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발언으로 주가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 대선에서 "87년에 무엇을 했는가?"가 화제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어떤 사건을 둘러싼 평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추적하는 일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지표이기도 하다.(80년 광주에 대한 평가의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보라.) 아마 올해도 5월이 가까워지면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이제는 좀 시들해졌다 하더라도) 68에 관한 몇몇 논의들이 제출될 것으로 보이는데, 즐겁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혹은 나만의 전채요리 삼아 68에 대한 몇 가지 단상들을 적어 놓는다.

 

 

 

1.

 

68을 처음 접한 건, 대학교 1학년 때 세미나를 통해서였다. 그 때 읽었던 텍스트가 68에 대한 레지 드브레의 글 "프랑스 자본주의를 재탄생시킨 68년 5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져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쉽게 구해진다. 거진 1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카피레프트 홈페이지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카피레프트 홈페이지가 아직도 남아있다니... 빽빽한 편집에 투덜대며 <읽을꺼리>를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예전의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1978년 68혁명 10주년을 즈음해 쓰여진, 이제는 먼지의 두께가 제법 쌓인 이 글을 언급하는 이유는,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글이 지금도 68을 둘러싸고 반복해서 제기되는 비판들을 부분적으로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글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68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어, 90년대 중후반 한국 학생사회에서 너무나 급격하게 그리고 과도하게 진행되었던 68혁명의 신화화에 피곤함을 느낀 이들을 암묵적 동조자로 끌어들이기도 했다.(68에 대해 처음 접한 글이 드브레의 신랄한 비판이라니, 68과 68세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나의 입장은 이 때부터 운명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아. 가혹했던 나의 선배들..)

 

드브레의 글(앞서 소개한 카피레프트 홈페이지 <읽을꺼리> 2호에서 구해볼 수 있다)은 지금 보아도 몇몇 탁월한 식견들을 담고 있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 핵심 부분 몇 단락을 (번역을 조금 수정하여) 이 자리에 옮겨 놓는다.(혹은 이 글에서 드브레가 냉소적으로 말하듯이, "진중한 독서"는 68년 5월 이전에나 어울리는 낡은 문구가 되었기 때문에?)

 

 

"68년 5월은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의 요람이었다. 아직 그것이 실감되지는 않겠지만, 이제 누군가는 예견의 형태를 빌어서라도 그렇다고 이야기할 때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확신을 가지고, 제4공화국은 관성으로 1789년 7월 14일(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을 그들의 건국신화로 만들었다. 성숙한 제5공화국과 그 후계자들은 5월 한 달 전체를 -컴퓨터 테크놀로지와 생산력의 발달에 어느정도 도움을 받아서- 공휴일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바스티유 습격을 자신의 탄생으로 축하했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언젠가 자신의 재탄생을, 1968년의 “말의 투쟁”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48)

 

"5월에 꽃핀 정체성(다를 수 있는 권리)에의 요구는 착취 체계의 기능적 요구를 통해 등장했다. 개인 존재에 대한 제약으로 보였던 것이, 전체 사회영역의 상품으로의 변환에 대한 제약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자본은 순환하기를 열망했고, 젊은이들은 과거의 장벽들을 넘어서 소통하기를 원했다. 상상이 현실을 예지했고, 심장의 법칙이 효율성의 법칙과 일치했다....자본의 발전전략은 5월의 문화혁명을 요구했다.... 5월의 물결은 쓸모없는 장벽들을 동시에 쓸어버렸다. 전통의 낡은 무게, 무능에 대한 숭배, 관습의 위안 등등. 상점 진열장에서든 텔레비전 화면에서든 한번 둘러보라. 5월의 슬로건, 문헌, 개성과 사상은 '아주 잘 작동'하고 있다. 상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욱 더 좋게, 더욱 더 빠르게. 상품은 움직이는 축제, 정신없이 소용돌이치고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50-51) 

 

"5월운동의 학생들은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수단에 대한 질문은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5월의 목표는 '-을 하지 않는 것(not to do)'이었다. 한편 학생들의 목표는 '(더 낫게) 되는 것(to be (better))'이었으며, 노동자들의 목표는 '(더 많이) 가지는 것(to have (more))'이었다...이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되다(be)'와 '가지다(have)'는 공통적으로 '하다(do)'에 종속되어야 했지만, 공통적인 유일한 것은 어떤 종속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도부에 대한, 행동의 구조에 대한, 계획에 대한 종속이라는 생각 자체가, 반권위주의 봉기에서는 배격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아) '패배하지 않는' 정치 기획들의 상찬뿐이다."(55-56)

 


68에 대한 드브레의 날선 비판은, 30년이 지난 오늘날 좀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새로운 부르주아 체제는 68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드브레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일까? 오늘날 68 학생운동의 구호들("상상력에 권력을"이나 "뛰어라. 낡은 세계가 그대 뒤에 있다" 류의)은, 전복적인 정치 구호보다는 자기계발서나 경영전략서에 더 어울릴 법한 문구들이 되었고, "욕망의 자유로운 발현"으로 요약되는 68 정신은(68정신에 대한 이러한 식의 요약 자체가 지배 담론의 전략임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으로 전화 혹은 진화하였다. 68혁명 40주년인 올해, 신화화된 68 찬양이 아니라 68 정신과 그 유산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더 활발히 제기되길 바라는 것은, 남의 잔치에 재뿌리고 싶은 단순한 심통 때문만은 아닌 셈이다.
 

 

단, 드브레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점 한 가지. 10년이 지나 다시 읽으면서 든 생각이지만, 드브레의 68의 낭만성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개인 성향의 반영이라기보다는, 68이 일어난 지 10년 후 이제 사회 제도권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어버린 68세대의 어떤 정조(情操)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78년 당시 프랑스 좌파 중 최대분파였던 프랑스 사회당의 가장 큰 과제는 68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였다. "자주관리", "일상의 정치" 같은 68의 레토릭들을 흡수하면서 이를 어떻게 제도 정치화하는가라는 것이 이 과제의 핵심이었고, 이는 분명 68의 낭만성과 청년-운동적 성격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리라. 잘 알려진 프랑스 지식인계의 스캔들이지만, 남미의 게릴라 혁명 운동에 참여했던 레지 드브레는 81년 집권한 미테랑 사회당 정권의 외교정책 고문으로 취임한 후, 계속해서 제도권 정치인으로 활약하게 된다.(최근에는 무슬림 소녀들의 교내 히잡 착용을 금지를 정당화한 스타시 위원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악명(?)을 떨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글에서 68 당시 제도권 정당인 PCF가 보였던 행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이나, "시는 정치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68의 낭만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부분은,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조금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급진적 운동의 낭만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급진 정치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더 나아가  제도 정치로의 편향을 옹호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활용되는 풍경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다.  

 

 

 

2.

 

하지만 드브레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정작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드브레에 대한 앙리 웨버의 설득력 있는 반론에서 드러나듯이) 68을 청년 세대의 낭만적인 투쟁이라고 비판하는 드브레의 입장이 사실 지배권력에서 바라보는 68에 대한 상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즉, 비록 드브레의 비판이 일정정도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하더라도, 그의 비판이 좀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68년 5월 자체가 아니라 68년 5월의 의미를 낭만적 반-문화 운동으로 환원시키는 지배 담론들의 의도와 그것의 효과에 맞춰졌어야 할 것이다.  68의 수많은 얼굴은 드브레 식의 간단한 정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68에 접근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단순한 기준에 맞춰 분류해 보자면, 크게 보아 미국과 유럽의 청년 운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과 베트남을 비롯한 제3세계에서 벌어진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 이 두 가지 흐름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정세적으로 서로 얽혀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미국의 68은 반-베트남전 운동이라는 배경과 흑인민족해방 운동의 자장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프랑스에서의 5월 역시 10여년 전 알제리 독립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회적 균열과 무관하지 않다. 동유럽에서의 투쟁들은 민주화 투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미국을 정점으로 하고 소련이 하위 파트너로 기능했던 냉전 제국주의 체제 전체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될 수 있다.(이러한 중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슬로건이 이탈리아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 중 외쳤다는 "베트남은 우리의 공장이다"라는 구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에 강조점을 둔, 즉 68 당시의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68을 해석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편인데, 이런 관점에서 섰을 때 우리는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제1세계에서의 투쟁이 가지는 수많은 연결고리들을 명확히 할 수 있을 뿐더러, 68 이후 자본주의의 세계체제적 변화을 설명하는 실마리들도 얻을 수 있다.(아마도 이렇듯 68을 세계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입장의 대표주자는, 68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이후의 변화를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국면으로의 이행으로 해석하는 세계체제론의 입장일 것이다. 헤게모니 이행이라는 그들의 예언(?)이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미국 경제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올해, 68과 그것의 잔향에 대한 이들의 평가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런 식의 접근은 "낭만적인 반-문화적 청년운동"이라는 68에 대한 지배적인 스펙타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한편, 이러한 스펙타클이 생산해낸 효과인 구좌파/신좌파의 대립 구도에도 약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구좌파/신좌파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내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90년대의 구좌파/신좌파 논쟁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간단히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최소한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는다. 이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운동진영을 과도하게 결정짓고 있는 NL/PD 논쟁과 비교해보라.) 누군가의 말처럼, 제도화되고 개량화된 노동운동 구좌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적 조건 속에서, 이 논쟁은 결국 몇 가지 레토릭 간의 대립으로만 현상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우리가 던져봄직한 질문은 그러한 한국의 객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구좌파/신좌파의 논쟁 구도가 90년대를 가로지르며 포스트맑시즘 논쟁-시민사회 논쟁-신좌파 논쟁-신사회운동 논쟁 등으로 반복해서 회귀하도록 만든 동력은 무엇일까란 질문이다. 여기서 질문의 답에 대한 (약간은 무책임한) 가설을 제기한다면, 90년대 내내 형태만 바뀐 채 반복적으로 회귀했던 이러한 일련의 논쟁의 이면에는, “포스트”, “시민/공공성”, "부문운동" 등의 외피 하에 사회적 적대를 부인(disavowal)하고자 하는 욕망이 놓여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하고 싶다. 혹시 이러한 적없이 벌어진 논쟁 구도의 '진짜' 목표는, 80년대를 지배했던 적대로 분열된 사회상을, 더욱 파편화시키는 방향을 통해서 혹은 완충지대를 설정하는 방식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움직임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점이 ‘단일한 모순'  대 '파편화된 갈등들’의 대립 구도 속에서 “복수의 보편적 적대의 승인”이라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혹은 가장 절충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발리바르의 논의가 비교적 소수의 지지 만을 받는 데 그쳤던 이유가 아닐까? 90년대의 논쟁들에 걸려있었던 문제는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걸었던) 사회적 적대의 재구성이 아니라 적대 그 자체로부터의 탈주였던 것이다.(그래서 이러한 구도는 나로 하여금 "90년대 한국 사회의 논쟁에 관해서라면" 항상 (마치 유령과도 같은) 정통적-민중사회적-구좌파적-노동운동중심적 좌파의 입장에 동일시하게 만든다.))

 

여담이지만, 오늘날 이러한 적대의 부인이 지배적인 사회적 인식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예는, 80년대 NL/PD 논쟁의 2000년대적 재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NL의 이념은 반제국주의 투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 공동체의 번영 추구"를 위해 적용되고, PD의 논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비판에서 "민생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변화가 보여주는 것은, 적을 식별하기 위해 개발된 논리가 적대 자체를 부인하는 새로운 조건 속에 재기입되었을 때 발생하는 희극성이 아닐까?(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 NL/PD의 구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진짜’ 이유일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영역까지 너무 나가버린 논의를 정리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최근 비록 정신분석이라는 긴 우회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사회적) 적대' 혹은 계급투쟁이라는 문제설정이 조금씩 복귀하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뒤늦은 복귀는 아마도 이제는 모방의 대상에서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68-이데올로기의 처지 그리고 87년 이후 지속된 "장기 90년대"를 지나 이제 새로운 적대적 정치의 모델을 개발해야할 우리의 필요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  

 

최근 다른 글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린 "Hatred of Capitalism: A Semitext(e) Reader"에 (사실상 68의 적자라 할 수 있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흥미로운 제목의 글이 있어서 잠 안오는 야심한 밤에 훌쩍 번역해 놓는다. 그다지 중요한 글이라곤 할 수 없지만, 들뢰즈의 "사건" 개념을 언급할 때 가끔 제사의 형태로 언급되는 낯익은 글이기는 하다.(그리고 68이후 약 20년이 흘러 쓰여진 이 글에서 묘사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개인적으로 68 세대와 그들의 문제의식이 이제는 계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비판적 입장의 한 켠에는 이들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말이지, 다시 회귀하여 반복되는 자신들만의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혹은 만들어낸 이들 세대에 비하면, 충실해야 할 어떤 '집합적인' 정치적 사건도 경험하지 못한 혹은 만들어내지 못한 지금 우리 세대는 얼마나 불행한가? 

 

 

 

 

 

68년 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장소를 갖지 않았다

(May 68 did not take place) 

 

 

들뢰즈&가따리
 


프랑스 혁명이나 빠리 꼬뮌, 러시아 혁명 같은 역사적 현상들에는, 언제나 사회적 결정론이나 인과관계의 연쇄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한다. 사실을 통해 인과관계를 재구성하는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그 자체로 인과관계의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파괴이다. 그것은 하나의 분기이며, 규칙 없는 별종이고, 가능한 것(the possible)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 젖히는 불안정한 조건이다. 물리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차이가 소멸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유지되면서, 독립적 현상들이 상호-공명하는 상태에 대해 말한바 있다. 사건은 우회될 수도, 억압될 수도, 포섭될 수도, 배반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이 사건을 낡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살아남기 마련이다. 오직 배신자만이 사건을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고대에 일어난 것이라도, 사건은 결코 지나간 일일 수 없다. 그것은 가능한 것으로의 열림이다. 사건은 개인의 내부만큼이나 사회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현상 68은, 사실 결정론이나 인과관계를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것의 본질적 특성은 아니다. 68년 5월은 순수한 사건의 질서였으며, 모든 일반적인 혹은 규범적인 인과 관계로부터 자유로웠다. 그것의 역사는 “확대된 불안정성과 동요”의 역사이다. 68년에는 많은 선동과 구호, 바보 같은 행위들과 환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갑자기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모두가 변화의 가능성을 본 마치 환영과도 같은 현상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집합적인 현상이었다. “내게 가능한 것을 줘. 그렇지 않으면 질식해 버리겠어” 가능한 것은 미리-존재하지 않고, 사건에 의해 창조된다. 그것은 삶의 문제이다. 사건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낸다.(신체, 시간, 섹슈얼리티, 주변 환경, 문화, 일과의 새로운 관계 말이다.)
 
사회적 변화가 나타났을 때, 경제적-정치적 인과관계에 따라 그 결과와 효과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는 새로운 주체성에 어울리는 집단적 행위자를 형성해내야만 하며, 그럴 때에만 스스로의 변형을 욕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재배치(redeployment)이다. 미국의 뉴딜 정책과 일본의 경기부흥(boom)은, 이러한 주체적 재배치의 상이한 두 가지 예를 보여준다. 그것이 가진 모든 모호함과 심지어 반동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재배치는 새로운 사회적 국가가 사건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충분한 주도권과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68년 이후 프랑스에서 정부는 사람들이 계속 “앞으로 사태가 진정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실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파국적 상태로 진정되었을 뿐이다. 68년 5월은 위기의 결과도, 위기에 대한 반응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현재적 위기이며, 68년 5월을 동화시키지 못하는 프랑스 사회의 무능력으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파국이다. 프랑스 사회는, 68이 요구한 것, 즉 집합적 수준에서 주체적 재배치를 창조해내는 것에 근본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프랑스 사회는 결코 인민의 요구를 따라잡지 못했다. 새로운 모든 것은 스쳐가는 그림으로 환원되거나 주변화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롱위(Longwy)의 주민들이 철강 산업에 매달려있고, 낙농업 농부들이 그들의 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더 있겠는가?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주체성에 의한 집합적 발화는, 68에 대한 우파뿐 아니라 좌파 쪽의 반동으로 인해 점차 붕괴되어 왔다. 가능한 것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곧 닫혀 버렸다.
 
비록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늘날 68의 아이들은 어디에서라도 마주칠 수 있다. 각각의 국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68의 아이들을 생산해냈다. 그들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이들은 젊은 간부가 아니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무관심하며, 이런 점에서 우파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것 저것을 요구하거나 (자신들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나르시즘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 어떤 것도 그들의 잠재적 에너지나, 주체성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모든 현재의 개혁들이 그들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그저 열어놓은 채, 가능성(possibility)을 붙잡고자 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러스티 제임스(Rusty James-한국에는 <럼블 피쉬>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역주)>란 영화에서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낸 바 있다. 배우 미키 루크는 말한다. “그 인물은 벼랑 끝에 몰려있어요. 그는 지옥의 천사(Hell’s Angel-영화에 등장하는 폭주족 갱단:역주)같은 유형은 아니죠. 그는 머리도 좋고, 센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어요. 이 점이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거죠. 그는 자신을 고용하려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똑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직장이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리베라시옹 1984년 2월 15일자)
 
이것은 다른 세계에서도 사실이다. 우리가 실업자와 은퇴자 혹은 학생들을 위해 제도화한 것은, “포기의 상황(situation of abandonment)”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이들에게는, 장애인이 전범이 된다. 오늘날 집합적으로 발생하는 유일한 주체성의 재배치는 고삐 풀린 미국식 자본주의이거나 이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나, 브라질에서 발생한 흑인 종교 같은 것들뿐이다. 이는 새로운 교조주의의 뒤집혀진 형상이다.(유럽에서 등장한 신-교황주의 역시 덧붙여야 할 것이다.) 유럽은 어떤 제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프랑스는 더 이상 미국화되고 과다-무장 상태인(그런데 이러한 과다-무장은 필연적으로 위로부터의 경제적 재배치를 부과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의 리더쉽을 주장할 야망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가능한 것의 영역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동-서 축을 보자면, 가능한 것의 영역은 평화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군비확장을 저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 간의 공모 관계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말이다. 또한 남-북 축을 보자면, 가능한 것의 영역은 새로운 국제주의에 존재한다. 그것이 더 이상 제3세계의 연합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국가 내부에서의 제3세계화와도 연계된다면 말이다.(폴 비릴리오가 지적했듯이, 메트로폴리스의 발달과 도심의 몰락은, 유럽 내 제3세계의 등장을 가져왔다.) 오직 창조적인 해결책들만이 가능하다. 이들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작동하고, 일반화된 68이라는 증폭된 분기와 혼동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는 창조적인 재배치들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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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0 03:47 2008/01/30 0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