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시대

from The Ticklish Subject 2007/10/07 14:43

 

대학원에 몸 담고 여기저기 공부로 사람들과 얽히다 보면, 종종 같이 공부했던 이들이 자신이 쓴 책이나 번역한 책 혹은 논문 등을 선물로 건넬 때가 있다. 속표지에 몇 마디 말이 적혀있는 이 소중한 선물을 받아서 시간 날 때 한장 한장 넘겨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인데, 그건 내가 예전부터 쓸데없이 책 욕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 옆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왠지 책을 사이에 두고 그 사람과 내가 직접 대화하는 기분이랄까? 사실 많이 친하거나 혹은 관심 분야가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같은 연구실에 있는 사람조차 무슨 공부를 하면서 사는지 자세히 알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논문 제출 기간이 끝난 후 한동안 뜸하다가 며칠 전에 한꺼번에 두 권의 책을 받게 됐다. 둘 다 선배들이 쓴 책으로, 하나는 뉴욕 미술관 탐방기 정도 되는 여행 서적이고, 다른 한 권은 몇 년 전부터 꽤 많이 나오는 것 같은 고등학생이나 대학 신입생 정도를 대상으로 한 <공산당 선언> 해설서다. 미술책을 건넨 선배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미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고 게다가 뉴욕엔 양키스나 닉스 경기 외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나이기에, 좀 더 친근한 후자에 먼저 눈이 간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선배인 책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압축적인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최대한 손쉽게 풀어써주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단순 정보 전달에만 그치지 않겠다는 포부도 드러난다. 아무튼 저자는 "공산주의 선언의 정신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으며, 선언의 문제의식은 현재적임"을 반복해 강조하면서 현재적 쟁점들과 <선언>을 계속 연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진지한 맑스주의자인 선배답다. 하지만 꽤나 충실한 내용과 선배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왠지 이런 책을 마주할 때면 항상 느끼는 씁쓸한 뒷맛은 여전히 남는다. 아마도 책을 둘러싼 이쁜 포장줄에 박혀있는 (선배의 진지함과 묘하게 대조되는) "이 시대 청소년의 교양을 위한" 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었으리라. (기우로 덧붙이자면, 밑의 내용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지식이 유통되는 풍토에 대한 소회일 뿐, 선배나 그 선배가 지은 책의 내용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오늘날 인문사회학계는 "교양"이라는 말이 넘쳐나는 이른바 "교양의 시대"라고 할 만 하다. .(대체 그 교양이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대중의 교양의 부족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TV 프로그램이 대중의 교양을 높여주겠다고 팔 벗고 나서기도 한다. 인문학계에 몸담은 지식인들이 "인문학의 위기"와 이의 원인이 되는 대중의 교양 부족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이제 너무나 반복되어 지겨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교양이라는 단어의 영향력을 제대로 실감한 건 오늘 선배의 책을 보고 나서야였다. 책 표지에 나란히 병렬되어 있는 "공산당 선언"과 "교양"이란 단어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아찔한 간극을 애초에 없었던 것인양 에둘러치고 있는 "교양"이란 단어를 보니, 오늘날 "교양"이란 단어가 가진 포식적-식인귀적 특성이 몸으로 느껴졌다고나 할까. 대체 혁명을 선동하는 선언문을 교양으로 읽으라니, 이건 왠 후기자본주의의 냉소주의와 속물주의가 뒤범벅된 그로테스크한 명령인가? 

 

 

어디에선가 지젝이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적 앎의 특징으로 분파주의를 꼽은 적이 있다. 두 앎의 형태 모두  분파주의적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이러한 특징은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적 앎에 공통적인 당파성과 진리 간의 특수한 단락 때문일 것이다. 맑스주의적 앎 속에선(혹은 정신분석적 앎 속에선) 여타의 다른 과학에 대한 논변들과는 달리 객관적인 앎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적 앎의 핵심은, 적대가 가로지르는 사회 속에서 피지배계급의 입장이라는 당파적인 입장에 섰을 때에만 그 사회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맑스주의적 진리는 당파성을 제거함으로써 드러나는게 아니라 당파성에 충실할 때에만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적 진리는 실재를 부인하는 객관적 위치로 후퇴하는 게 아니라 실재의 부름에 충실할 때에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앎/정신분석적 앎은 그 자체로 "이런 입장을 취하라"라는 수행문이기도 하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쓰자면, 맑스주의적 앎은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 "되기"의 요청이고, 정신분석적 앎은 윤리적 주체 "되기"의 요청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되기"를 행한 이후에야 맑스주의적 "앎"을 얻을 수 있다.(따라서 맑스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어 온 신화, 즉 "노동자들에게는 자본론이 쉽다더라"는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지만, 한 편으로는 맑스주의적 앎이 가진 특징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맑스주의적 담론 속에서 노동자들은, (흔히 오해되듯이) 단순히 지식인들에 의해 계몽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식인들보다 이미-항상 많이 알고 있는 존재이다....)

맑스주의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주체의 지반을 완전히 뒤흔드는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앎의 순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정신분석에서 앎 자체가 증상의 치유와 연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적 앎/정신분석적 앎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맑스주의적 앎/정신분석적 앎은, (그 앎에 충실하다는 전제 하에서) 주체로 하여금 현재와는 더 이상 동일하게 사고하고 동일하게 생활할 수 없게 만드는, 혹은 그러할 때에만 획득될 수 있는 그런 앎이다.(여담이지만 따라서 맑스주의적 논쟁에서 발화자의 입장이 가진 쁘띠부르주아적/개량적/타협적 성격에 대한 비난은, 흔히 이야기되듯이 단순한 인신공격의 오류나 분파주의의 폐해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맑스주의 내에서 분파주의는 맑스주의적 앎에 충실할 것, 즉 당파성에 충실할 것에 대한 윤리적 요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맑스주의적 앎의 특성에 대한 이러한 장황한 설명이, 오늘날 "교양"이라는 개념이 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맑스주의 서적이 예전처럼 골방에서 분파주의적 실천들을 통해서만 읽혀야한다는 것도, 예전에는 은밀히 읽혀졌던 서적들이 공공연하게 홍보될 때 (예전에 특권을 누렸던 이들이) 느끼는 약간의 배신감과 약간의 질시가 섞인 투정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양"이라는 단어의 범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징후, 즉 오늘날 지식의 유통에 있어서 앎과 그것의 수행적 효과 간의 단락은 이미 끊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끊어진 고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교양이라는 단어는, 주체를 변화시키는 수행적 힘을 가졌던 위반적 지식들을 다양한 지식들의 연쇄고리에 평면적으로 흡수하기 위한 담론 전략의 일부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교양"이란 이름 하에서 소비되는 지식들과 그러한 방식의 지식의 흡수 속에서 지식의 수행적 힘에 대한 고민은 은폐되거나 이제는 낡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상한 "교양"이란 단어의 범람 속에서 후기자본주의의 뿌리깊은 냉소주의와 평면성 그리고 자기-과시와 관련된 일종의 나르시즘적 속물주의를 읽어낼 수 있는 건 우연일가?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무한히 파편화된 대상들의 지극히 평면적인 전시이다. 그리고 이 평면적 전시는 어떠한 총체성도 어떠한 진리도 거부하는 냉소주의와 직결된다. 서점의 인문과학 서가에 "교양을 위한 다이제스트...." 내지는 "하룻밤에 마스터하는..."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결코 함께 다루어질 수 없는 학자들의 책이 뭉뚱그려져 있는 걸 보면서, 언젠가 난민 학살에 대한 기사와 연예인의 가쉽성 스캔들이 나란히 실려있는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을 보며 느꼈던 어떤 대책없는 허탈감이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이는 (지식인들의 또다른 상투적 비판의 하나인) "교양서"들의 "가벼움"을 개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러한 대중적 지식들이 "교양"이라는 이름 하에 유통되는 현실은 무엇을 반영하는가를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오늘날 "전문가 지식인들"의 말처럼 교양의 결핍이 인문학의 위기를 발생시켰다고 생각지 않는다.(이러한 전문가주의는 우리의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함정일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교양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교양의 "과잉" 때문일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식의 유통이 적고 많음 혹은 피상적 지식의 범람과 전문적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앎과 주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행적 힘 간의 연결고리다. 이 연결고리가 끊어질 때, 앎은 일종의 쇼핑 대상이자 "축적 가능한"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오늘날 이러한 현상을 고상하게 포장하는 게 '교양'이란 말이고, 바로 '교양을 쌓는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이와 같이 앎이 주체의 삶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주체의 실제 삶과 무관하게 "쌓을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을 때, 지식인과 대중의 괴리는 당연히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교양"이라는 이름 하에 소비되는 지식들이 앎의 대중화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대중을 앎에 있어 더더욱 예속적인 위치에 묶어두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를 앞서 맑스주의적 앎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사고와 비교해 보라.)

 

오늘날과 같은 "교양의 시대"가 미심쩍은 것은,  또 교양의 부재와 인문학의 위기를 등치시키고, 대중의 교양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설레발이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고민이 앎과 수행적 힘의 관계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혹은 공통의 위반적 지식을 어떻게 새로이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교양에 대한 강조는 단지 앎을 삶과 분리시켜 객관화된 재화의 형태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와 같은 객관화된 지식의 양에 기반해 지식인과 대중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대중의 교양 결핍을 우려하는 표면적 제스처와는 정반대인) 지식인의 은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것이 단지 조금 더 많은 교양과 조금 더 적은 교양을 구분해줄 뿐인 이 "교양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교양"에 대한 反-교양적 비판이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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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14:43 2007/10/07 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