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폭력

from The Ticklish Subject 2007/03/30 01:00

 

1.

요즘 인터넷 논쟁판 몇 군데를 기웃거리다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논쟁에서 자신과 대립되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그런 식의 주장은 (혹은 그런 식의 주장을 전개하는 건) 폭력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얼마 전 불로그에서 전개되었던 채식 논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저 말은 진보진영의 논쟁판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논쟁이 흘러가다보면, 논쟁은 어느새 다른 길로 빠지게 마련이다. 이제 논쟁은 서로 간의 주장을 검토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로 가정된 이)와 피해자(로 가정된 이) 간의 변호 싸움으로 변화하게 된다. 당연히 논쟁의 귀결은 끝없는 동어 반복 혹은 감정싸움이다.

 

사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현상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급속히 확산되어 온 '폭력 담론'(적절한 용어가 없으므로 그냥 사용하도록 하겠다)의 일부분일 뿐이다. 언제부턴가 '폭력'이라는 말은 "자신에 대한 타자의 영향 모두를 문제시할 수 있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는 건 개인에 대한 '폭력'으로 말해지기 시작했다. 또 언제부턴가 흡연 행위는 타자에 대한 '폭력'이란 인식 아래 규제되기 시작했으며, 논쟁에 있어서 타자의 강력한 주장이나 권유는 상대방에 대한 폭력으로 받아들여진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타자의 좀 '오버스러운' 행동은 모두 일종의 '폭력'으로 이름붙여도 어색할 게 없다. 지젝Slavoj Zizek의 말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자신에 대한 응시, 관심 혹은 사랑 마저도 하나의 폭력으로 느끼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민감한 부분이 될 수 있어 미리 정리해놓지만, 나는 여기서 타자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원래부터' 폭력적 행위다/아니다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내가 관심있는 것은, 이러한 타자의 행위를 어느 순간부터 '폭력'이자 '자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된 전 사회적인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배경 혹은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이다. 당연히 나는 이러한 변화가 '진보의 결과'라고 보는 순진한(그래서 더 음흉한)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일상적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이 기존에 비가시화되었던 폭력들을 가시화시키면서 정치의 장을 확대시킨 측면도 존재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식의 폭력 담론의 확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이러한 반응은 타자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의 동일성을 방어하려는, 다시 말해 타자의 자신에 대한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나르시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타자의 '오버스런' 행동은 모두 폭력으로 몰고가는 이러한 반응들은 자신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을 부인disavowal하고자 하는 강박적 제스처는 아닐까? 혹은 이러한 반응들은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자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대체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가? 혹은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의 말대로, 우리는 자아self를 물신화하는, 따라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타자의 모든 행위는 자신에 대한 '침해' 혹은 '폭력'으로 생각하는 그런 '자아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가 너무 추상적이라면, 앞서 예로 든 인터넷 논쟁으로 돌아가보자. 자신의 의견과 대립되는 타인의 주장을 '폭력'으로 몰고가는 것은, 타인의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겠다는 선언 혹은 자신의 주장을 바꿀 생각은 없기에 논쟁은 불필요하다는 선언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논쟁이 자신의 입장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는 나르시즘적인 형태로 전개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2.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흥미로운 점은, 최근에 더욱 격렬해진 타자에 대한 부정과 자아에 대한 나르시즘적인 추구가 대체 어떠한 이론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는가하는 점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이론적 지형의 주류는 '타자의 철학'이 아니었던가? 멋들어진 '타자'라는 용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논쟁에 끼기도 힘들었고, 타자에 의한 동일성의 해체라는 슬로건에 혹은 적어도 자아에 내재한 타자의 성찰이라는 슬로건이 열광적인 지지가 쏟아지던 시절이었다.(이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던 프랑스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학계에선 타자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시기에, 대중의 일상 생활에서는 타자가 아닌 자아에 대한 집착이 더욱 증폭되었으니, 이건 혹시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지식인 담론에 대한 대중의 반역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실 오늘날 사회에서 타자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자,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넘쳐나고 있다. 타자의 인정, 타자에 대한 존중은 반복적으로 말해지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타자에 대한 관심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아에 대한, 자기동일성에 대한  물신화가 더 강해진 건 왜일까? 답은 타자를 대하는 방식, 타자와 자아의 관계맺음 방식에 놓여있다. 

 

개인적으로 '타자'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사유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타자에 의한 동일성의 해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자신 내부 혹은 외부의 타자를 '인정'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앞서의 방향이 자기 동일성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폭력적이라면, 뒤의 해결책은 훨씬 더 보수적인 해결책이다.(좀 더 손쉽게-손쉽다는 말은 위험하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미지화 시키지면 전자가 '어두운' 타자의 철학이라면, 후자는 좀 더 '밝은' 타자의 철학이다.) 

 

동일성의 해체에 초점을 맞춘 '어두운' 철학에서 타자는 현재의 동일자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타자를 통한 동일성의 해체 행위는 자신의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극한적인 경계 경험limit experience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 즉 '밝은' 철학에서 타자는 악몽이라기보다는 인정해야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기묘하게도 '동일성의 폭력적 해체'라는 문제의식은 사라진다. 오히려 남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타자를 긍정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긍정하는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자기-긍정의 철학이다. 그리고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신"을 긍정하는 나르시즘적 주체이다. 당연히 여기서 긍정되는 '타자'는 자신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폭력성이 거세된  타자이다. 따라서 이것은 역설적으로 타자에 대한 부정과 연결된다. 타자는 자기-긍정을 위협하지 않을 때만, 자신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때만, 자신의 영역에 폭력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때만 긍정되는 것이다.(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등장하는 타자와의 거리 유지 담론이 바로 관용tolernace이다. Wendy Brown의 tolerance 비판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68이후 폭발적으로 등장했던 타자의 철학이 오늘날 궁극적으로 수렴해나간 방향은, 후자 쪽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팽배한 다문화주의 담론은 이러한 보수적인 타자의 철학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다문화주의 속에서 흑인 문화는 백인 문화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악몽적 존재가 아니다. 빠농Franz Panon은 흑인이 백인의 악몽이라고(혹은 악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백인들은 더 교묘한 형태로 흑인 문화의 도전에 맞서 자신의 문화가 가진 동일성을 방어해냈다. 그들은 타자로서의 흑인 문화를 인정하고 그 흑인 문화가 문화 전반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흑인 문화의 잠재력을 긍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다문화주의에서 궁극적으로 긍정되는 것은, 타자인 흑인 문화가 아니라, 흑인 문화마저도 감싸안을 수 있는 "선진적인 백인 문화"이다. 이러한 사실은 흑인 문화가 백인 문화의 지배적 위치를 위협하는 폭력적 형태로 등장했을 때, 주류 사회가 보이는 광기 어린 반응 속에서 소급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 한국 사회의 지배 담론이 이주노동자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이를 통해 그들이 목표로 하는 바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 혹은 이주노동자들과 자신의 동일시일까 아니면 이주노동자들을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을 갖춘 자신들에 대한 나르시즘적인 만족일까?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안전 혹은 동일성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이들은 관용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하층계급의 적대적 반응은 오히려 솔직함의 미덕이라도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모순적으로 보이는 현상, 즉 타자에 대한 관용-타자에 대한 인정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담론의 확장과, 타자에 의한 자아동일성의 붕괴를 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나르시즘적 경향의 확산이 실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상의 두 면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둘의 연결 고리 속에서 배제되는 것은, 타자의 철학이 가졌던 애초의 긍정적 힘, 즉 자기동일성 혹은 자아의 해체라는 문제의식이다. 

 

 

3.

따라서 나로서는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제거된 채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이러한 관용의 필요성을 근거삼아 타자의 자아에 대한 침해를 '폭력'으로 배제해 버리는 나르시즘적 자아의 확산 간에 맺어진 이 은밀한 동맹이 불만스럽다. 게다가 타자의 존재에 대한 관용 여부 혹은 타자의 자아 침범에 대한 민감성 정도가 마치 개인의 진보적 태도를 보여주는 척도인 양 포장하는 담론들 역시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아마도 홍세화씨 류의 똘레랑스 담론이 바로 이런 수준의 담론일 것이다.) 

이러한 담론들 속에서 자아의 붕괴, 자기 동일성의 해체, 타자의 타자성의 폭력적 분출에 대한 문제의식은 말그대로 '표백'된다. 이러한 담론들 속에서 우리는 현재의 자신의 위치 혹은 자아의 동일성은 유지하면서 타자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스킬을 몸에 익힌 수많은 개인들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밝은' 타자의 철학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타자의 철학이다. '어두운' 타자의 철학이란, 현재의 자아 혹은 자기 동일성에게 극도로 무거운 짐을 부여하여 스스로를 붕괴시키고 자아를 파괴하도록 만드는 말그대로 '폭력적인' 타자의 타자성을 추구하는, 타자의 철학이다. 타자는 동일자에게 하나의 악몽으로, 그래서 동일자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힘으로, 그래서 타자와 진정으로 대면했을 때 자아는 결코 기존의 자아와 동일할 수 없는 그런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

 

며칠 전 다시 읽은 <푸코의 맑스>(이승철 역, 갈무리, 2004)에 실린 푸코와 고등학생들 간의 대담에는 푸코의 흥미로운 주장이 나온다. 

 

"휴머니스트들은 범죄자 뒤에 있는 인간성이나 영혼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무죄와 유죄 사이에 놓여있는 깊은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 발생한 비행기 납치 사건에 대해 장 쥬네Jean Junet가 제기한 문제였습니다. 언론에서는 사막 한 가운데 명확한 이유도 없이 붙잡혀 있었던 불운한 관광객과 그 판사의 운명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반면에 쥬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그렇지만 이런 식의 여행을 할 만한 충분한 돈을 갖고 있는 미국인 여성과 판사는, 과연 무죄일까요?""(229)

 

원문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지만,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그것의 해체라는 푸코의 호소를 만날 수 있다. 푸코의 논법을 빌자면, 휴머니스트들은 혹은 '밝은' 타자의 철학자들은 범죄자들의 인간적인 면을 찾으려 노력하거나 혹은 그들의 선택이 불가피했었음을 역설한다. 이러한 시도가 가져오는 효과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들의 담론 속에서 여전히 범죄자라는 타자는 나의 외부에 놓인 대상, 즉 내가 '이해'해야하는 대상 혹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관용'해야 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로 이렇게 타자의 존재가 나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한 이들의 타자성은 현재 나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지금의 위치를 고수하며 이들을 이해하면 된다. 난 자아의 고수와 타자에 대한 관용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기론 주체의 철학자도 혹은 특이성의 철학자도 아닌 철저한 타자의 철학자였던) 푸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그는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여기선 범죄자의 존재)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즉 "나 자신은 무죄인가"라는 자아의 위치에 대한 혹은 자기 동일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상기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타자와의 대면 방식에서 타자는 현재의 나에게 무거운 짐 혹은 하나의 악몽으로 다가온다. 나는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동일성을 '불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불인정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해체의 작업, 그래서 다른 존재로 변환되는 과정은 지젝의 표현처럼 상징적 죽음도 무릎쓰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의미에서 8-90년대 현장노동자로 취업했던 지식인들이야말로 자기 동일성의 해체와 재구축이라는 타자의 철학을 직접 실천했던 사람들이라는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똘레랑스의 철학자들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그들의 주장을 '관용'해야 한다고 외칠 때, 이들은 타자의 존재가 던지는 질문, 즉 "나는 왜 노동자가 아닌가?"란 질문을 직접 대면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어두운' 타자의 철학의 실천은 그 자체로 주체에게 무거운 짐이다. 푸코의 말처럼, 자기 동일성의 해체는 죽음과 연결되므로 결코 완수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limit에서 일시적인 동일성의 해체와 재구축을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거리두기와 자아에 대한 물신화가 너무나도 가볍게 만연한 사회에서 이러한 무거운 태도는 (비록 그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할지라도) 다시 한 번 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어쩌면 타자의 정치의 새로운 급진화는 이러한 무거운 돌아봄 속에서만 첫걸음을 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이러한 문제제기가 그저 또 하나의 강요이자 '폭력'으로 가볍게 재단되는 것만 피하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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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30 01:00 2007/03/30 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