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 Letter to James P.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캐넌 동지,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번역까지 하자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것입니다. 이 글의 기본 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우리의 규정은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소불가침조약 때문에 이 규정이 바뀌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2. 소련의 사회 성격은 소련이 부르조아 민주주의국가 또는 부르조아 파시즘국가와 맺는 우호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만약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사회 성격이 바뀐다고 생각할 경우 인민전선 시대가 도래했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3. 소련이 더 이상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우리의 정치적 결론에 어떤 내용이 덧붙여져야 하는지를 명확히 말해야 한다.

4.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는 우리 시대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스탈린의 소련은 후진적이고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고립되어 기형화된 노동자국가 즉 이행기 체제이다. 이것이 아니면 스탈린체제, 파시즘체제, 루즈벨트의 뉴딜체제 등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 bureaucratic collectivism"([세계의 관료화, La Bureaucratisation du Monde], 1939년 빠리, 부르노 알, Bruno R.)가 자본주의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되어야 한다. 소련이 노동자국가이다 아니다 또는 소련 관료집단이 계급이다 아니다 등 용어에 대한 논쟁과 실험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소련이 모종의 자본주의 국가이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새로운 착취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또는 암묵적으로 세계노동자계급의 모든 혁명적 잠재력은 소진되었고 사회주의운동이 파산했으며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착취계급이 지배하는 "관료적 집산주의"로 변모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이러한 결론의 심각성은 자명합니다. 이 결론은 세계노동자계급과 인류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강령, 전략, 전술과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이러한 역사 개념을 순전히 용어의 실험을 통해 도출할 권리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제국주의가 발생시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은 시급한 현실 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대전의 결과 소련 스탈린주의 체제가 세계사회주의혁명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모두에게 밝혀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와 같이 모험주의적 비약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흐리는 이중적인 범죄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급하게 써내려 가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지금 말한 생각들이 불충분하게 개진되어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좀더 완벽한 테제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939년 9월 12일

동지적 인사를 드리며

레온 트로츠키

[2. The USSR in War] 전쟁에 돌입한 소련

독소불가침조약과 소련의 사회 성격

독일과 소련 사이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한가? 소련의 미래 발전 전망은 다시 또다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 전혀 아니다. 노동자국가라는 역사적 실험을 우리는 현재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국가는 여태까지 한 번도 분석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소련의 사회 성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흔히 발생하고 있다. 이 오류의 근원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강령이라는 추상적 기준(programmatic norm)과 혼동하는 데에 있다. 구체적 사실은 추상적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체적 사실이 이 추상적 기준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구체적 사실은 추상적 강령의 유효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재확인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상 첫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퇴보를 설명해왔고 이 입장을 재차 천명한 바 있다.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진정으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며(추상적 기준) 특정 역사적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구체적 현실)를 좀더 확연하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구체적 현실과 추상적 기준 사이의 모순은 우리에게 이 기준을 거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와 정반대로 혁명적 방식을 통해 이 기준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투쟁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임박한 소련에서의 혁명에 대한 우리의 강령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역사적 현실인 소련을 평가하면서 결정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국가라는 기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관한 한 모든 것은 끝났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단계에서 구해내고 보존하며 더 발전시킬 노동자국가의 요소들을 명확히 지적할 뿐이다.

소련과 독일 사이에 막 체결된 불가침조약을 가지고 소련의 사회 성격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코민테른의 입장에 서 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코민테른의 과거 입장에 서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국가의 역사적 임무는 미국과 서유럽 등 제국주의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이 민주주의 체제 대신 독일 파시즘 체제와 조약을 맺은 행위는 일종의 "배신 "이며 이로서 소련은 노동자국가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조약은 소련 관료집단의 퇴보 정도와 소련이 코민테른을 비롯하여 국제노동계급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멸감을 측정하는 척도를 하나 더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독소불가침조약은 소련의 사회 성격을 다시 평가할 근거가 결코 될 수 없다.  

평가의 차이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용어의 차이에 불과한가

그러면 소련 문제를 추상적-사회학적 측면이 아니라 구체적-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우선 소련의 관료집단이 새로운 "계급"이며 현재의 소련이 계급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체제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가정으로부터 어떤 정치적 결론이 새로 도출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제4인터내셔널은 근로인민이 혁명적 봉기를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고 선언해왔다. 그런데 관료집단을 착취"계급"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다른 어떤 노선도 제안하지 않고 있다. 관료집단 타도의 목표는 소비에트의 정치적 지배를 다시 회복하고 소비에트로부터 이들 관료집단을 축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노선을 비판하는 좌익 인사들은 이와 다른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세계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합심하는 것이 새로 생명을 되찾은 소비에트의 임무이다. 따라서 관료집단의 타도는 국가소유와 계획경제의 보존을 전제로 깔고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생산수단의 배분과 경제계획의 내용 전체는 관료집단이 아니라 생산자들의 이해에 의해 결정될 경우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바뀔 것이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기생적인 관료집단의 타도가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발생할 소련 혁명을 정치혁명(political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노선을 비판하는 씰리가(Ciliga), 브루노(Bruno) 등은 이 혁명을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이들이 맞다고 치자. 그러면 이러한 용어 변화는 핵심적으로 어떤 차이를 가지고 오는가? 우리가 나열한 혁명의 임무에 이들은 어떠한 새로운 내용도 덧붙이지 못한다.

우리의 비판자들은 우리가 오래 전에 확립한 사실들을 대체로 인정한다. 그리고 소련 관료집단과 근로인민의 사회적 위치, 관료집단의 국제적 역할 등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우리의 분석에 도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이것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것에 자신들의 견해를 한정하고 있기까지 한다. 이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유일한 비판은 우리가 필요한 "결론 "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한 결론들은 순전히 용어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노동자국가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전체주의적 관료집단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관료집단에 대항하는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용어의 승리가 허용되자마자 이들은 애매한 입장에 놓인다. 이 순전히 용어의 승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확인하자

따라서 이들이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 우리와 연대하는 한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이들과 결별하는 것은 엄청난 넌센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순전히 이론적이며 심지어는 용어적인 차이들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스스로를 장님으로 만드는 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차이점들은 시간이 지나 뼈와 살을 갖추게 되면서 완전히 상반된 정치적 결론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깔끔한 주부가 거미줄이나 쓰레기가 집안에 쌓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듯이 혁명정당은 애매함, 혼동, 불명확함을 허용할 수 없다. 우리 집안부터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예를 들기 위해서 테르미도르 반동 문제를 회상해보자. 우리는 소련에서 테르미도르 반동이 준비되고 있을 뿐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그러나 나중에 좀더 정확하게 그리고 좀더 주도면밀하게 연구한 결과 테르미도르 반동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른 오류에 대한 공개적인 수정은 우리 대오에 조금의 놀라움이나 두려움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사태를 우리는 언제나 핵심적인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 내 반동 세력의 전진이 조직 전체 차원에서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비유를 좀더 정확하게 적용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동지들은 "소련의 방어" 문제에 대해 서로의 견해 차이들을 명확히 하고자 애쓰고 있다. 이 문제는 곧 다루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기초하여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관료집단은 암과 같은 혹인가 아니면 새로운 장기(臟器 )인가

현재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조아 관료들 또는 노동관료들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고 우리의 비판자들은 여러 번 주장해왔다. 그리고 파시스트 관료집단들보다 새롭고 훨씬 더 강력한 사회집단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은 아주 올바른 견해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측면에 대해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소련의 관료집단을 "계급"이라고 규정할 경우 이 계급이 과거 어떤 유산계급과도 닮은 점이 전혀 없다고 즉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규정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련 관료집단을 빈번히 카스트(cast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집단은 폐쇄성, 자의적인 통치, 그리고 흔히 인도의 지배계급이 주장하듯 자신들의 선조는 브라만의 신성한 입술에서 나오고 일반대중은 브라만의 음부에서 나왔다고 믿는 지배계급의 거만 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이 특징을 우리는 카스트라는 용어를 통해 강조한다. 그러나 이 용어도 엄격하게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용어의 임시성이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용어들에 비해 좀더 나을 뿐이다. 소련의 관료집단을 누가 인도의 브라만과 같은 수준에 놓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사회과학 용어들은 퇴보하고 있으며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소련 관료집단이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소련의 관료집단을 관료집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용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특이성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당분간 이 용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용어상으로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관료집단이 사회라는 유기체 위에 일시적으로 돋아난 혹인가 아니면 이미 역사적으로 없어서는 안되는 장기(臟器) 로 변모되었는가? 암과 같은 혹은 역사적 상황들의 "우연적인" (즉 일시적이고 특수한) 뒤엉킴으로 발생할 수 있다. 착취계급을 포함한 모든 사회계급이 그렇듯이 사회라는 유기체의 장기는 생산 과정에 깊이 뿌리박힌 내적 요구들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이 될 뿐이다.  

관료집단의 퇴보 초기

모든 지배계급은 자신이 주도한 착취체제의 생산력이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갔을 경우에만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소련의 경제체제는 경제발전의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추진력의 원천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의 시작에 있었다. 즉 관료집단이 경제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에 생산력이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와 정반대로 관료집단은 소련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이 진실은 소련경제가 20여 년 동안 선진자본주의 기술과 생산체계를 이식하고 동화하는 데 몰두했다는 사실 때문에 가려져 있었다. 좋든 싫든 이 과정은 모든 자발성과 창조적 욕구를 압살하는 관료주의적 절차에 맞추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요건들의 성격이 복잡해질 수록 관료체제가 조성한 장애는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끊임없이 격화되는 모순들로 인해 정치적 격동이 계속 이어졌고 사회 모든 분야의 가장 창조적인 분자들이 체계적으로 제거되었다. 따라서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으로 확립되기도 전에 경제발전의 요구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일으키게 되었다. 관료집단은 새로운 경제체제에 반드시 필요한 주체가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기생적인 혹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만이 지금까지 소련에서 발생한 현상들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관료집단의 전횡과 몰락에 필요한 조건들

소련의 관료집단은 그동안 역사상 존재해왔던 지배계급들의 결함들을 전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에게 걸맞는 역사적 임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소련의 관료적 퇴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현대사회 일반법칙의 표현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의해 포위된 후진 혁명국의 조건 속에서 이 일반법칙이 특이하고도 예외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굴절되어 나타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재가 품귀를 이루고 이로 인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 의해 소비재의 분배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경찰관이 탄생했다. 이 경찰관이 곧 관료집단이다. 외부로부터의 적대적인 압력은 이 경찰관에게 나라의 "파수꾼" 역할을 맡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로서 관료집단은 전권을 행사하며 나라의 재화를 이중적으로 약탈하고 있다.

소련의 후진성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포위가 관료집단의 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일시적일 뿐이며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부르조아 경제학자들까지도 미국이 계획경제를 운용할 경우 국민총소득이 일 년 동안 2천억 달러로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고 계산한 바 있다. 이 결과 미국 인구 전체가 기본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삶의 안락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이들은 결론내렸다. 그리고 세계 사회주의혁명은 관료화 현상의 보충적인 원인인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을 제거할 것이다. 국민총소득의 엄청난 부분을 군비에 쏟아붓는 현상이 제거되면 대중들의 생활수준과 문화수준은 더욱 상승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조성되면 경찰관-분배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관료집단은 저절로 몰락할 것이다. 거대한 협동조합인 행정체계가 국가권력을 재빨리 대체할 것이다. 이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의 중간에 위치한 새로운 지배계급이나 새로운 착취체제는 존재할 여지를 상실할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본주의와 부르조아계급의 붕괴는 현재 극단적인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 체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생산력은 계획에 따라 조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과업을 누가 달성할 것인가? 노동계급일까 아니면 정치인, 행정가, 기술자들로 구성된 "인민위원"이라는 지배계급일까? 노동계급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걸 수는 없음을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고 좌익의 일부에서는 주장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전제조건은 이미 마련되었으나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막을 "능력을 결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파시스트들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것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를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낼 "능력을 결여"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화 역시 민주적인 절차들을 통해 노동계급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세계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파시스트들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서 압살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종착역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세계노동계급의 완전한 무능력에 의해서 공공연히 준비된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인정될 경우 생산력을 국유화하는 시급한 과업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성취되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이다. 그러면 누가 이 과업을 달성할 것인가? 전세계적으로 쇠퇴한 부르조아계급 대신 지배계급이 될 신 관료집단이 이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논지는 말싸움에 만족하지 못하는 "좌익들"에 의해서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다.  

임박한 전쟁과 현대사회의 운명

이제 새로운 상황들이 전개되면서 이 논지는 아주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논란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노동계급에게 새롭고 결정적인 시험대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전쟁이 노동자혁명을 촉발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에서 관료집단을 타도시킬 것이며 1918년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소생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계급"인지 아니면 노동자국가의 기생적 혹인지는 자동적으로 판가름날 것이다. 세계혁명의 과정 속에서 소련 관료집단은 일회적인 퇴행현상(an episodic relapse)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소련과 같이 특권 관료집단에게 사회의 지배력을 넘겨주는 경우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료적 퇴행현상이 러시아라는 특정 국가의 후진성이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포위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주도계급이 될 수 없는 노동계급의 선천적 무능력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짓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소련은 자신의 근본적 특징들을 통해 국제적 규모의 새로운 착취체제의 등장을 알리는 선구자가 되었다.

우리는 현재 소련의 명칭에 대한 용어상의 논쟁으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비판자들은 이에 대해 항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체제가 다른 사회체제로 대체되는 문제는 필요한 역사적 전망을 가져야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를 끝까지 추구할 경우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부르조아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끔찍한 퇴행의 결과이던가 아니면 새로운 착취사회의 첫 단계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관료집단은 당연히 새로운 착취계급이 될 것이다. 이 예측이 아무리 당혹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세계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실제 능력을 보유하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에 기반한 사회주의 강령은 허황된 백일몽(유토피아) 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럴 경우 전체주의 관료사회의 피착취계급인 노예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새로운 "최소"강령이 필요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을 기각시킬 논란의 여지없고 인상에 깊이 남는 객관적 자료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 독일의 "좌파 공산주의자" 휴고 우르반스(Hugo Urbahns)는 자본주의 대신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라는 새로운 역사 시대가 임박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새로운 체제의 첫 예로 그는 이탈리아, 소련, 독일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론을 가지고 정치노선 상의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한때 제4인터내셔널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의 "좌파 공산주의자" 브루노 알(Bruno R.)은 최근 "관료적 집산주의(bureaucratic collectivism)" 체제가 자본주의를 곧 대신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1939년, 빠리, [세계의 관료화, La Bureaucratisation du Monde], 350쪽) 새로운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이 되어 근로인민을 집단적으로 착취하며 노동계급은 전체주의 착취자들의 노예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브루노 알은 소련의 계획경제, 파시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루우즈벨트의 "뉴딜체제" 등을 같은 성격의 체제로 분류하고 있다. 이 모든 체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한 특징들은 현대경제의 집단적 경향에 의해서 나타난다. 심지어 레닌조차 10월 혁명 이전에 이미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생산력의 거대한 집중, 독점자본과 국가의 더욱 밀접한 융합, 이 융합의 결과로 인한 노골적인 독재정치. 생산력의 집중화와 집단화는 혁명과 반혁명 정치를 모두 규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 테르미도르반동, 파시즘, 미국식 "개량주의"를 하나로 뭉뚱거릴 수는 없다. 브루노 알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굴종의 결과 생산력의 집단화 경향이 "관료적 집산주의"의 형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집단화 현상 그 자체는 논란의 여지없이 올바르다. 그러나 이 집단화의 한계는 어디에 있으며 집단화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행기에 나타나는 기형적 현상이자 복합적 사회요인의 불균등 발전(uneven development)의 결과를 가지고 브루노 알은 관료집단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독립적인 사회구성체가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한 역사적 현상에 대한 쓸데없는 용어 싸움을 브루노 알은 이론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러나 이 이유 때문에 그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손쉬운 작업이 된다.

허다한 초좌익들처럼 브루노 알은 스탈린주의 체제를 근본핵심에 있어서 파시즘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소련의 관료집단은 파시즘의 지배 방식들을 채용했다. 반면에 "부분적" 국가개입 조치에 아직도 자신을 한정하고 있는 파시스트 관료집단은 완벽한 국유화로 나아가고 있으며 곧 이 과정을 완결시킬 것이라고 그는 전망하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주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반(反) 자본주의"가 부르조아계급을 철폐하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두 번째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개량적 조치들이 혁명과 다른 정도만큼이나 국가개입과 국유화의 "부분적" 조치들은 계획된 국가경제와 전혀 다르다. 이 하늘과 땅 차이는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무쏠리니와 히틀러는 유산계급의 이해를 "조정하고 " 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고 "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이런 조치들은 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소유관계 혁명을 가져온 덕분에 소련의 관료집단은 경제 전체를 통솔하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소련의 관료집단은 파시스트 관료들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 차이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양 극단에 있는 파시즘 체제와 스탈린주의 체제가 어느 날 브루노 알의 말대로 "관료적 집산주의"라는 동일한 착취체제가 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당연히 이 체제는 인류를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적 소유라는 반동적 소유체제 그리고 똑같이 반동적인 개별국가(national state)체제에 의해 자본주의의 위기가 야기된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파시스트 국가들이 정말이지 일국적 차원에서 계획경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리고 노동계급 혁명운동의 발전과정은 어떠한 정교한 계획도를 가지고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지만 어떻든 이 운동이 장기간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러나 세계지배를 위한 전체주의 국가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전쟁은 계획경제의 성과들을 집어삼키고 문명의 기반을 파괴할 것이다. 전쟁의 결과 일부 전승국들이 전세계를 전체주의 체제로 통일할지도 모른다는 버트런드 러쓸(Bertrand Russell)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이 매우 의심스러운 가정이 현실로 나타나도 군사적인 "세계통일"은 베르사이유 조약만큼이나 불안정하다. 새로운 세계대전은 여러 나라에서 터지는 봉기와 개별적 평화조약들로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문명의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혁명만이 인류가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주관적인 소망이 아니며 객관적 현실에 의해서 그 올바름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혁명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또다시 야만상태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0/01 21:15 2005/10/01 21:15
http://blog.jinbo.net/choyul/trackback/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