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과 그 지도부

계급 대중과 계급 지도부 사이의 관계는 곧바로 다른 글을 통해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가장 필수적인 문제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정치는 경제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반영"에 불과하다고 속류 맑스주의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지도부가 계급 대중의 상태를 직접 그리고 단순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지도부는 억압받는 계급 대중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지배계급의 압력에 굴복한다. 예를 들어 미국 노동조합 지도부는 노동계급이라기보다는 부르조아계급을 "반영한다". 부르조아계급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 지도부의 건설과 육성은 달성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과업이다.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러시아는 특정 상황 속에서 가장 시야가 넓고 용기있는 지도부를 건설했다. 이것은 역사 변증법이 가장 찬란하게 실현된 경우이다. 반면에 자본주의가 가장 오래 존속한 영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가장 멍청하고 노예근성이 강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1914년 7월에 드러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전쟁 첫날부터 노동계급 지도부에게 격심한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때 이후 25년이 경과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우리 시대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지도부를 건설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은 이러한 지도부가 건설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사실이 지도부가 퇴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객관적 역사의 필연이 노동계급 전위당의 의식에 의해서 장기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 벌어지는 전쟁과 이 전쟁이 빚어낼 수밖에 없는 심대한 충격 속에서 노동계급을 정치권력 장악의 길로 인도할 진정한 혁명적 지도부가 건설될 것인가?

강령의 내용뿐만 아니라 조직의 존립 그 자체를 통해 제4인터내셔널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그러나 실망하고 공포에 질린 사이비 맑스주의 조류의 대표들은 이와 반대로 지도부의 파산이 곧 노동계급의 무능력을 "반영"할 뿐이라는 가정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들 모두가 이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초좌익주의자, 중도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은 패배의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채 이 책임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한다. 정확히 어떤 조건들 속에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능력을 갖게 될 지에 대해서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말하는 자가 없다.

패배의 진정한 원인이 노동계급의 사회계급적 특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현대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은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미래의 어느 날 혁명적 과업을 수행한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다. 처절한 자본주의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원초적인 충동과 수명이 다한 노동조합 지도부의 보수적이며 애국적이며 전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성격 사이에는 깊은 모순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없는 두 방향의 사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전체주의 독재 --- 격심한 위기의 산물 그리고 불안정한 체제

10월 혁명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며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 이후 사태의 전개 과정 역시 이 예견의 올바름을 입증하였다. 소련 관료집단의 퇴보 역시 이 예견을 논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맑스주의자도 러시아의 고립된 노동자국가가 무한정 지탱하리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는 체제의 퇴보보다 붕괴를 예상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 결과를 구태어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가능성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퇴보는 특정 단계에서 붕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소련이든 히틀러의 독일이든 전체주의 체제의 핵심 특징은 그 체제의 일시적 성격에 있다. 노골적인 독재체제는 일반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사회 위기의 산물이며 그 징후였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다. 심각한 위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전체주의 국가는 단지 일시적으로만 사회모순을 억압할 수 있을 뿐 영원히 지탱될 수가 없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은 소련 사회가 관료집단을 거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단히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브루노 알은 다름이 아니라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보고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결론내렸다. 놀라 자빠질 일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배계급만이 그런 대규모의 조치들을 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급"이 아니었던 짜르가 자신의 몰락을 앞두고 대규모 숙청을 치밀하게 자행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임박한 죽음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스탈린은 대대적인 숙청 사기극을 자행했다. 이것은 스탈린 관료집단이 안정된 지배계급으로 변신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증언하고 있다. 치욕스런 멸망을 몇 달이나 몇 년 앞둔 시점에서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을 새로운 지배계급이라고 부른다면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을 통해서만 동지들이 용어상의 실험이나 너무 성급한 일반화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세계혁명과 소련의 소생을 향하여

25년이라는 세월은 세계노동계급의 전위당이 혁명적으로 재무장을 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에 둘러싸인 고립된 후진국 러시아에서 소비에트체제를 그대로 보존하기에는 이 25년이 너무도 긴 시간이라는 것이 역시 증명되었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이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본 과업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 과업이 아직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노동계급의 한 부대인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혁명의 승리를 통해 이 과업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난 25년은 거대한 혁명적 자산과 미래의 무한한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은 달성되지 않은 노동계급의 과업을 더 높은 역사적 단계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 뿐만 아니라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이 시험의 결과는 노동자혁명의 시대인 현대를 평가하는 데 당연히 결정적인 의의를 지닐 것이다.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전후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모든 전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현대와 이 시대의 역사 원동력에 대한 개념들을 수정해야 하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소련이나 스탈린 강도집단에 대한 평가를 현실적 필요가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후 몇십년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재검토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인류는 사회혁명과 사회주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아니면 이와 반대로 전체주의 관료체제라는 쇠퇴된 사회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휴고 우르반스나 브루노 알과 같은 도식주의자들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이들은 소련이 이미 최종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둘째 이들은 소련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 사회이면서 이 사회가 장기간 존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세계노동계급이 지금의 시기와 전쟁을 경험한 후 사회의 주인이 될 능력이 없다고 판명될 경우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모든 희망은 공염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주의혁명의 조건을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느 누구도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을 예측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실망감과 피로감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혁명적 잠재력을 박탈당했으며 당면한 시대에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할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권리가 맑스주의자에게는 조금도 없다. 경제와 문화를 아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 25년은 역사의 잣대로 보면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한 시간의 길이도 되지 않는다. 한시간이나 하루에 걸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평생의 경험과 분석을 통해 설정한 목표를 버리는 사람을 도대체 무엇에 써먹겠는가? 1907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의 가장 어두운 반동기에 우리는 1905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적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를 준비했다. 세계적인 반동기에 우리는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적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이 자신을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세계정당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노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 사실 자체를 통해 소련이 진정한 노동자국가로 소생하도록 정치행동을 조직해 나간다.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이다

우리는 소련의 어떤 것들을 방어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닮고 있는 측면들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닮고 있는 측면들을 방어해야 한다. 독일에서 지배 관료집단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따라서 이 노선은 자본주의 소유체제의 즉각적 타도를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다. 소련의 경우 관료집단 타도를 통해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오직 국가소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만 우리는 소련을 방어한다.

관료집단의 기생성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집단농장의 귀족층 사이에 존재하는 사적 소유의 경향에 대항하여 소련 노동자들은 국가소유를 방어해야 한다. 우리 대오에서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결국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이다.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보존하기 위해 관료집단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한다면 대외정책에서도 똑같은 노선을 걸어야 한다. 물론 브루노 알은 "관료적 집산주의"가 이미 전세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국가소유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확신시킨다. 왜냐하면 히틀러와 챔벌린(?)은 스탈린만큼이나 국가소유의 보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슬프게도 부르노 알의 확언은 소용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히틀러는 틀림없이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모든 재산들을 다시 이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리고 전후 협상에서 소련을 희생시키기 위해 영국인, 프랑스인, 벨기에인 등에게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의 군대를 위해 소련의 가장 중요한 국영기업을 독일이 관리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현재 히틀러는 스탈린의 동맹자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도움에 힘입어 서부전선에서 승리할 경우 히틀러는 다음 차례로 총구를 스탈린에게 향하고 소련을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챔벌린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히틀러처럼 행동할 것이다.

소련 방어와 계급투쟁

소련 방어의 문제에서 흔히 오류가 발생한다. 이 오류는 "방어"의 방법들을 잘못 이해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소련의 방어는 크렘린의 관료집단에게 화해를 구하고 이들의 정책을 받아들이며 관료집단 동맹자들의 정책에 대해 유화조치를 취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다른 모든 문제처럼 이 문제에서도 우리는 국제계급투쟁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최근 프랑스의 소규모 정기간행물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 패배를 주장하는 만큼이나 소련의 전쟁 패배를 주장한다. 즉 소련을 방어한다면 소련의 제국주의 동맹세력에 대해서 패배를 주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소련의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지금 상황에서 이 현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의 분석방법은 완전히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소련과 동맹을 맺고 있거나 곧 동맹을 맺을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 패배를 주창하지 않는 것은 이들 나라의 노동자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정부의 편을 들라고 권유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전쟁 패배 노선 일반을 포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제국주의 전쟁 상황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전쟁 패배 노선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소련 방어"라는 이름 하에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 노선은 결국 소련을 붕괴와 몰락으로 이끌 것이다.

코민테른의 "소련 방어" 노선은 이들이 어제까지 주창한 "반(反) 파시즘 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정치를 포기하는 노선이다. 이 노선을 따르면 노동계급은 항상 부르조아들끼리의 싸움에서 조연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일부 동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스탈린과 그의 동맹자들의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으므로 소련의 방어 노선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 노선은 이들이 "소련 방어"의 문제에서 기회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기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제국주의 식민지 인민의 이익을 방어하듯이 소련을 방어한다. 흔히 그렇듯이 우리는 제국주의 세력들끼리의 싸움에서 어느 한 편을 지지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세력의 심장부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국제계급투쟁의 방법을 활용한다.

우리는 여당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소련에서도 화해할 수 없는 반대당이다. 우리의 과업 중의 하나는 "소련 방어"이다. 그런데 이 과업을 부르조아 정부나 소련 정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선동을 통해 대중들을 교육함으로써 달성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무엇을 방어하고 무엇을 타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을 달성한다. 이 "방어" 노선은 즉시 기적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기적을 이루는 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극소수의 혁명가들일 뿐이다. 우리의 영향권 안에 있는 노동자들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적들로부터 기습을 당하지 않게 하는 데 우리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대중을 혁명으로 이끄는 이들의 작업을 준비시키는 데에 있다.

소련 방어는 곧 세계혁명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혁명의 이해에 거스르지 않는 방법들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전술적 과업이 전략적 과업과 맺는 관계처럼 소련의 방어는 세계혁명의 과업과 연결되어 있다. 전술은 전략 목표에 종속되며 결코 후자와 모순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적군(Red Army) 점령지 문제

지금 이 순간에도 적군이 점령한 지역의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곳에서 날아드는 전보의 내용들은 교전 당사자들의 무성한 거짓말 때문에 서로 모순되고 있다. 그러나 틀림없이 실제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하다. 점령지의 대부분은 틀림없이 소련 영토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점령지는 어떤 소유 형태를 나타낼 것인가?

히틀러와 맺은 조약에 의거하여 소련 당국이 점령지의 사적 소유권(rights of private property)을 그대로 두고 파시스트 정권의 조치를 모방하여 경제를 "통제"하는 일로 스스로를 제한한다고 잠시 가정해보자. 이러한 소련 정부의 양보정책은 대단히 원칙적인 성격을 띨 것이고 소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소련의 사회 성격을 새로 평가하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 영토가 될 이들 점령지에서 소련 정부가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관료집단이 아직까지 사회주의 강령에 충실해서가 아니다. 점령지에서 정치권력 그리고 부가적 특권들을 토착 구지배계급과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적절한 비유가 저절로 떠오른다. 나폴레옹은 군사독재를 통해 프랑스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그는 농노제 폐지 법령을 공포하였다. 나폴레옹이 농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보나파르트 체제가 봉건적 소유관계가 아니라 부르조아 소유관계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의 보나파르트 체제가 자본주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한 적군에 의한 폴란드 점령은 자본주의 소유를 철폐하지 않을 수 없다. 점령지의 사회체제를 소련의 체제와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착취자를 착취하는"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다만 군사적-관료적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 새로운 점령지에서 대중의 독립적 정치행동을 호소할 경우 경찰의 가차없는 탄압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각성한 혁명 대중들을 관료집단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호소가 없이는 스탈린 체제가 보다 나은 새로운 체제로 변화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호소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어투를 사용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태의 어느 한 측면만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당연히 존재한다. 히틀러와 군사협정을 맺어 폴란드를 점령하려고 소련정부는 오랫동안 소련과 전세계 노동대중을 기만했으며 지금도 계속 기만하고 있다. 이 결과 코민테른의 대오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과제는 이 지역 저 지역에서 소유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계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의 투쟁성과를 보존하고 새로운 성과를 쟁취할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 측면은 혁명활동에서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순전히 반동적이며 세계혁명의 주요한 장애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소련정부와 코민테른에 대한 전반적인(general) 평가가 점령지의 국유화 조치 자체가 진보적이라는 특정(particular)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내일이라도 히틀러가 유럽 동부에 무력을 집중시켜 동부 폴란드에 "(부르조아적) 법과 질서"를 회복시킬 경우 선진노동자들은 히틀러에 대항하여 소련 보나파르트 정권이 확립한 새로운 소유형태를 방어해야 한다.  

우리는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진보적인 조치이다. 그러나 이 조치의 진보성은 상대적이다. 이 조치의 중요도는 다른 모든 요인들의 총합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조치로 위장한 채 관료적 전제와 기생성을 앞세운 소련의 영토 확대는 소련 관료집단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노동자혁명을 관료적 조치로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들을 만들어 낸다. 이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해야 한다. 이 해악은 폴란드에서 진행되고 있는 스탈린의 진보적 조치의 미덕을 훨씬 압도한다. 소련 및 점령지의 국유화 조치들이 진정 사회주의 체제의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소련의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강령은 모든 측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과 함께 전개된 여러 사태들은 우리를 당혹 속에 몰아넣지 못했다. 이것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련의 체제 자체와 소련의 대외정책이 서로 날카로운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용어의 장난 즉 소련이 노동자국가다 아니다 등의 논쟁이 이 모순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 속의 관계들과 모순들을 출발점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우리는 소련의 관료집단에게 어떠한 역사적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련이 새로운 지역들을 점령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옹호한다. 그리고 벨로루시인들이 원한다면 벨로루시의 독립을 옹호한다. 동시에 적군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제4인터내셔널 동지들은 지주와 자본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농토를 분배해주고 소비에트와 노동자위원회 등을 조직하는 일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편 이들은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선거 시기에는 관료집단으로부터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가 완전히 독립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집단과 이들의 현지 하수인들의 성격을 폭로하는 혁명적 선전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동쪽으로 화살을 돌려 적군이 점령한 지역들을 침략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제4인터내셔널 동지들은 소련 정부에 대한 기존의 노선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히틀러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야 한다. 노동자들은, "히틀러가 스탈린을 타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작업은 우리의 몫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히틀러와의 군사 대결에서 혁명적 노동자들은 적군 병사들과 가능한 선에서 가장 밀접한 동지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무기를 들고 있는 동안 히틀러에게 타격을 가하면서 동시에 다음 단계 어쩌면 아주 가까운 다음 단계에서 스탈린 타도를 준비하는 혁명적 선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소련 방어"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라는 구호를 외치는 소련 정부의 공식 방어노선과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우리 식 소련 방어는 "사회주의를 위해! 세계혁명을 위해! 스탈린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 하에 수행된다. 이 두 종류의 "소련 방어" 정책이 대중의 의식에 혼동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구호를 채택하는 법을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엇을 우리가 방어하며 어떻게 그것을 방어하며 누구에 대항하여 그것을 방어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과업에 대해 우리 자신이 명확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우리의 구호는 대중들 사이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결론

현재 소련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바꿀 이유는 전혀 없다. 전쟁은 다양한 정치현상들을 가속적으로 발전시킨다. 어쩌면 소련의 혁명적 소생을 가속화시킬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소련의 최종적 퇴보 과정을 가속화시킬 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전쟁이 소련 내부에 미치는 변화들을 면밀히 편견없이 추적하여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적군 점령지에서의 과업은 소련 국내에서의 과업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점령지의 과업은 극단적으로 날카로운 형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일반적인 과업들을 더욱 명확하게 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소련의 무엇을 방어하며(국가소유와 계획경제체제) 누구에 대항하여 가차없는 투쟁을 수행하는지(기생적인 관료집단과 코민테른) 노동자들이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구호를 선택해야 한다. 소련 관료집단의 타도는 소련 내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보존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소련의 국가소유 보존은 세계 노동계급 혁명의 이해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단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39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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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17 2005/10/0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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