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FTA에 대한 제론



FTA는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하여 부르조아계급의 부를 집중시켜준다. 한미간에 맺어진협정은 프롤레타리아트하고는 관계없이 부르조아계급간의 분화를 일으키며 부의 집중에 따르는 피해를 피지배계급에게 전가를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이 협정을 무효로 선언을 한다. 지배계급의 이익과 부합되어져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기 편하게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게 할 수있는 장치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익과의 연관 속에서 판단을 할 뿐이다. 부르조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의회에서의 조인여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전의 FTA는 생산시설의 이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자본의 이동을 통한 무역관세 및 장벽을 철폐함으로 자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제를 쉽게 하기위해서 결과론적이지만 쁘띠부르조아의 생산장비인 소상공인의 확대를 통한 서비스산업의 확대로 민족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무장시키면서 자연스럽게 강요된 노동유연화정책을 추진하였지만, 90년대 중반이후부터 중국이라는 자본주의국가의 새로운 모습의 출현은 낮은 임금으로 생산의 이윤을 확대 시켜주는 지역의 생성으로 인하여 그 외 여타의 지역에서는 자본의 이동이 주로 투기자본의 확대와 생산시설의 빠른 이동에 따르는 모습을 통하여 세계주요 자본주의국가들의 모습은 실업률의 성장과 내수부진으로 인한 낮은 성장을 FTA를 통하여 만회하고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은 낮은 물가를 유지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지만, 낮은 임금을 유지하는데도 이바지 한다. 독점자본의 세계자원 및 곡물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점자본의 이윤을 확대 재생산시켜주는 것이 FTA의 진정한 목적이다. 소고기 개방, 스크린쿼터제 축소, 의약품약가 산정문제 등등에서 일부는 순차자적으로 개방 될 것이고, 의회의 인준만 끝나면 개방이 이루어지는 문제에서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것은 농민과 세계독점기업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들이다. 노동자와 중소상인의 피해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IMF체제로 인한 노동유연화정책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그보다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인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솔직히 노동계급에겐 FTA의 문제가 쉽게 와 닫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공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의 대상인 농민과 중소기업 간의 문제를 노동계급이 이해를 한다는 것은 민족과 국가 간의 이데올로기 속에 갇혀 맹신적인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FTA 의 철폐를 외치는 주체들은 쁘띠부르조아들이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경쟁 속에서 성장 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가진것이 몸만이 아닌 것이다.


FTA에서의 노동계급의 입장은 무엇으로 나타나야하는가? 쁘띠부르조아 입장인 민족과 국가의 헌신을 위해서 미국산 제품과 농산물을 이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미국산이 아닌 상품은 미국의 상표가 있다고 해도 한미 FTA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자유로운 상품의 이동을 노동계급의 이동통로로 만들어야 한다. FTA에서 크게 이득을 보는 것은 독점자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에서 FTA에 대한 판단은 독점자본에 대한 피해를 주기 위한 투쟁을 전개 하는 것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다. FTA는 기업의 합병과 자본의 집중을 보다 더 자유롭게 하기위한 국가 간의 관세철폐를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금융 투기자본의 이윤을 극대화 시키는데 일조한다. 투쟁의 목표를 설정 할 때는 자본의 이동과 기업의 이윤의 확대에서 나오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해결을 위해서 기업영업비밀 폐지, 노동자통제를 위한 공장위원회 건설을 해야 한다.


 

“키부츠 안에서 모든 재산은 공동 소유며, 소속원이 번 돈은 공동 계좌로 입금해

가족 수에 따라 나눈다. 사유화란 소속원들이 벌어들인 돈을 각 개인 계좌에서 스

스로 관리하며, 키부츠 밖에 있는 산업체에서 일하고 받은 돈도 개별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하루 1시간을 일하든 8시간을 일하든 가족 수에 따라 받던

임금도 일한 성과에 따라 달라진다. ····· 키부츠는 사회주의적 원칙, 뛰어난 교육

제도, 집단생활로 유대인의 시오니즘 이상을 구현하는 훌륭한 모델로 여겨져 왔

다. 미국과 유럽에서 귀국한 많은 지식인이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키부츠에서 생

활을 시작했다. 키부츠들은 이스라엘 농림부로부터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구체적

으로 지시받았다.” (중앙일보 2007 3.5.)


신자유주의의 발전은 이스라엘의 키부츠마져 무너뜨렸다. 많은 이윤(?)을 내면서 낮은 가격의 형성은 평등의 사상에 기초하여 일을 했던 사상을 사회적책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도록 강제하고, 사유화로 치달아 갈 수밖에 없었다. 자본과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선 프롤레타리아트의 건전한 이념도 살아남기가 힘들어진다. 농업의

집산화는 자본의 집중을 통한 지분의 집중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고령화되고 있는 농가의 현실과 소규모농업의 현실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농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는 농장의 집단화 또는 공동생산을 통한 농업의 기업화(자본주의적 기업화와는 다른)를 추진해야 한다.


농업의 자본주의는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고, 지금도 계속적인 분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자신의 생산물을 소비하기 위한 소규모 농업으로부터 기계제 대규모 농업까지 분화가 이루지고 있지만 이는 집중으로 가는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필연은 부의 집중이다. 농업의 자본주의화는 소규모생산물의 확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자본주의 유통자본과 농업자본과 농업자본과의 대결속에서 한국의 농업현실은 어두울것 같다.



골리앗을 이기기위해서 정면대결을 하면 진다. 다윗은 돌팔매라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하여 이겼다. 정면대결은 무의미하다. 정면대결을 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덩치를 키우고 힘을 늘려나가야 한다. 거대 자본에 맞설수 있는 것은 거대 자본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거대 자본끼리는 피 터지게 싸우지 않고 동맹을 체결한다. 기업합병, 연합, 트러스트 등등의 방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줄이고자 한다면, 우산 밑으로 들어가면 비에 덜 맞는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농민은 쁘띠부르조아이다.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는 개척가들의 산실이다. 전체보단 개인을, 집단보단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사상과 투쟁의 목표를 쉽게 변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삶의 지혜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식의 해결은 농업의 사회화다.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공동체라는 틀에 들어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야 한다. 농업에서 농업노동자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서 자본의 발전이 아닌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의 모습을 재현 해내야 하는 것이다.토지의 소유는 공동체소유(농민위원회 소유)이거나 국유화로서 나타나게 되고, 이를 생산과 유통, 분배에 대한 통제를 할 수있는 조직, 즉 농민 위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농민위원회는 지역이 아닌 직장에 만들어야 한다. 집단화된 농장에서의 농업노동자조직인 농민위원회는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산의 거점에서 이전까지 소규모적이고, 자기나 가족만이 존재하는 지역적인 생활 공간이 아니라 생산거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칠수 있으며, 자신의 선거를 통해서 뽑은 위원을 자신들의 생각과 동일하게 행동하게 강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규제가 되고, 협동이라는 생활 공간에서 쁘띠부르조아적인 생활 방식을 프롤레타리아트적인 방식으로 강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농장의 집단화는 자본주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농업의 고령화와 소규모적으로 분산되고 수공업적인 모습으로 생산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국의 농업 현실에선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수공업적인 문제해결과 고령화된 사회의 노동력문제의 해결은 자본의 집중을 통한 집산화가 하나의 방편이다. 대규모 자본의 침식을 통한 경쟁에선 한국의 농업사회는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뿐이 없고, 다만 FTA는 낮은 생산성으로 인한 낮은 이윤으로 한국농업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양산과 자본의 집중을 가속화 시킬 것이다. 이미 서서히 진행 되어 왔던 농업의 자본의 집중은 세계유통자본과의 경쟁을 위하여 더 많은 자본을 집중하던가, 아니면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중농형태의 모습으로 변화하던가, 그 밑에서 하청이나 농업노동자로서의 전락의 기로에 서 있다.


FTA는 한국농업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재앙이다. 그러나 한국농업의 자본주의발전에 따르는 파괴적인 힘은 이제 제 2단계로 접어들어 가속화 되었을 뿐이다. FTA는 반대되어야한다. 대안 없는 반대는 언제나 쁘띠부르조아의 양산만을 가져올 뿐이다. 농업의 이익을대변하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고, 자신의 생산자본을 가지고 있는 소규모자영업자들이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아군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 언제나 부르조아의 편으로 바뀔 수도 있으며,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양산을 부채질하는데 이바지 한다. 이들의 이익을 확보해주고, 사회주의 경제로의 진화를 하지 위한 계기로 노동의 집중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생산의 집적화는 생산성 향상의 기초다. 반 FTA의 전선은 운동의 방향을 고립시켜 왔다.


목소리가 큰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손해 보는 장사다. 이미 반FTA의 시작부터가 민족과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장치인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국경이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에는 국가라는 것도 없다. FTA라는 형식을 통한 신자유주의의 심화는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자유무역협정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간 자유무역의 확대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본의 활로 찾기이자, 분업화의 심화, 고착화 과정으로 자본주의의 필연이다. 따라서 단지 현장에서 생존권 투쟁 강화나 민족적 관점으로 투쟁의 관점을 협소화시켜서는 안된다. 이는 자본가들의 ‘국익’논리조차도 제대로 맞서지못할 것이다. FTA가 가지는 포괄성만큼이나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자본주의라는 본질적 문제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해방9호. 자본주의 천국의 길, 한미 FTA를 막아내자)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 뿐이 없다. 노동자국가건설을 위한 대안에서 신자유주의의 해결책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해결방식은 공장위원회건설을 통한 노동자통제, 생산과 분배방식에 대한 통제를 제시해야하며, 농업에서는 농민위원회를 건설을 통한 농업의 집단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대안이다.


FTA의 길은 험난한 여정을 동반한다. 좌파의 입장에서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대중의 투쟁

에는 함께하고 싶어서 무작정 뛰어들 경우에는 무정부적투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쁘띠부르조

아의 사상에 매몰되어 혁명의 시각을 잊어버린다. 그동안 혁명의 역사에서 대안을 제대로 찾지 못했을 때의 비참한 모습을 봐 왔다. 과학에 대한 신의를 잊어버리고 관념의 추종으로 감각에 의존하여 대중을 찾아갈 땐 언제나 대중은 외면을 한다. 쁘띠부르조아들은 감정에 호소만하면 모두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과학을 실현 할 때만이 대중과 한 이불에서 잠을 잘 수가 있는 것이다.



“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한미FTA 저지투쟁은 노동자 민중이 주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또한 한미FTA를 원천 무효화시킬 수 있는 힘은 노동자 민중의 힘과 투쟁뿐이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노동자 민중을 배제하고 가진 자들을 위한 한미FTA 협상을 강행한 노무현 정권과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투쟁을 본격화하자”(노동자의 힘.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한미FTA를 원천무효화시키자!)



“노동자 계급의 생존을 위협할 한미 FTA - 구조조정 쓰나미, 노동유연화 쓰나미, 현장탄압쓰나미를 몰고 올 한미 FTA 반대로 투쟁 기조를 분명히 하고, 한미 FTA 이면에 있는 자본의 의도를 대중적으로 알려나가는 것, 이것이 한미 FTA 투쟁에 임하는 노동자들이 취해야할 투쟁방향이다.”(해방 14호. 한미 FTA 반대투쟁, 노동자 계급 입장으로 투쟁하자! )


"FTA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자본가 모두가 환영하는 자본의 자유확대 프로그램이며 자본의 자유가 확대될수록 노동자의 자유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맞서 반자본의 관점에 입각한 FTA 저지투쟁을 벌여나갈 때만이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비준저지 및 이후 반자본운동의 토대 구축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 23호 FTA 투쟁 -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투쟁방향과 투쟁을 본격화를 선언하는 마당에서 무엇을 가지고 어떠한 무기를 들고서 투쟁해 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다. 국민투표나 직선제를 애기할 때의 기발한 생각은 어디 갔는지보이지 않고 오로지 투쟁을 하자고 한다. FTA에 대한 본질을 선전선동하고 그에 따른 반자본주의입장을 견지하고자 할 때 언제나 불쌍한 쁘띠부르조아정치집단이 희생양이 되어 왔다. 자신들이 대안이 없다는 사실엔 고통스러워하지 않은 채로 만만한 애만 때리고 있는 것이다. 대안이 잘못되었다면 토론과 학습을 통해서 고치면 된다.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대중을 선전 선동한다는 것은 대중을 기만하는 선진 활동가들이며, 쁘띠부르조아의 정신 지체아들이다. 강령에 자신의 얼굴을 담는 것은 모양새가 좋기 때문이 아니며 뽐내고 자랑하고픈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강령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행동의 지침을 삼아 행동양식으로 표현해야하는 것이다. 진정한 반 FTA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본주의에 대한 공세다. 아나키스트처럼 맹종을 하고 쁘띠부르조아집단이 행동을 한다고 하니 따라가고 픈 욕망에 빠진 전차처럼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멧돼지의 형상을 하는 것은 조급증에 빠져 빨리 빨리 외치는 어느 현장의 관리자처럼 자가당착에 빠져 나중엔 허우적거릴 뿐이다. 혁명의 길은 멀다. 우리세상에서 결과를 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객관적정세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무엇을 선과 후에 일을 시작해야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한미FTA의 대안으로서 한중일FTA 내지 동북아 호혜경제를 제시하는 심상정 의원 등 진보진영 일각의 태도이다. 한미FTA가 아니라 한중일FTA라 하더라도, 동북아 호혜경제라는 멋진 말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동북아 공동의 공공성 강화 내지 사회정책 강화 프로그램이나 노동권 확보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이 또한 자본의 자유를 위한 기획일 따름이다. "(해방 23호 FTA 투쟁 -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내에서 복지정책이 강화되었다고 해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양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해방지의 오랜 망상을 축원하며, 장수하기를 기원을 한다. FTA의 문제가 민족과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심어주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좋지만 민족과 국가가 빠지고 대신 자본주의체제개혁의 내용으로 채워 놓으니 늑대가 무서워서 사자를 데리고 오는 격이다.


 

5. 마치면서


“2006년 8월 현재 정규직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40만 6000명이 증가한 989만 4000명으로 전체 임금 근로자의 64.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취업자수는 전년 대비 2만

6000명이 감소한 545만 7000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5%이다 ····· 이는 지난 1년간 임금근로자의 취업구조가 정규직으로 변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비정규직이 감소하고 정규직이 증가하는 취업구조의 변화는 서비스업 중에서 도·소매, 음식·숙박업에서의 구조조정으로 정규직이 증가하고 비정규직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중의 변화 추세를 고려할 때 2001년, 2002년처럼 정규직이 임금근로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웃도는 수준이 아니라 소폭 개선되는데 그칠 것으로 보인다.”(SERI 전망 2007)


 산업현장에서의 비정규직문제는 아직도 요원하다. 노동계급의 투쟁의 현장에서는 비정규직문제의 해결을 위한 투쟁의 물결이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가 아닌 간접적인 문제로 대중투쟁을 이끌어 가기에는 힘이 부족한 것이다. 대중의식의 발현은 피부에 와 닿을 때만이 움직이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선과 총선이라는 계기가 주어지지만, 연례행사로 변한 표 찍는 기계의 작동모습은 정세에 영향력을 좌우하지 못한다. 좋은 일이 있다면 까치가 울겠지만 아직은 소리가 울리지 않고 있다.


 현재는 혁명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다. 대중의 투쟁은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고, 사회주의 운동진영은 누워서 오침하고 있다. 대중의 자생성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쁘띠부르조아 및 상층부의 썩은 내속에서 오염되어 아직도 정화가 되지 않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정화는 힘들고 사회주의세력에 위한 목적의식적인 정화를 통해서만이 한발 더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혁명적인 계급정당의 건설을 위한 발걸음은 아직도 무겁다. 전국적인 조직이라고 자처하는 사회주의세력은 사상의 물결 속에서 끼리끼리 모여 물장구를 치고 있으며. 대중의식이라는 방파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파도를 피해 숨어 있는 실정이다. 혁명을 원하면 혁명조직을 건설해야 하는 것은 당면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혁명조직을 달라 그러면 한반도를 뒤엎을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노동자자주관리는 자본주의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권력을 노동계급이 가지지 못하는 한 언제나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놓여 있어 자본주의적 관계로 환원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철폐 없는 노동자통제나 노동자위원회, 노동자평의회라는 것은 자본주의내의 노동조합의 운명하고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상층부의 타락은 기층운동 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자본주의는 이미 자본의 국경이 철폐되었던 시점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적인 단결을 예고 해 왔다. 사회주의 운동권과 더불어 상층부의 타락으로 인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공세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유는 세계를 하나로 엮지 않는 상태면 언제나 관료적이고 퇴폐적인 사상에 전진을 못하고 후퇴를 한다.


 

혁명을 위한 전진은 언제나 보기가 좋다. 우익사상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어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조직이 나날히 늘어 나고 있다. 비록 지금 노동자의 힘과 노동해방실천연대를 중심으로 비판을 가했지만 ㅡ 다함께, 전진에대한 비판은 이미 할 가치를 잃어 버렷고 팔만 아플 뿐이다. 이들은 반자본주의라는 사상에 대한 경각심조차도 없는 것이다. 아무런 의식도 없고, 오로지 시계추마냥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ㅡ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의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대중은 혁명을 원한다. 지도자는 우측으로 돌아선다. 그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혁명적 계급정당의 건설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지금이라도 움직이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진정 혁명을 위한다면 대중과 함께 동지들은 우에서 좌로 회귀해야 한다. 전위는 좌측에 있고 대중은 그 밑으로 모인다. 올바른 정책은 혁명의 발전에 기여한다. 대중은 기회주의 작태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혁명의 길로 간다.


당신들은 혁명을 원하는가?


대중은 혁명을 원한다.


항로는 희망행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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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7 15:41 2007/05/2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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