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zzone,
종종 들르는 커뮤니티에서, <화려한 휴가>를 둘러싸고 역사의 기억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별다른 할 말이 없는 나로서는, 논쟁을 보면서 문득 아르헨티나 <5월광장 어머니회>의 최근 근황이 궁금해졌다.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5월광장 어머니회>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일명 "추악한 전쟁" 기간) 중 실종된 이들의 어머니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1977년 실종자의 어머니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위치한 5월 광장에 모여 자신의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던 데서 시작하여,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투쟁해오고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예전에 인권영화제에서 이 분들을 다룬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으며, 나 역시 당시 영화소개 팜플렛을 통해 이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민가협 등의 초청으로 한국에도 몇 번 방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근황과 관련해서는, 창립 30주년을 맞는 올해도 여전히 목요집회는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외국 기사들을 보니 아르헨티나에 키르츠네르 중도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에 힘입어 24시간 연속 저항 침묵 행진은 작년을 마지막으로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구성원들의 고령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소수파인 <5월광장 어머니회-창립자 노선(Madres de Plaza de Mayo-Linea Fundadora)>은 침묵행진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이 있던데, 이들 만으로 행사가 여전히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 전 레디앙에 이들에 관해 실린 기사가 있어 링크를 걸어둔다.
http://girlspower.igong.org/gori2006/blog/entry/Madres-de-Plaza-de-Mayo-in-Argentina
이 글은 기사작성자 자신이 레디앙에 실었던 기사를 조금 수정한 것이다. 레디앙에 실린 기사 원문은 <5월광장 어머니회(Asociacion Madres de Plaza de Mayo)>와 이들에게서 떨어져나간 <5월광장 어머니회-창립자 노선>을 구분하지 않고 있어 논의를 이해하는데 혼선을 준다.
<5월광장 어머니회>의 역사와 이 두 분파 간의 입장 차이 그리고 분열에 대해서는
박구병, '추악한 전쟁'의 상흔: 실종자 문제와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투쟁(라틴아메리카 연구 19(2), 2006) 에 잘 정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5월광장 어머니회>가 좀 더 급진적인 형태로 과거사의 문제를 현재적 쟁점들과 연결시키면서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반면, <5월광장 어머니회-창립자 노선>은 과거사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과 보상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이 중 다수파인 <5월광장 어머니회>의 입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일종의 선언문인 "5월광장 어머니회 25년간의 발자취"를 참고할 수 있겠다. <역사와 기억> 사이트에서 번역본을 볼 수 있다.)
출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5월광장 어머니회> 홈페이지는 스페인어로 되어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에 따르면 <5월광장 어머니회>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강령이 있다고 한다.
"첫째, 우리의 자식들은 죽은 것이 아니고 현재의 민주화 운동 속에 살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체 발굴을 거부한다. 모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모두 우리 자식들이다.
둘째, 우리는 어떠한 기념물 건립도 반대한다. 기념물 건립은 우리 자식들의 민주화 투쟁 정신을 화석화시켜 건축물과 돌 속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 자식들의 정신은 기념물이 아니라 현재의 투쟁을 통해 기념되고 계승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어떠한 금전 보상도 거부한다.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지 어떠한 금전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금전 보상은 인간의 생명을 금전으로 격하시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이들의 주장의 핵심은, "산 채로 잡아간 내 자식, 산 채로 돌려달라"라고 말할 수 있다.(실제로 "산 채로 돌려달라!(Aparicion con vida!)"는 어머니회가 집회 때마다 외치는 구호이기도 하다.) 어머니회는 이러한 불가능한 요구를 통해 과거사의 고통을 치유하고 애도하는 대신, 이 문제를 아르헨티나가 당면한 계급적-구조적 쟁점들과 연결시켜 끊임없이 현재화시키고 있다. 즉, 아이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과거의 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아이들이 실종된 상태로 봄으로써, 아르헨티나에서의 국가 폭력과 계급 지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 농담이지만, 어머니회의 구호야말로 낭만적인 68혁명의 구호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의 살짝 뒤틀린 표본이 아닐지. 이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한에서 계속해서 '리얼'리스트로 남을 수 있었다...)
레디앙 기사에도 언급되듯이 <5월광장 어머니회>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진상규명과 보상에 관한 이들의 유래없는 비타협적 태도 때문이다. <5월광장 어머니회>는 자식들의 영웅화나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라는 빠지기 쉬운 함정을 피해가고 있으며, 오히려 현재의 쟁점들과 괴리된 과거청산의 시도들이 현재진행형인 사회구조적 모순을 과거화함으로써 현재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비판해 왔다.(이런 점 때문에 어머니회의 노선은 국제 인권단체들과 상당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여기서 나는 진실규명과 보상의 문제에 집중하는 <5월광장 어머니회-창립자 노선>이나 국제 인권단체들의 입장에 대비하여, <5월광장 어머니회>의 투쟁 노선을 하나의 교범처럼 내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좀 더 밀착하여 운동 속에 휘말리다 보면, 실제 외부에서 바라보는 "절대적으로 올바른" 운동 노선이란 운동가들 자신보다는 소위 "운동 평론가"들의 꿈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운동에 있어 절대적으로 올바른 방향은 없으며 운동이 처해있는 다양한 주변의 조건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정확한 그리고 좀 더 당파적인 상황 분석에 근거한 입장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나는 정확성과 당파성이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의 기억에 관한 <5월광장 어머니회>의 입장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민주화 '기념' 사업의 방향 그리고 이에 대한 운동 세력들의 대응 방향에 대해 돌이켜보게 만든다. 물론 한국에서도 DJ정권의 성격과 물질적 보상이라는 형식, 기억의 국가화라는 문제를 들어, 보상을 거부하려는 개별적인 움직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개별적 저항들이 조직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망월동 묘지의 국립묘지화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던 몇몇 단체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민주화 기념 사업에 대한 입장차를 넘어,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던 탈역사화의 시도에 대한 조직적 문제제기의 부재 자체는,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현재화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논의될 수 있는 기제 자체를 마련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운동 진영 내부에서 몇몇의 토론회나 논쟁 등을 통해 몇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된 바는 이루어진 바 있지만, 이러한 고민들이 어떤 진지한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러한 논의와 실천의 상대적 부재가 지금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바라보는 일련의 코미디같은 현상들의 출발점은 아니었을까? 최초로 "본격적으로" 80년 광주를 다뤘다는 영화가 "본격적으로" 역사적 사실이 부재한 스펙타클의 공간 속에서 진행되고, "광주 정신의 계승은 일자리 창출로부터"라고 진지하게 외치는 대선 후보가 존재하는 코미디 같은 현실... 물론 이러한 현실을 단순히 코미디로 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앞서지만.
암튼 이 포스팅은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근황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니 한국의 민주화 기념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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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광장 어머니회>에 대한 외국자료들을 찾으면서 놀랐던 점은, 이들의 목요집회를 꼭 관람해야할 아르헨티나 관광 상품 중 하나로 소개하는 여행블로그의 글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했다는 점이다. 세계체제 주변부의 험난한 과거사가 중심부 좌파 지식인들의 막연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며, 사실 중심부 국가들에서 높이 평가받는 주변부의 문학이나 영화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정서와 일종의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음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주변부를 바라보는 이런 식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그것이 그들 나름의 호의를 담고 있는 시선이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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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밥.꽃.양>을 제작했던 라넷(Larnet)이 차기작품 중 하나로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다룬 작품을 기획하고 있단다.(아직 기획단계라니 제작까지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밥.꽃.양>에 이어 운동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다시 한 번 건드리는 작품이 될 것 같은데, <밥.꽃.양> 상영 때 이들이 겪은 수난을 (가까이선 아니지만) 지켜본 사람으로서 기대와 함께 걱정도 된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의 새로운 작품이 그 동안 부실하거나 단발적이었던 역사의 기억에 관한 운동진영 내부의 논쟁을 다시 한 번 일으킬 수도 있겠다란 기대를 갖는 것을 보니 확실힌 난 잔인한 면이 있나 보다.;;;
그냥 인터넷 공간에 떠 돌고 있는 발언들 몇 개..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내 나이 또래의 라틴 아메리카 여성들은, 모든일은 항상 남자들이 책임지고, 여성들은 불의에 직면해서도 침묵하라고 배워왔지요.. 난 이제 우리가 불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나는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학살자들을 비난할 겁니다. 그게 내가 이곳에서 배운 겁니다." - Maria del Rosario de Cerruti
"우리 자식들이 겪었을 끔찍한 일들에 대해 알게되자, 적의 지독한 면이 명확히 보이더군요. 그들의 지독함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이 그냥 잘 살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어요?" - Hebe Mascia
"우리의 역사 속에는 끊임없는 발자취가 남겨져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행동을 박물관의 유물이나 거리의 이름으로, 혹은 어느 각료의 뜰에 붙은 명패로 남기고자 한 적이 없다. 우리의 투쟁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정치 당국에 요청한 사실도 없다. 우리 열정의 땀방울은 모두가 민중, 우리 민중을 위해 흘린 것이다. 우리가 남긴 유산,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은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아 계속 해방을 추구할 새로운 세대일 것이다. 우리의 발자취를 이해하는 남성과 여성들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킨 자들과 우리를 혼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요, 죽음이나 배고픔이라는 급박함이 닥치더라도 적들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깨우쳐 온 것처럼 그들 또한 적들을 끝장내기 위한 노력을 배가할 것이다." - <5월광장 어머니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