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두 권

from 담론의 질서 2007/11/02 00:46

- 최근 들어 블로그질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여러 해야할 일들이 쌓여 가고 있고, 읽어야 할 책들도 그만큼 많아졌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부족이란 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문제이다. "바쁘다"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지난 한 주 한국 시리즈는 꼬박 챙겨본 걸 보면 확실하다.-.-;;;

 

- 심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진 이유 중에 하나는, 동시에 좋은 책을 두 권이나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분에 예정해놨던 리딩 리스트가 두 배는 길어지고 말았다. 각각의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포스팅을 하고 싶지만, 그러기보다는 당분간 관련 서적들을 좀 더 깊이 읽어보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다만 좋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고 싶다는 조바심을 참을 수 없어서 간단히 소개글만 올린다. 

 

 

 

 

<텔레비전과 동물원>(올리비에 라작, 백선희 역, 마음산책, 2007)

 

 

- 먼저 소개할 책은, 올리비에 라작(Olivier Razac)의 <텔레비전과 동물원(L'ecran et le zoo)>이다. 사실 거의 동일한 고민을 진척시키고 있는,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이의 책을 읽는 건, 한편으론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론 꽤나 자괴감이 들게 만드는 경험이다.("에효.. 넌 왜 이런 생각을 못했니.."류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 스펙타클과 규율의 관계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가시성(visibility)의 문제는 지난 몇 년간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주제였고, 직접적으론 내 석사학위논문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동물원"이란 일상적인 개념으로 이렇게 명쾌하게 스펙타클과 규율의 결합 그리고 사회의 완전한 가시화와 투명화라는 문제를 포착해내려는 시도는 생각조차 못했었다.(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 주제에 천착해온 다른 이들도 이렇게 명쾌한 방식으로 문제를 정리해내지는 못했다. 명쾌하다는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일단 라작에게 박수를...) 

 

책에서 한 구절만 인용해 보자.

 

"동물원에는 보이지 않는 감시인도 배우도 어두운 관객도 없다. 모두가 환하게 조명을 받고 사방에서 시선들이 마주친다. 관람객은 그를 바라보는 표본을 관찰하며, 그와 동시에 다른 관중이 그를 엿볼 수도 있다. 전시된 자와 관객 사이에는 시각적 불균형이 없다. 둘은 같은 불빛 아래 있으며, 동일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고 동일한 현실 선상에 놓여있다... 동물원은 감옥과 연구소와 극장을 섞어놓은 복합장치요, 다중기구다."(90)

 

간단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권력과 가시성을 둘러싼 논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주장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챌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고 투명화된 현대 사회를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모델로서 리얼리티 프로그램들과 동물원을 유비-분석하면서, 라작은 암묵적으로 드보르와 푸코를 결합시켜 이들을 넘어서는 것을 꾀하고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근대 권력의 디아그람인 '파놉티콘'을 넘어서는 탈근대 사회의 디아그람으로 '동물원'을 제시하고 있다고나 할까?(물론 내게는 그의 동물원론이 파놉티콘의 완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사회를 '동물원'으로 묘사하는 이 책의 주장이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오늘날 문화연구 진영에서 현대 사회를 묘사하는 가장 강력하지만 서로 대립적인 개념 두 개를 꼽자면, 아마도 (보드리야르가 제시하는) 시뮬라크르만이 부유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와 (아감벤이 제시하는) 헐벗은 삶 만이 존재하는 "수용소(camp)"일 것이다.(그리고 이 둘은 각각 소위 말하는 재현 패러다임과 권력 패러다임을 대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두 모델은 조금씩 불만스러운데, 보드리야르의 현대사회상이 너무 가볍다면, 아감벤의 그것은 너무 무겁다. 치명적 유혹(seduction)과 정교화된 규율이 동시에 작동하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모습은 실제로는 이 둘 사이의 어디이거나, 정확히 말하자면 둘의 결합일 것이다.(라짜라토의 말처럼 우리 시대의 주체성의 표상은 무한히 가벼운 소비-이미지에 매혹되면서 더 많은 향략을 위해 엄격한 규율을 체화한 기묘한 사이보그들이다.)

 

라작이 이 둘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늘날 주체가 자신을 나르시즘적으로 전시함으로써 규율된다는 라작의 "동물원" 개념은, 확실히 이 둘보다 좀 더 설득력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제시해준다. 게다가 라작의 개념은, "스펙타클" 그리고 "동물"이란 개념을 매개로 둘 모두와 접속될 수 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역, 문학동네, 2007)

 

 

- 라작의 책을 읽고 나면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그 제목만으로도 흥미롭다.(현대 사회가 동물원이라는 라작의 주장은, 바꿔말하자면 현대인들이 "동물화"되었다는 말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사실 라작과 아즈마 히로키의 분석은 몇몇 면에서는 대립하고 몇몇 면에서는 서로 중첩되면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이 책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탈-역사(post-history)적 주체성으로 동물을 꼽은 꼬제브의 논의에 기대어 현대 일본 오타쿠들의 주체성을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분석하고 있다.(탈역사와 동물/속물적 주체성에 대한 꼬제브의 논의는  "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 그리고 동물/속물적 주체성"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동물원을 현대 사회의 응축된 모델로 보았던 라작처럼,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된 오타쿠 문화를 현대적 주체성의 응축된 모델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적 주체성의 핵심은, 파편화된 주체들이 타자와의 사회적 소통의 상실한 채 특정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직접적 욕구 충족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조금 말장난을 하자면 오늘날 주체들은 반복적으로 대상이 투입되고 만족이 산출되는 일종의 욕구-기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 책에서 한 구절을 직접 인용해 본다.

 

"동물화란 무엇인가? .. 그 열쇠가 되는 것은 욕망(desire)과 욕구(need)의 차이이다. 코제브에 의하면 인간은 욕망을 갖는다. 반면에 동물은 욕구밖에 갖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자기 의식을 가지고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간間주체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욕구는 타자 없이 충족되지만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 '동물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간주체적인 구조가 사라지고 각자가 각자의 결핍-만족의 회로를 닫아버리는 상태의 도래를 의미한다.

 

...매뉴얼화하고 미디어화하여 유통관리가 잘 보급된 현재의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요구가 가능한 한 타자의 개입 없이 순식간에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날마다 개량이 거듭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얻을 수 없었던 대상, 가령 매일의 식사나 성적인 파트너도 지금은 패스트푸드나 성산업으로 극히 간편하게 일체의 성가신 커뮤니케이션 없이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 우리들의 사회는 최근 수십 년간 확실히 동물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148-150)

 

현대사회의 주체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인정투쟁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탈역사화된 공간 속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차단한채 그저 자신의 욕구를 직접적 대상을 통해 만족시키는 데 치중한다. 여기에는 어떤 부정성도, 승화도, 정치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자아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나르시즘적인 동물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이러한 현대인의 동물화의 최전선에 오타쿠들이 서 있다. 현대 일본의 오타쿠들은, 성가신 인간관계는 고민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요소를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로 연출해주는 그래서 자신에게 손쉬운 감정적 만족을 전달해줄 작품을 찾는 존재들이란 점에서 현대적 주체성의 응축된 모델이다. (여기까지 듣자면, 아즈마 히로키가 마치 오타쿠 혐오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즈마의 논의 속에서 오타쿠들은 이제 배제되거나 교정되어야 할 별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주체성의 진화방향을 성취한 존재들일 뿐이다.) 

 

이 외에도 아즈마의 글에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은데,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오타쿠 문화라는 구체적 대상을 다루면서, 탈역사, 탈정치, 나르시시즘, 속물/동물, 진정성, 냉소주의, 시뮬라크르, 데이터베이스 같은 현대 사상의 키워드들이 어떻게 뒤엉키고 조합되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이와 같이 특정한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역사적 지층들을 깊이있고 두껍게 읽어내는 것은 훌륭한 연구자의 핵심적인 자질일 것이다. 라작에 이어 아즈마에게도 박수를...)

 

 

- 몇년 전부터 외국에서 열리는 철학이나 문화연구 심포지엄 등에 "동물"을 키워드로 한 이야기들이 종종 눈에 띄더니(아마도 그 일등 공신은 아감벤의 "Homo Sacer"일 것이다) 작년부터는 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활발하게 이를 주제로 한 논의들이 등장하고 있다. 두 책이 조금은 뒤늦게나마 한국에 상륙하게 된 것도 그러한 움직임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현대 사회의 주체성을 "동물"이란 개념을 통해 접근하는 데에는 확실히 장점 못지 않은 단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개념이 정치 철학적 문제는 물론, 생(生)권력이나 유전공학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과도 접속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동물"이 앞으로 문화연구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될 것은 확실해 보인다.   

 

 

-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그렇다면 이러한 동물화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대안에 대한 모색은 아즈마의 글보다는 라작의 글에서 좀 더 분명하게 제시되는데, 이를 요약하자면 동물화에 맞선 주체적인 "동물-되기"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작은 동물원같은 현대 사회에 일종의 야생성을 재도입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타인의 시선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능동적 익명성을 창출하고자 했던 견유학파의 전통을 참조한다. 

 

라작의 이러한 입장은 표면적으로 위협적이게 보이는 수사학과는 달리, 이론적 전통 속에서 검토해보자면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던 무난한 결론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견유학파적 전통은 아방가르드 전통과 함께, 윤리-정치를 강조하는 입장들이 참조하기 가장 손쉬운 전통 중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무난함이 책의 빛나는 분석들을 조금 퇴색시키는 느낌인데, 이는 개인적인 윤리-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입장들에 대해 (부분적인 찬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는 의구심 때문일 것이다. 혹시 이러한 주장이 서 있는 궁극적 지반에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의 진실, 즉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라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인식이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좀 더 정교한 논의와 함께 포스팅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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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2 00:46 2007/11/02 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