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연습님이 지젝의 혁명론에 대한 글을 남겼기에 트랙백.
안 그래도 지난달 쯤, 가끔 들리는 몇몇 사이트들에서 지젝의 혁명론에 대한 논의가 한창 벌어졌던 적이 있었다. 지젝이 툭 던져놓은 <300>영화평 때문인데, 최근에 지젝이 강조하는 혁명에서의 규율과 폭력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무한한 연습님이 원하던 마오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책의 서문은 아니지만 재밌으면서도 지젝의 정치적 입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글인 것 같아 하릴없는 휴일 아침에 끼적대며 대충 번역. (일단, 원문을 원하시면 클릭)
<300>(Jack Snyder, 2007)
Slavoj Zizek, "진정한 헐리우드 좌파The True Hollywood Left"
translated by 캐즘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의 침공에 맞서 자신들을 희생한 300명 스파르타 군인의 무용담을 담은 영화 <300>(잭 스나이더 감독)은, 최근의 (미국과) 이라크-이란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최악의 자국중심 군사주의 영화로 비난받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할까? 오히려 <300>은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방어되어야만 하는 영화이다.
두 가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영화 스토리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영화는 강대국(페르시아)에게 침략받는 가난한 약소국(그리스)의 이야기이다. 당시에 페르시아는 훨씬 더 발전한 국가였고, 더 발달된 무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코끼리나 거인들 그리고 거대한 불화살들은, 오늘날의 하이-테크 무기의 고대적 판본은 아닌가? 스파르타의 마지막 생존자들과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가 수천 개의 화살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은, 오늘날 안전한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첨단 무기를 조종하는 테크노-군인에 의해 폭격당하는 사람들과 겹쳐지지 않는가? 오늘날 미군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군함 속에서 단지 미사일 발사 버튼만 누르고 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를 설득할 때, 그가 사용하는 말들은 확실히 광기어린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것과는 다르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였을 때 주어질 평화와 쾌락을 약속하면서, 레오니다스를 유혹한다. 레오니다스가 요구받는 것은 단지 무릎을 꿇고 페르시아의 위대함을 인정하라는 형식적 제스처일 뿐이다. 만약 스파르타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 전역에 지배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레이건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에서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니카라과 정권은 미국에 대해 “어이, 삼촌!”이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영화 속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다문화주의의 이상향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 곳에서는 다양한 인종들과 레즈비언, 게이, 불구자 등등을 포함한 모두가 난교orgy에 참여하지 않는가? 오히려 희생정신과 규율로 무장한 스파르타 인들이, 미국의 침공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을 방어하고자 하는 탈레반과 훨씬 유사해보이지 않는가?(혹은 미국의 침공에 맞서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란 혁명 수호대의 엘리트 집단과 유사해보이지 않는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맞선 그리스 인들의 주된 무기는, 규율과 희생정신뿐이다. 알랭 바디우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민중적 규율이 필요하다. ···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오직 규율만 가지고 있다. 권력도, 돈도, 무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진 것은 규율, 즉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규율은 이미 조직의 한 형태이다.” 쾌락주의적 방임론hedonist permissivity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 좌파가 규율과 희생정신을 (재)평가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스파르타인들의 근본주의적 정체성조차 좀 더 모호하다. 영화 끝무렵의 선동적 언어들은, 그리스인들의 과제를 “자유와 이성의 지배라는 밝은 미래를 위해 폭정과 신비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마치 기초적인 계몽주의적 기획처럼 (심지어는 공산주의적 뉘앙스를 가진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또한 영화의 시작부에 레오니다스가 부패한 제사장들의 메시지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제사장들은 신이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의 출정을 금지했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밝혀지듯이 신비한 황홀경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페르시아에 의해 매수된 상태였다. 마치 1959년에 달라이 라마에게 티벳을 떠나라고 말했던 티벳 제사장이, 나중에 CIA에 매수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듯이 말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군대식 규율(아이를 내다버리는 행위까지 포함하여)에 의해 지탱되는 명예와 자유, 이성 같은 개념들이 가지는 명백한 부조리성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부조리”는 단지 자유를 위한 댓가일 뿐이다. 영화에 나오듯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있는 힘겨운 투쟁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군대식 규율은 아테네인들의 “자유민주주의”와 단순히 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내적인 조건이자 기반을 이룬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는 오직 가혹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익과 초코 케익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의) 안전한 거리를 둔 채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걸었을 때에만, 즉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천할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조국이 외국의 지배 하에 있는 상황에서 저항세력의 리더가 누군가에게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자고 제안할 때, “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너가 명예를 지키고자 한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이란 사실을 모르겠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루소에서 자코뱅에 이르는 근대의 평등주의적 급진파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새로운 스파르타로 상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 규율이라는 스파르타의 정신 속에는,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제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해방의 정수(core)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300>의 형식적 측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몬트리올에 있는 한 창고에서 촬영되었고, 배경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의 인공적 성격이 “실제” 배우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종종 마치 만화 속 인물들이 그대로 현실에 나온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는 프랭크밀러의 만화 <300>이 원작이다.) 게다가 배경의 (디지털) 인공성은 일종의 폐쇄공포증적 분위기를 창출한다. 마치 이야기는 끝없이 열려진 공간인 “실제(real)”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닫혀진 세계” 속에서, 일종의 닫혀진 공간의 부조(浮彫)화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이는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비록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에서도 배경과 등장인물의 상당부분이 디지털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들이 주는 느낌은, 실제 배우와 디지털 배우 및 사물들(코끼리나 요다, Urkhs나 궁전 같은 것들)이 “실제의” 열려진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300>에서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인공적 배경 속에 던져진 “실제” 인물들이었고, 이러한 조합은 인공적 세계와 실제 인물들 간의 사이보그적 결합이라는 훨씬 더 괴상한 “폐쇄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직 <300>만이 “실제” 연기자들과 사물들과 디지털로 만들어진 배경을 조합하여 진정으로 새로운 자율적인 미학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근접하였다.
다양한 예술 장르를 혼합하는 것(하나의 예술이 다른 예술을 참조하는 것까지 포함하여)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열려진 창을 통해 바깥을 보는 여성을 그린 많은 호퍼Hopper의 초상화들은 확실히 영화의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 초상화들은 대응-샷counter-shot없는 샷을 보여준다.) <300>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기법적으로 더 발달된 예술(디지털 영화)이 덜 발달된 예술(만화)를 참조했다는 데 있다.(물론 이러한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컨대 워렌 비티의 <딕 트레이시>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시도를 한다.)
이로 인해 생산되는 효과는 “진정한 현실true reality”이 자신의 순수함을 잃고, 닫혀진 인공적 세계의 일부분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완벽히 형상화해낸 것이다. <300>이 시도한 두 예술 장르의 “합성synthesis”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맞지만, 동일한 이유 때문에 틀렸다. 물론 이 “합성”은 실패하고 어수선한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 속에는 당연히 뿌리깊은 적대와 모순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표는, 바로 이러한 적대인 것이다. [끝]
Slavoj Zizek(1949~)
사실 글의 내용 자체는 지젝이 계속해서 해오던 이야기의 연장이지만, 몇몇 극단적인 표현들 때문에 그런지 곳곳에서 이 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된 코멘트들로는
http://www.shaviro.com/Blog/?p=574
http://k-punk.abstractdynamics.org/archives/009325.html
http://parodycentrum.wordpress.com/2007/04/30/zizollywood-boulevard-number-300/
등을 참고할 수 있겠다.
링크된 코멘트들에 지젝의 입장이 가진 의의와 한계가 잘 다뤄져 있기에(다만 코멘트들에는 주로 부정적인 입장이 대세를 이루는 것 같다. 지젝은 단순히 씹퉁대기만 한다는 투덜거림에서부터 지젝의 바닥이 드러났다는 극단적인 평가, 이제 돈벌러 그만다니고 공부 좀 더 해야 되지 않겠냐는 비아냥까지..) 특별히 긴 코멘트를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짧게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 최근의 지젝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궁금한 것은, 그가 가정하는 청중(audience)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이다.
사실 지젝의 글은 극단적인만큼 속이 시원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그가 주류 아카데믹 좌파들이 공통적으로 부인disavowal하는 어떤 지점을 후벼파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번 글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규율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입장 역시 통상적인 좌파 이론의 근거들을 논리적으로 추적할 경우, 나올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이다. 가혹한 규율이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주체 구성에 근간을 이룬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푸코였고, 많은 좌파 이론가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자유의 확장과 반-규율적 해방을 결합시켜 수사학적으로 포장하는 데 능숙한데, 지젝은 이러한 (손 안대고 코풀기를 원하는) 좌파이론가들이 사고를 중단하는 지점, 즉 알지만 모르는 척 부인하는 바로 그 지점을 들춰낸다. 어쩌면 지젝 스스로가 다른 이들이 부인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내려가 자리잡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따라서 그의 입장이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만큼 그의 의도가 성공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사실도 없다.)
하지만 지젝의 이러한 입장이 아카데믹한 공간에서의 고군분투를 넘어 현실 정치의 공간에서 자신의 청중을 확보할 수 있을까? 계속된 발언을 통해 그가 불러내고자 하는 현실 세계에서의 유령은 과연 누구인가?(혹시 탈레반?) 혹은 그는 이런 유령들을 불러낼 의지를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역설적인 사실은, 그가 현실 세계의 혁명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청중은, 언제나 (그가 괴롭히기를 바라 마다하지 않는) 아카데믹 좌파들이란 사실이다. 지젝의 비아냥처럼 들뢰즈는 최첨단자본주의의 여피들이라도 읽어주지만, 지젝의 글은 과연? 물론 내 주위에는 여전히 "철의 규율, 피의 동지애"에 감동받을 몇몇 사람들(때로는 나조차 포함하여)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과연 지젝의 글을 필요로 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지젝의 글들은 어떤 불안정한 발판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건 그가 스스로를 아카데믹 좌파들의 부인지점에 위치지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역설인데, 그는 끊임없이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지만, 현실 정치의 청중과 그와의 소통 고리는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는, 그의 글들이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아카데믹 좌파들의 자기-위로의 수단으로 소비되고 산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은 길은 정해져 있다. 어느 순간의 역전 만루 홈런을 기다리던가 아니면 아카데믹 공간 속에서의 힘겨운 고군분투 속에서 장렬하게 산화하던가. 300명의 스파르탄 용사들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면 그가 어떤 길을 택할지....... 짐작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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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펌- 지젝의 300
Tracked from 2007/05/24 14:12 delete캐즘님의 [지젝의 <300> 영화평]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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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300」, 슬라보예 지젝, 논쟁들
Tracked from 2008/01/14 22:20 delete「300」, 2006, 미국 잭 스나이더 감독 이제야 「300」을 봤다. 예전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보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르네 끌라망이나 자크 리베트의 영화를 보다가도 갑자기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를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꽤 독특하고 영화라기 보다는 만화책처럼 느껴지는 재미있는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미국의 저명한 만화작가 프랭크 밀러 원작의 <300>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리스의 대지나 해안지대가 아니라, 캐나다 몬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