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팅을 한 번 날리는 바람에 어줍짢게 예고(?)같은 포스팅도 해보고;;;; 암튼 정통 학술 블로그를 만들겠다는 일념(훗;;)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기나긴 포스팅.:)




그러니까 한 1년 전쯤에 노마디즘의 개념을 둘러싸고 천규석씨와 이정우씨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단상(노마디즘의 수난?! )을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저 포스팅에 바로 뒤이어서 논문 하나를 소개하는 포스팅을 할 생각이었는데, 바쁘게 살다보니 여타의 다른 포스팅 계획들처럼 깜빡잊고 지나치고 말았다. 그 때 소개하려 했던 논문은 Peter Hallward의 "The Limits of Individuation, or How to Distinguish Deleuze and Foucault"(Angelaki 5(3), 2000))란 논문으로, 일반적으로 한 세트인양 묶어서 언급되는 들뢰즈와 푸코가 실제로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 속에서 사유했으며, 들뢰즈와 푸코 사유의 친화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텍스트로 꼽히는 들뢰즈의 <푸코>가 실제로는 푸코의 사유에 대한 오독에 기반해 있다고 주장하는 도발적인 논문이다.(물론 들뢰즈 본인이 <푸코>에서 비릴리오의 푸코에 대한 오독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오독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의 출발점이라 하였으니, 들뢰즈에겐 그가 푸코를 오독하고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비난이 아닌 셈이다.:))


일단 잠깐 저자 소개를 하자면, Peter Hallward는 런던 변두리께에 위치한 Middlesex University 현대유럽철학과 교수다. 같은 과 교수로 Peter Osborne이나 Eric Alliez, Ray Brassier 같은 학자들이 있으니 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과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Badiou나 Balibar, Ranciere 같은 프랑스 전통의 철학자들을 초청해 그들의 사유를 영-미권에 소개하는데 가장 앞장서고 있는 학과로, 제2차 French Invasion의 영국쪽 최전선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젊은 학자로서 Peter Hallward 역시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하면서 대륙쪽(특히 프랑스쪽) 유럽철학자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나가는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바디우 소개서인 "Badiou: A Subject to Truth"(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3)는 지금까지 출판된 영-미권 Badiou 소개서 중 가장 잘 된 것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물론 바디우 소개서 자체가 별로 없지만..;;)


이 논문이 1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생각난 이유는, 며칠 전 우연히 도서관에서 Peter Hallward의 다른 책 "Absolutely Postcolonial: Writing Between the Singular and the Specific"(Manchester Univ. Press, 2001)을 발견해 조금씩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은 앞선 논문의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구체적인 탈식민 문학작품들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Peter Hallward의 야망은 대단해서, 이 책은 문학사 자체를 the singular와 the specific의 구분에 기반해 다시 쓰려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기본적으로 탈식민주의 작가들에 대해선 문외한에 가까운 내가 이 책을 소개하기는 무리고(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다 읽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지금도 관심있는 부분만 뽑아서 휘적휘적 보고 있다;;), 그저 예전에 읽어논 논문을 다시 찾아 소개하는 수밖에. 그래서 이어지는 몇 가지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포스팅해본다.



홀워드의 논문은, 우선 the singular(단독적인 것, 단독성)와 the specific(종별적인 것, 종별성)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singular(ity)의 번역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 홀워드는 the singular의 무관계적이고 일의적인(univoque) 특성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특이성이나 개별성보다는 '단독성'으로 옮기도록 하겠다. specific(ity)의 경우도, 특수성(the particular)과 구분하기 위해 좀 어색하더라도 '종별성'으로 옮긴다.) 홀워드에 따르면, 단독성이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초월한 무경계(limit-less)적인 성격을 가진다면, 종별성은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 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것의 성격을 가진다. 단독적인 개체가 자기-구성적인 창조자-신의 위치와 유사하다면, 종별적인 주체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역사적이다.


푸코와 들뢰즈 모두에게 있어 현실의 주체는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종별적이다. 차이는 이러한 종별성을 벗어나는 두 사람의 방식에 달려있다. 홀워드는 들뢰즈가 무-종별적인(a-specific) 단독성을 추구하였다면, 푸코는 탈-종별화(de-specification)를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들뢰즈가 관계적 주체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그 뒤에 놓인 창조적 공간, 즉 내재성의 장이자 기관없는 신체, 일관성의 평면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면, 푸코는 단지 주체를 대상화하고 종별화하는 권력관계들을 일소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들뢰즈가 무경계적이고 내재적인 단독성을 추구하였다면, 푸코의 탈-종별화 전략은 언제나 관계적인 것이었으며 경계에 위치한 것이었다.

 

 

“푸코와 들뢰즈의 핵심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들뢰즈가 경계없는 것 혹은 순수히 생산적인 것에 대한 직관으로 무경계적인 철학을 추구했다면, 푸코는 경계 그 자체의 철학을 추구했다. 푸코는 인식과 규범화의 모든 질서의 이면에 놓인 공백(the void)의 경계에서 사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93)

 

 

이러한 차이는 푸코와 들뢰즈를 공통으로 묶는 ‘외부의 사유’라는 단어에서, 이들이 정의하는 ‘외부’가 과연 같은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홀워드에 따르면, 들뢰즈에게 외부가 힘(force)으로 가득 차 있는 잠재성의 장이라면, 푸코에게 외부는 그저 텅 빈 무(無)일 뿐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는 영토화-지층화된 권력에 선험적(초월적)인 힘들을 발견해내려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애초에 푸코에게는 이러한 힘들의 존재론적 위상을 밝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푸코는 텅 빈 외부와 내부의 경계(limit)에 위치해, 이 경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조정하는 권력 관계들에 대해 사유하기를 원한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외부’에 (들뢰즈와는 달리) 어떤 실정적인(positive) 성격의 것이 아니다.(이것이 홀워드가 들뢰즈의 <푸코>가 푸코에 대한 오독에 기반해 있다고 비판하는 이유이다. 들뢰즈는 이 저작에서  구성하는 힘과 구성된 권력 간의 구분을 푸코의 사유에서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개념들이 난무하는 논의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일종의 근대 이성의 외부라고 할 수 있는 ‘광기’에 대한 이 둘의 입장차를 예로 들어보자. 홀워드에 따르면, 광기가 직접 말할 수 있다는 영감 속에서 쓰여진 들뢰즈-가따리의 <앙띠-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과는 달리,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는 그 자체로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광기는 이성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것을 교란함으로써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지정할 뿐이다. 


(사실 홀워드가 제시하는 이러한 ‘외부’에 대한 둘의 입장 차이는, 조금만 확장-변형시키면(이러한 확장-변형은 항상 위험한 것이지만) 다른 논점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저번 포스팅에서 짧게 언급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에 네그리-하트의 다중과 포스트콜로니얼의 써발턴 개념 간의 접점은 피지배자들이 직접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된다. 스피박은 “Can the Subaltern Speak?”에서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지식인과 권력”이란 제목으로 <푸코의 맑스>(갈무리, 2004)에 실려 있다)을 분석하면서 “대중이 직접 말할 수 있다”는 들뢰즈와 푸코의 입장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스피박에 따르면, 피지배계급이 직접 말할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써발턴의 발화를 재현하는 지식인의 권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엄연한 현실을 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물론 들뢰즈-네그리 계열의 사상가들은 스피박의 이러한 주장이 오히려 이미-항상 존재하는 써발턴들의 목소리를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스피박의 거친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실 (들뢰즈와는 달리) 푸코의 입장은 좀 더 미묘하다고 생각한다. 스피박이 인용한 대담에서도, 푸코는 “대중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곧바로 “하지만 이러한 발언을 무효로 만드는 권력체계와 지식체계가 존재한다”고 덧붙인다. 푸코 계열의 사상가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피지배대중의 목소리는 항상 ‘웅얼거림’으로만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얘기가 길어지므로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포스팅을 해야 할 것 같다.)



난 2000년에 나온 이 논문을 1년 전에야 구해서 읽을 수 있었는데(이 논문을 담고 있던 데이터베이스가 이때야 학교 도서관에 추가되었다;;;), 푸코-들뢰즈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진화론적(?) 해석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러한 진화론적 해석에 따르면, 권력관계의 전일성 때문에 저항의 지점을 구체화할 수 없었던 푸코의 난점을, 들뢰즈는 탈주선의 선차성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아마도 이러한 해석이 특히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이게 된 데에는 선구적으로 들뢰즈를 받아들였던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후기 멤버들, 특히 이진경씨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이들이 펴낸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푸른숲, 1997)를 보라.) 


일단 (아무리 친화성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문제틀을 가지고 현실에 접근하고 있는 독립된 두 사상가 사이에 한쪽의 문제를 다른 쪽이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둘째 치고, 이러한 해석이 가진 폐해는, (내 친구가 재치있게 이름붙인) 푸코의 “세례 요한화”이다.:) 그 친구의 말처럼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는 (너무나 자주 인용되는) 푸코의 말은 광야에서 메시아 재림을 외치던 세례요한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은 기억하지만 세례요한의 말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푸코의 고유한 문제의식은 어느새 들뢰즈의 그것에 흡수되거나 들뢰즈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읽히게 된다는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푸코 식의 사유 방식이 (후기자본주의와의 공모관계가 의심스런) 들뢰즈의 사유보다 더 풍부할 수 있다고(최소한 더 바람직하다고) 믿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기분 좋은 사실은 아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약간의 의심이다. 과연 이러한 ‘저항의 선차성’에 대한 철학적 확인이 푸코의 난점을 ‘해결’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이것은 푸코가 보고자 했던 문제들, 주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현실의 관계들을 이차적인 문제로 돌려버리고, 갑작스레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단순한 들뢰즈적 교정은 아닐까? 아니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식의 문제 ‘해결’은 푸코가 직면하고자 했던 권력의 거대한 구조를 외면하는 성급한 행위는 아닐까? 그래서 푸코의 문제의식을 희석시키는 행위는 아닐까?



확실히 권력관계에 대한 푸코의 입장은 하나의 아포리를 내재한다. 발리바르가 <정치의 세 개념>에서 “숙명주의와 (사실상의) 주의주의 간의 동요”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아포리.(참고로 Jon Simons는 "Foucault and the Political"에서 이를 ‘참을 수 없는 권력의 무거움’과 ‘참을 수 없는 위반의 가벼움’ 간의 동요라는 멋들어진(?)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도 곧바로 덧붙이듯이 아포리는 막다른 골목(impasse)이 아니다. 한 사상가의 아포리는 오히려 언제나 가장 생산적인 지점이다. 촘촘한 권력을 밀도있게 분석하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벗어나는 위반의 정치학을 사유했던 푸코에 있어서, 후자의 욕망이 전자의 분석을 강제할 때 이러한 아포리는 항상 생산적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푸코식 사유를 실제 현실 연구에 적용하는 이는 별로 없다고 봐야 할텐데(서동진씨 정도가 떠오른다), 이는 푸코가 이야기되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 그는 너무 많이 이야기된다), 푸코 사유의 이러한 아포리가 폭력적으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분석하는 푸코의 개념들은 몇몇 학자들의 사회과학적 분석을 위한 개념적 도구들로 파편화되었고, 구체적인 위반을 사유하고자 했던 푸코의 열정은 저항과 탈주선의 선차성에 대한 몇 가지 선언으로 철학화 되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푸코식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이 둘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 둘 간의 경계에서 사고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저항이나 탈주선의 선차성을 선언해버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저항을 사유하고, 권력의 전일성을 선언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권력을 분석하기. 예컨대, 오늘날 소수자의 정치를 사유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소수자가 처해있는 권력관계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그 속에서 어떤 저항적 실천들이 가능한지 그리고 이러한 저항들이 어떤 측면에서 다시 자본과 국가에 의해 형성된 기존의 권력 관계를 ‘강화’시키고, 어떤 지점에서 저항의 경계를 ‘재설정’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롭게 요구되는 전술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아닐까? (대상화/배제/훈육이라는 푸코의 개념을 사용한 몇몇 사회과학 연구들이 그러하듯이) 소수자를 권력관계의 피해자로 만들지도, 그렇다고 (탈주/소수성에 기반한 들뢰즈의 독자들이 그러하듯이) 소수자의 전복적 가능성을 성급하게 긍정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다시 홀워드로 돌아와 보자. 홀워드가 볼 때, 들뢰즈가 탈주(fuite)의 철학자라면, 푸코는 고군분투(engagement)의 철학자다. 둘 중 어떤 입장을 선호하느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사유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탈주와 창조, 질주와 조증(manic)으로 점철된 지금의 사회를 고려해본다면, 권력관계와 부정성을 붙잡고 씨름하는 고군분투의 자세가 지금보다 조금 더 옹호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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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6 01:46 2007/09/06 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