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연습님의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의 흔적을 생각함(1).] 에 관련된 글.

역시나 댓글을 달려다 넘 길어질 것 같아 트랙백.

 

 

문화대혁명에 대한 무한한연습님의 글을 읽고 몇 년 전 문화대혁명과 상하이 꼬뮌에 대해 썼던 짤막한 페이퍼를 기억해 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상하이 꼬뮌에 대한 자료는 물론이고) 한글로 된 문화대혁명 자료조차 거의 없어서, 부족한 영어 실력에 모리스 마이스너의 책을 낑낑대며 붙잡고 있었던 아픈 기억이 난다. (그 때만 해도 디스켓에 파일을 넣어 다니던 시절이라 불행히도 페이퍼 파일은 디스켓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다. 보나마나 부끄러운 내용들이 잔뜩 있었겠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고는 싶은데..)

 

아마 문화대혁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상하이 꼬뮌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상하이 꼬뮌(1월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은 문화대혁명이 점차 고조되던 1967년 1월, 상하이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를 거부하고 자체 꼬뮌을 선언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상하이 홍위병들과 노동자들은 “조반유리 혁명무죄(造反有理 革命無罪)”라는 문화대혁명의 공식적 구호에 충실히 좇아, 파리 꼬뮌을 모델로 국가와 당을 폐지한 노동자 자율의 사회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내 기억이 맞다면, 상하이 꼬뮌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었다. 상하이 꼬뮌을 계기로 이전까지 소수 학생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화대혁명에 노동 계급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세운 상하이 꼬뮌은 설립된 지 단 18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는데, 이 때 자발적으로 수립된 꼬뮌을 해체한 장본인은, 의미심장하게도 문화대혁명을 지시했던 마오 자신이었다. 마오는 노동자 자치 조직을 건설하겠다는 꼬뮌의 목표가 지나치게 무정부주의적이고 반혁명을 분쇄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며, 상하이 꼬뮌에 당의 지도를 따를 것을 명령하게 된다.(물론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대한 진압같은 직접적인 무력행사는 없었지만, 마오의 이같은 결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부분적 저항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대체로 상하이 꼬뮌의 해체는, 급진화에 제동을 걸고 다시금 통제와 안정으로 회귀하게 된 문화대혁명의 전환점으로 인식된다.(하지만 중국이 워낙 넓다보니 통제를 재확립하려는 노력은 70년대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다.) 또 혹자는 상하이 꼬뮌의 해체가 실제 혁명의 완수보다는 마오 자신의 권력 찬탈에 더 초점을 두었던 문화대혁명의 본질을 보여준는 사건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실제 마오는 상하이 꼬뮌 이후 농촌 하방 등의 방식으로 학생 홍위병들과 노동자들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더 나아가 좀 극단적이지만 문화 대혁명 이후 지속된 중국 공산당의 우경화가 이 상하이 꼬뮌의 해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사실 문화대혁명만큼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는 사건도 드물다. 홀로코스트와 함께 인류의 가장 큰 재앙이라는 (우리들에겐 가장 익숙한) 우파들의 논리가 있는가 하면, 마오에 대한 개인 숭배로 점철된 권력 투쟁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기묘하게도 우파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트로츠키주의적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실제로 의료 등의 복지 부분에 있어서 민중들에게 도움이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조금은 나이브한 신-마오주의에 기반한 해석이 있는가 하면, 좌편향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 외에는 대체로 침묵과 망각에 기대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은 중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도 존재한다. 사건으로서의 문화대혁명과 이론으로서의 마오이즘 자체를 분리하여 접근하려는 이론 진영의 입장들까지 검토하자면 평가는 더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평가의 어려움이, 문화대혁명을 몇몇 통계 수치나 마오 개인의 의도로 환원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사건으로 평가하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대문자로서의 문화대혁명과는 별개로, 그 사건 안에서는 상하이 꼬뮌과 같이 실제 공산주의의 이념을 한발 짝이라도 진전시키려는 아래로부터의 노력들이 있었고, 이러한 시도와 노력들 자체는 그 직접적 결과나 마오의 의도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문자로서의 문화대혁명을 해체하고, 그 파편들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위한 요소들을 발견해내는 작업이 아닐까?  

 

몇 년 전 상하이 꼬뮌에 대한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혁명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혁명의 공식적 이념에 끝까지 충심(fidelity)을 유지하여 실패하는 이들이 존재한단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모든 ‘인간(man)’은 평등하다”라는 공식적 구호에 충실하고자 했던 올랭프 드 구주와 1848년의 노동자들, 러시아 혁명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공식적 구호에 끝까지 충실하고자 했던 크론슈타트 해병들, “조반유리 혁명무죄”라는 문화대혁명의 공식적 구호에 충실해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갔던 상하이 꼬뮤나르드 등등.. 만약 역사가의 임무가 역사의 결을 거슬러 솔질해 얻은 파편들로 새로운 별자리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말이 옳다면, 아마도 그 별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이들, 즉 혁명의 공식적 이념에 비타협적으로 충실했던 그래서 실패했던 이들이 차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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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4 22:24 2007/11/24 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