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레닌

from 담론의 질서 2008/03/12 01:36

 

 

캐즘님의 [바울과 레닌 그리고 제3항의 사유] 에 관련된 글.



저번 포스팅에 달린 댓글 중에서 라임님이 바디우가 레닌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 게 생각나 인터넷을 뒤지다가 바디우가 레닌을 직접 다룬 짧은 글 하나를 발견, 링크를 걸어둔다.

 

바디우가 1999년에 짧은 강의용으로 쓰고 이후에 Alberto Toscano의 번역으로 작년 출판된 The Century(Polity, 2007)에 실린 "One Divides into Two"라는 제목의 글로, 라캉닷컴에 원문을 구할 수 있다. 관심있으신 분은 클릭

 

글 자체는 짧지만 상당히 압축적이고 흥미로운 글이다. 이 글에서 바디우는 레닌론에서 시작해 곧바로 마오와 문화혁명의 논의로 건너가 결국 자신의 정치학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글을 끝맺는다. 바디우의 정치철학이나 레닌 혹은 마오주의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짧은 글이라 일하는 중간 중간 번역을 해볼까 했지만, 당분간은 밀린 일이 많아서 그럴 짬은 없을 것 같다.)

 

 

영어를 저어하는 분들을 위해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글에서 바디우는 20세기를 이데올로기의 시대도 유토피아의 시대도 아닌, 바로 레닌주의의 세기로 규정한다. 이는 레닌의 정치사상이 20세기의 핵심적인 특징인 "실재에의 열망(passion for the real)"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20세기는 약속의 세기, 기다림의 세기가 아닌 실현과 행위의 시기였고, 실패의 시기가 아닌 승리의 세기였다. 그리고 레닌은 이러한 승리가 확고한 전선을 구축하고 총력전(total war)을 전개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료화한 인물이었다.(혹은 전선과 전쟁이라는 상에 기반할 때에만 우리는 '승리'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선'과 '총력전' 그리고 이를 통한 한쪽 진영의 다른 진영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라는 개념과 이에 기반한 사유는, 상호 대립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예컨대, 승리를 향한 그리고 승리를 통해 상대를 제거하려는 싸움의 원동력은, 적대 그 자체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열망인가? 우리는 이 전쟁의 모델에서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정식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둘이 하나로 종합되는 정식을 지지할 것인가? 바디우에게 이 문제는 변증법적 종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제목이 암시하듯, 바디우가 보기에 레닌이 첫 번째 정식을 지지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 자체에서 바디우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바디우가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아마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전개된 푸코의 "전쟁모델"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어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라는 입장에 기반한 권력에 대한 전쟁모델적 접근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전쟁모델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권력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푸코의 전쟁모델에 대한 탐구는 전통적인 군주권 모델과는 다른 형태의 권력 모델을 검토하고자 하는 그의 지속적인 노력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지만, 이런 분석적 가치를 염두에 둔다하더라도, 인종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델을 등치시키는 그의 입장이 느슨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디우는 이러한 전쟁 모델 속에 또 다시 대립적인 두 입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인종주의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바디우가 지적하듯이 이 둘의 차이는 대립 전선을 계급 사이에 설정하는냐, 인종 사이에 설정하느냐에서도 발견될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이들이 전쟁 모델의 핵심을 적대에 두느냐 혹은 (승리를 통해 얻게 될) 통합에 두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서도 물론 적대보다는 궁극적인 통합을 우위에 두는 입장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이것으로 환원시키기는 불가능하다.)    

 

다시 글로 돌아와서... 그렇기에 바디우가 보기에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마오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두 대립적인 노선 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마오를 위시한 좌파들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정식을 지지했다면, 우파의 입장은 둘을 하나로 종합하는 정식에 기반해 있었다. 그리고 이 투쟁의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덩샤오핑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가까운 신자본주의로의 회귀, 즉 계급투쟁의 부정과 하나의 위대한 중국으로의 종합이었다.

 

이어서 바디우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실재에의 열망이 어떠한 방식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그것을 그저 즐기기만 하려는 자세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는지를 언급하고,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동적 니힐리즘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다.(여기에 대한 바디우의 비판과 그가 대안으로서 이야기하는 감산적 정향에 대해서는 이 포스팅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실재에의 열망에 기반한 정화(purification)의 정향이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 작동하는가는 지젝이 방한 때 행한 첫번째 강연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고, 바디우가 실재에의 열망을 유지하는 또 다른 형태로 내세우는 감산적 정향에 대해서는 지젝의 여러 글들과 함께, 정화의 정향과 감산적 정향을 깔끔하게 비교, 정리해 놓은 ACT 0호에 실린 박제철의 글 "(예술-비평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욕망의 레닌주의적 재발명"을 참고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바디우의 레닌론에 대한 지젝의 평가는 어떤가?

 

"바디우와 라자뤼스가 선호하는 레닌은, 근대의 산업 집중화에 매료되어 경제와 국가기구를 재조직하는 (탈정치화된) 방법을 상상하는 <국가와 혁명>에서의 레닌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 즉 (사회주의 혁명의식은 노동계급 외부에서 주입되어야 한다는 그의 테제에서) 마르크스의 이른바 '경제주의'를 깨버리고 정치의 자율성을 단언하는 레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보다는 자코뱅적인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의 '순수 정치학'은 거대한 적대자인 앵글로색슨 문화연구와 인정을 위한 투쟁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경제 영역의 몰락이라는 지점을 공유한다."(<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p.152-153)

 

 

 

p.s

추신으로 글의 역자 Alberto Toscano에 관한 여담 한 가지. 이탈리아 출신으로 현재 영국 Goldsmith College 사회학과에 있는 이 이론가의 글을 몇 년전부터 종종 접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가 워낙 다양한 분야와 사상가들을 건드리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밌는 건 Goldsmith College의 교수 소개란에서는 그의 관심분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Social theory and philosophy; contemporary French thought (Deleuze and Badiou); political subjectivity; the politics and sociology of religion (fanaticism, messianism, political theology); Marxism, communism, Italian workerism (operaismo) and autonomism;  cognitive capitalism, immaterial labour and theories of ‘real abstraction’ in capitalism; imperialism and empire; economic sociology; biopolitics (in Agamben, Foucault, Negri); theories of collective and technological individuation (Simondon); aesthetics.

 

개중에 주전공(?)을 뽑자면, 바디우와 자율주의 정도가 되겠지만, 아무튼 이쯤되면 오늘날 좌파 이론의 최신 부분은 전부 다 다루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부디 Toscano 형님의 건투를 빈다.

 

아래는가끔 찾아가는 그의 블로그.

 

http://conjunctural.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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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2 01:36 2008/03/12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