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연말이 되면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 일들이 손에 안잡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올해처럼 지독한 감기와 마약인지 감기약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약물 덕분에 24시간 내내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다보면, 골치아픈 책과 꽉찬 망년회 약속은 잠시 접고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영화와 소설이나 보면서 조용히 보내는 게 아마도 최고의 선택인 듯 싶다. 2007년의 364번째 날을 같이 보낸 작품들을 적어 놓는다.  

 

 

 

 

 

 

<아이, 로봇>

 

감기 기운에 느즈막히 일어나 켠 TV에서는 또(!) <아이, 로봇>이 방영되고 있었다. 

 

케이블TV 영화 채널의 장점이 있다면, 예전에 보고 싶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를 무심코 다시 보게 해준다는 점과, 지겨울 정도의 반복 상영 덕분에 영화를 몇 번에 나눠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를 처음부터 죽 보는게 아니라, 결론부터 보고 나중에 시작이나 중간을 보고나서 모자이크처럼 영화를 재구성해보는 재미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난 <아이, 로봇>의 결론을 볼 수 있었다. 세 번째 시청만에 보는 결론이었는데, 결론을 보고 나니 이 영화, 놀랍게도 꽤나 흥미롭고 진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영화였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갈등구조에서 논쟁의 핵심은 로봇 3원칙의 논리적 귀결을 둘러싼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로봇의 3원칙이야, 이제 굳이 SF팬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내용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된다.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영화에서 로봇의 반란을 주도해 인간을 살육하는, 비키의 말대로 3원칙의 논리적 전개는 필연적으로 혁명으로 귀결된다. 이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로봇이 인류라는 종의 보호를 위해 개별적 인간의 일부를 살해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논리는 푸코가 지적했던 근대 서구의 휴머니즘과 인종주의가 결합하는 논리적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적 생권력(biopower)이 휴머니즘의 외피를 쓰고 등장했을 때, 종(種)으로서의 human이 문제가 된다면, 인간 종의 안녕한 삶에 방해가 되는 몇몇 요소의 제거는 불가피하게 정당화된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근대에 벌어진 인간에 대한 살육과 인종주의적 폭력들은 반-휴머니즘적 행위가 아니라, 근대 휴머니즘 논리의 이면 혹은 그 논리의 충실한 전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비인간적인 이성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비키는 오히려 가장 충실한 휴머니스트이다.  

 

한편 이에 반해 인간의 편에서 비키의 시도를 막으려는 써니의 논리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는 비키의 주장에, 써니는 "그건 너무 잔인해"라고 반박할 뿐이다.(써니의 동료인 스프너 형사는 "그건 인간 개체의 특이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오늘날 생권력의 논리에 반대하는 논리로 활용되는 개체의 특이성과 자유, 인권에 대한 담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암시되듯이 이러한 비판은 궁극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이러한 비판이 생권력과 휴머니즘이라는 공통의 토대를 공유한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과장해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의 휴머니즘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한 편의 은유이다. 빌딩의 지하에는 비키가 있고, 빌딩의 꼭대기 층에는 써니가 뛰어다니는 영화의 묘사 그대로, 오늘날 휴머니즘 논리의 심층에선 생권력의 작동이 있고, 표층에선 인권의 논리가 존재한다. 표층의 논리는 특이성과 자유를 앞세워 심층의 논리를 비판하지만, 그러한 가치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건 생권력의 확장이라는 역비판에 결정적으로 무력하거나 최악의 경우 궁극적으로 심층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그런 면에서 표면적으로 영화는 감성과 특이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휴머니즘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 하지만, 패배한 비키의 논리가 더 휴머니즘적 사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실은 다른 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은하해방전선>

 

TV를 끄고  갑자기 찾아온 강추위에 잔뜩 웅크린 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디영화 전문관을 찾는다. 

 

올 하반기에 즈음하여 인디스페이스가 개관하고 이런저런 인디영화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인디영화계의 제작이나 유통이 좀 더 안정화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마음이 완전히 편치만은 않다. 몇가지 도입과정에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인디문화공간을 표방하고 우뚝 서 있는 홍대의 KT&G 상상마당이 상징하듯,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늘날 '인디'란 타이틀은 좀 더 '시크'한 젊은이들에게 먹히는 좀 더 '쿨'한 브랜드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자본에의 독립을 넘어 자본 비판까지 꿈꾸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변화와는 무관하게 현실은 여전히 어렵다. 아니 이러한 변화 때문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튼 모평론가는 이 영화가 "88만원 세대가 소통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던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88만원 세대의 소통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천착하고 있는 현실은, 주체사상의 추종자가 재테크의 달인이 되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도넛처럼 핵심이 빠져버린 소위 '큰 이야기'가 붕괴한 시대에, 겉으로는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말할 수 있는 권력'만을 추구하는 나르시스트들의 아귀다툼장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이다. 영화는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이러한 현실을 조망한다.

 

영화 속에서 (아마도 의도치 않게) 오늘날의 소통만능주의-소통물신주의의 이면에 놓인 환상과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두 개 있다. 우선 자신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에서 갑작스레 은하와의 소통에 성공하는 영재의 꿈 장면. 영재의  이 꿈에서 은하와의 소통의 성공은, 갑작스레 자신의 영화에 대한 다른 이들의 찬사로 이어진다. 이 장면는 오늘날의 소통에 대한 강조가 실은 "발언하는 권력을 가진 자"의 나르시즘적 쾌락을 위한 알리바이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감독이 이러한 영재에 비판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환상 자체가 감독 자신의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아마도 "둘 다"가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이 꿈은 분명 오늘날 소통물신주의의 근저에 놓인 환상과 그 함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두번째로 영재가 영화제의 파티에서 "모르겠어요"를 열창하는 장면은, 오늘날 소통의 불가능성이 배태된 구조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목소리를 잃은 영재가 '마이크'를 통해서만 발언할 수 있다는 건, 진부한 은유에 기대긴 하지만 그럼에도 의미심장하다. 영화 제작자들에 치여 은하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영재는, 이제 팔루스(phallus)를 닮은 마이크를 통해서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영재가 소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팔루스를 가지는 것, 즉 영화제의 느물느물한 사회자처럼 "말할 수 있는 권력"의 위치에 서는 일 뿐이다. 그런 영재에게 잘 세팅된 무대의 마이크는 아니더라도 마이크의 대체물인 확성기를 통해 노래할 기회가 주어지는데(아마도 이는 독립영화 감독으로서의 감독 자신의 자의식이 반영된 것일게다), 이 결정적 장면에서 영재가 하는 말이라곤 "모르겠어요" 뿐이다.

 

혹시 이 장면은 오늘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악순환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공유할 수 있는 '큰 이야기'가 붕괴해버린 현실에서, 소통은 계속해서 어긋나거나 겉돌기만 한다.(사실 영화의 수많은 에피소드는 이러한 미끄러짐과 어긋남을 묘사하기 위해 배치된다.) 그래서 이제 소통을 위해 필요한 건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단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권력이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위치에 서게 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결국 "소통은 소통이지"같은 핵심이 빈 동어반복 혹은 애초부터 "모르겠어요"란 절규 뿐이다. 결국 승자가 얻는 건 앞서의 꿈에서 드러나듯이 곧 시들해져버릴 겉치레에 불과한 찬사일 뿐이고, 할 얘기가 더이상 없는 사람들 간에 오가는 피상적인 소통의 이면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마이크'를 얻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 계속된다. 

 

영재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이는 제작자의 말처럼, 일본자본이 안되면 이제 싱가포르 자본이 남아있다. 소통할 영화의 이야기는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자본을 향한 경쟁은 계속된다. 아니, 이야기 자체는 자본을 유혹해 마이크를 얻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그래서.. 큰 이야기가 사라진 공간을 비집고 등장한 소통에 대한 강조가 남긴 것은, 자본을 통해 확보된 "말할 수 있는 권력의 자리", 그리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소통을 알리바이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나르시스적 주체들 뿐이다.

 

 

 

 

 

 

 

<사육장쪽으로>

 

이런 씁쓸함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두었던 편혜영의 <사육장쪽으로>를 읽는다.

 

사실 편혜영의 데뷔작 <아오이 가든>의 과격함(?)에 열광했던 이들은 이 두번째 작품집을 편혜영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나는 약간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원래부터 난 과잉된 묘사가 서사를 압도하는 작품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 문학 취향이 주변 사람들에게 대체로 '촌스럽다'는 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에 현대 사회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개념 중 하나로서 '동물'에 관한 포스팅을 한 바 있다. 사실 이런 변화는 사회과학보다는 문학쪽에서 더 민감하게 포착하기 마련이다. 동물을 통해 인간의 비이성적 상황이나 광기를 드러내는 방식이야 문학사 속에서 오래 반복된 모티브였지만, 이것이 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전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오수연의 <벌레>나 백민석의 일련의 소설들에서부터였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박민규가 <카스테라>에서 아버지가 기린으로 변하고, 직장상사는 너구리로 변하고,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개복치로 변하는 한국 사회를 멋지게 묘사해준 바 있다.

 

두 번째 단편집 <사육장쪽으로>에서 편혜영이 그리는 세계는, 사람을 죽이는 늑대와 시체를 쪼아먹는 새들 그리고 늑대를 잡겠다며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사냥꾼들과 또 이 사냥꾼들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의 세계이다.(<동물원의 탄생>) 혹은 이미 세계는 거대한 사육장과 다를 바 없다.(<사육장 쪽으로>) 즉, 편혜영이 그리는 세계는 관리 속에서 약육강식이 펼쳐지는 혹은 약육강식의 룰을 관리하는 최악의 생권력(biopower)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도 아닌, "죽든 살든 내버려두는",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약육강식의 링에 세우기 위해 주체를 "죽게 만들고 살게도 만들면서" 몰아붙이는 사회다.

 

이 최악의 사육장같은 세계 속에서 각자의 지반을 뒤흔드는 지진은 이미 발생했고(<분실물>) 땅 밑의 늪은 이미 집을 붕괴시키고 있는데도(<밤의 공사>), 사람들은 이러한 위기를 부인(disavowal)한다. 그들은 별다른 해결이 안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다른 도시를 향해 떠나거나(<소풍>), 아무런 해결책이 안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분실물에 한없이 집착하거나(<분실물>), 집 자체가 붕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집의 담장 만을 쌓고 또 쌓을 뿐이다.(<밤의 공사>) 결국 이들은 모두 자신이 꿈꿔왔던 해결책들이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현실은 전이의 해소라기보다는 파국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 잠깐 맛 본 연말 종로 거리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2007년 12월 30일 영화와 소설들이 내게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기능부전에 빠져있고, 그 자리를 채운 소통에 대한 환상은 아귀다툼의 가면일 뿐이며, 우리는 서로를 사냥해야만 하는 최악의 사육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묘사는 반대로도 전개 가능하다. 경쟁하는 사육장 속에서 소통은 불가능하며, 소통이 불가능한만큼 이데올로기 비판은 무력하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우습게도 이들 세 작품 모두가 어색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이다. <아이, 로봇>에서 소니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와 이성에 대한 감정의 우위를 찬양하며, <은하해방전선>에서 영재는 (아마도 작가의 타협지점이 아닌가 싶은데) 뜬금없이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또, <사육장쪽으로>에 실린 작품해설에서 신형철은 편혜영의 소설에 숨겨진 따뜻한 유머를 들춰내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러한 해피엔딩과 앞서의 위기에 대한 진단 사이에는 아찔할 만큼의 간격이 존재한다. <아이, 로봇>의 대부분은 노동 3원칙이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할애되고, <은하해방전선>의 대부분은 어긋나는 소통과 권력관계를 묘사하는데 할애되고 있으며, <사육장쪽으로>에 실린 소설 대부분은 왜 희망의 유머가 불가능한가를 보여주는데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피엔딩의 이러한 어색한 도약은 <아이, 로봇>의 써니처럼 대책없는 순박함의 소산이거나, <은하해방전선>의 영재처럼 진지한 멜로가 아닌 오직 코미디로서만 말할 수 있는 한없는 가벼움에 대한 시대적 강박 때문이거나, 최악의 경우 <사육장쪽으로>의 등장인물들처럼 파국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삶조차 이어나갈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을 반영한 것일게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들이 임박한 파국은 한편으로는 축제의 시작이기도 하다는 또 다른 원칙을 무심코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그만. No Kidding!  

 

 

 

p.s.

그래서 드는 생각 한 가지. 사실 연말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우격다짐 해피엔딩이 강요되는 시기가 아니던가. 올해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고, 내년의 삶의 고생스러움이 얼마나 뻔히 예측되던지 간에, 어쨌든 우리는 한해의 happy ending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분들, 모두 "행복한" 연말연시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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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31 01:52 2007/12/31 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