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캐넌 동지에게,

소수파 지도자들은 원칙에 입각하여 분파투쟁을 수행하자는 동지의 제안을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동봉한 글에 대해 이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는 뻔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글에는 기본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없습니다. 트로츠키는 당활동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판단일 것입니다. 쁘띠부르조아 경향 모두가 소수파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노동자 회원들 전부가 다수파와 동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이 글이 결코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고 덮어씌우고 있다"는 식의 주장들을 늘어놓을 것이 확실합니다.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면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전쟁 시대의 요리책에서 요리법들을 찾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요리책을 저술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원칙에 입각한 접근방법들을 찾아낼 경우 어떠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정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문제들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이것은 가능합니다. 핀란드 문제에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능력이 없음을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구성원의 성격이 완전히 같은 분파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노동자 정당이나 분파에서도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어떤 성격의 그룹이 조직이나 분파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느냐 입니다. 이 글은 소수파 지도자들의 생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비판적인 분석에 견딜 수 없는 소수파의 견해들은 확고한 형태도 없으며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소수파 지도자들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낙인찍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의 생각들을 끝까지 전개시켰을 뿐입니다. 물론 나는 당내 투쟁을 옆에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투쟁의 일반적인 특징들은 옆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1939년 12월 15일

동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잡으며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10. A Petty-Bourgeois Opposition in the Socialist Workers Party]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  

이론에 대한 회의와 절충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1939년 1월호에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공동으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Intellectuals in Retreat) 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는 올바른 사고와 정확한 정치분석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결함까지는 안가더라도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글의 가치가 손상을 입고 있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충분한 이유도 없이 "이론 "의 옹호자로 자처하는 인사들을 겨냥하여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의도적으로 이 글은 이론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스프링이 빠진 벽시계처럼 미국의 "급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맑스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변증법을 기각한 이유가 전혀 실려있지 않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하다. "무제한의 기회"가 보장되는 이 나라에서 지식인들은 계급투쟁 원리를 다른 어느 나라 지식인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모순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론 영역에서 모순의 논리인 변증법을 거부하였다. 정치 영역에서는 영특한 삼단논법을 통해 "공정한" 정치강령의 올바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회는 "합리적인" 조치들을 통해 재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론 영역에서도 "상식" 수준으로 낮추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데 충분하다고 이들은 생각하였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짬뽕인 실용주의는 미국의 국가철학이 되었다.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의 이론적 방법론은 헨리 포드(Henry Ford)의 방법론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움직이는 사회를 "공돌이(engineer)"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이스트먼은 플라톤처럼 관념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맥스 이스트먼의 할아버지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토를 차지하고 재산을 쌓아 올리는 일에 변증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변증법에 대해서 미국 지식인들이 경멸을 나타내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해서 미국 자본주의처럼 실용주의 철학은 파산지경에 처해 있다.

사회의 물질적 발전과정과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관계를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의 필자들은 보여주지 않았고 보여줄 수도 없었으며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버넘과 섁트먼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글의 두 저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이론에 대해서 평가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한 명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과 관계있지만 이 관계는 언제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인간은 종종 일관성이 없이 행동한다. 본 저자들은 모두 상대방이 `철학 이론 '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이견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반드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증명한 적은 아직은 없다. 사실 정당, 강령, 투쟁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같이 일하면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좀더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두 저자는 희망하고 있다. 한편 파시즘, 전쟁, 실업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이 대단히 놀라운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엉터리 방법론으로 가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론으로 정말이지 빈번하게 올바르지 못한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방법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 때이든 좀더 여유가 있으면 방법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할 일들이 있다는 식이다. 연장이 나쁘다고 조장에게 불평하는 노동자가 조장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상해 보자: 나쁜 연장으로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으며 좋은 연장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은 재료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노동자는 특히 도급제로 삯을 받을 경우 전혀 황당하지 않은 올바른 말로 조장에게 대꾸할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대상을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좋은 연장의 가치를 인정한다. 반면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은 쉽게 바뀌는 말과 피상적인 일반화를 자신의 "연장"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주요한 사건들이 그의 머리를 강타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당원이 변증법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할 경우 이것은 당연히 무기력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이라는 학교를 졸업한 노동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변증법적 사고에 도달한다.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몰라도 그는 그 방법론과 결론을 즉시 받아들인다. 그런데 쁘띠부르조아에게는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진다. 물론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내적인 혁명이 없이도 노동계급의 견해로 넘어가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훈련받은 쁘띠부르조아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의 이론적인 편견들은 이미 학교 걸상에서 완성되었다. 변증법의 도움이 없이도 온갖 지식들을 많이 얻는다면 이들은 변증법이 없이도 세상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이들은 이론의 도구들을 확인하고 닦고 벼리는 일에 실패하고 협소한 일상적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정도만큼 이들은 변증법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건들에 의해서 내동댕이 처질 경우 이들은 쉽게 방향을 잃고 다시 쁘띠부르조아적 사고방식에 빠져든다.

"비일관성"에 기대어 원칙에 위배되는 이론적 동맹을 정당화하는 것은 맑스주의자 답지 못한 행위이다. 비일관성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정치에서는 개개의 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비일관성은 보통의 경우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관성을 가질 수 없는 사회 세력들이 존재한다. 오래된 쁘띠부르조아 경향을 벗어 던지지 못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노동자 정당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론적인 타협을 강요당한다.

위에서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한 섁트먼 동지의 태도는 절충적 회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지는 맑스주의 학교에서 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모든 종류의 회의에 빠지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몹쓸 병을 전염받았다.  

경고와 확인

이 글은 너무도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즉시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지와 버넘 동지가 지식인들에 대해 쓴 글을 지금 바로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인 동지 개인이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타격입니다. 버넘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은 아주 명확하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될 게 전혀 없다. 이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동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새로운 인터내셔널] 독자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이스트먼 같은 작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현재의 논쟁이 진행되기 몇 달 전인 1월 20일에 나는 이 편지를 썼다. 그런데 3월 5일이 되어서야 답장이 왔다. 내가 왜 이 문제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답장이었다. 3월 9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다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변증법을 거부하는 동지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증법이 아주 중요한 쟁점이 되는 그리고 될 수밖에 없는 글을 이런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확인했을 뿐입니다. 논쟁은 정치와 이론의 두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동지의 정치적 비판은 좋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이론적 비판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적극적으로 비판해야할 지점에서 비판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즉 변증법을 거부하는 인사들의 오류는 적어도 이론의 측면에서 보면 변증법을 통해 사물의 논리를 끝까지 전개할 수 없는 무능력과 무의욕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이 임무는 교육적 측면에서 아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변증법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변증법적 논리가 없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에 반대하는 버넘동지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서 그는 이스트먼, 쿡(Cook)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변증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더니 결국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하는 이유들을 보여줄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했다.

현재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내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내가 우려할 수 있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운 형태로 나의 우려와 경고를 확인해 주었다. 섁트먼 동지의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에서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꽤 오래 전부터 버넘 동지는 자신의 직관적인 인상을 통해 비노동계급적 비부르조아적 국가를 순전히 경험적으로 이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결과 응그슬쩍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이라는 맑스주의적 국가론을 청산해 버렸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좀더 고려해 보아야 한다." 더욱이 그와 버넘 동지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 완전히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 일치는 소련의 사회성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독자들은 다시 한번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쓴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버넘은 변증법을 거부한다. 섁트먼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일관성"이라는 하늘이 내린 선물은 이들이 공통된 정치적 결론을 갖는 것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동지들 모두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변증법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조목 조목 반복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이 주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실용주의라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섁트먼에게는 방법론이 없다. 그는 버넘의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다. 버넘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섁트먼은 사회학뿐만 아니라 철학 영역에서도 버넘과 함께 반맑스주의적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은 실용주의자로 섁트먼은 절충주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현상은 아주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고 영역과 가장 중요한 두 문제에 있어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완벽히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를 해본 적이 없는 동지들마저 놀라게 하는 장점이 있다. 사고 방법은 변증법적이거나 속류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난 1월 우리는 이 두 저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견해 차이를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런데 현재로는 이러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견해 일치나 견해 차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증명한 적이 없다. "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증명한 적이 없다니! 바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두 동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추상적 이론 "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에 정확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바 있었다.

물론 이 두 예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두 동지는 변증법에 대한 거부와 반(半) 거부를 기초로 동맹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노동자 정당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자기 정당의 맑스주의 분파에 대항하였다. 말하자면 군사작전의 전선은 바뀌었으나 무기는 그대로인 셈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자주 일관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어떤 일관성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논리는 비일관성이 아니라 일관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버넘은 변증법을 알아보지 못하나 변증법은 그를 알아보아서 그에게 지배력을 넓히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이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신의 정치적 결론을 통해 변증법에 대한 그의 경시가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본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루는 교과서에 섁트먼의 예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작년 제4인터내셔널의 동조자인 영국의 어느 젊은 정치경제학 교수가 나를 방문했다.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는 방도들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는 갑자기 케인즈와 그 밖의 인물들의 정신에 입각한 공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명확한 경제적 목적을 결정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등등.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변증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소." 그는 어느 정도 놀라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변증법이 어느 짝에 쓸모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대해서 귀하가 말한 것을 가지고 귀하가 어떤 철학 조류에 속하고 있는지를 변증법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하더라도 변증법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후 이 교수로부터 아무 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비변증법적 교수는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며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는 "시대에 뒤진" 견해이며 우리의 조직 운영 방법들이 나쁘다 등등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들을 기초로 그가 어떤 일반적 사고 유형에 속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가 다른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사고 방법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 원리

수바린(Souvarine)처럼 썩을 대로 썩은 회의론자들은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맑스주의자들"이 있다. 이런 맑스주의자들은 [월간 현대](Modern Monthly)의 지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소수파 내부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악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청년 동지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변증법은 소설같은 허구도 아니며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고 형식의 과학으로서 일상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좀더 복잡하고 과정이 장기화된 사물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사이의 관계는 고등수학과 하등수학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여기서 아주 간략하게 문제의 핵심을 제시해 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 삼단논법은 "갑"은 "갑"과 같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가정은 수많은 인간의 실제 행동과 초보적인 일반화 작업의 공리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갑"은 "갑"과 같지 않다. 이 두 글자를 렌즈로 비추어 보면 이 점은 쉽게 증명된다. 이 두 글자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글자들은 설탕 1파운드와 같이 같은 양을 나타내는 상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등등. 그러나 이 반대 의견은 논점을 벗어나고 있다. 실제로 설탕 1파운드는 설탕 1파운드와 결코 같지 않다. 좀더 세밀하게 측정하는 저울은 언제나 이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여기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설탕 1파운드는 자기 스스로와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의견도 사실과는 다르다. 모든 물체의 크기, 무게, 색깔 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체들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여기에 대해서 궤변가는 이렇게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는 "특정 순간에"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다. 이 "공리"의 지극히 의심스러운 실제적 가치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 공리는 이론적인 비판에 견딜 수 없다. "순간"이란 말을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약 이 순간이 극미한 시차라면 설탕 1파운드는 이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순간"이란 것이 0시와 같이 순전히 수학적인 추상적 개념은 아닌가?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존재 자체가 곧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의 기본 요소이다. 따라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즉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이러한 "세세한 논리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논리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모든 지식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오류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공리는 특정 한도 내에서만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의 양적인 변화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에서 무시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공리는 인정될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를 거래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태양의 온도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주 최근까지 달러화의 구매력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특정 한도를 넘어선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바뀐다. 물이나 등유에 담긴 설탕 1파운드는 더 이상 설탕 1파운드가 될 수 없다. 회사 사장이 가지고 있는 1달러는 단순한 1달러가 아니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된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점을 제때에 파악하는 것은 사회학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 분야가 해결해야할 중요하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원추형 베어링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는 인정된다. 그러나 이 오차는 정해진 한도를 넘어서면 안된다. 이 오차 허용치 안에 들어오는 원추형 베어링은 모두 같은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이 오차 허용치를 넘어서면 양은 질로 나아간다. 즉 원추형 베어링은 품질이 떨어지거나 아주 못쓰게 된다. 과학적 사고는 기술 분야 등과 같은 실제 활동에서 사용되는 사고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형식 논리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한다는 공리는 변증법적 논리의 출발점이다. 이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서 정해지는 "오차 허용치"가 개념들을 규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상식"은 변증법적 "오차 허용치"를 체계적으로 초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사고 즉 상식은 자본주의, 도덕, 자유 , 노동자국가 등과 같은 개념들을 고정된 추상적 개념으로 보면서 논리를 전개한다. 이 결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같으며 도덕은 도덕과 같다는 식으로 가정한다. 반면에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갑"은 더 이상 "갑"이 아니며 노동자국가는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되지 않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한도를 결정한다.

일반적 사고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실이 남긴 고정된 흔적에 만족하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일반적 사고방식이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좀더 면밀한 파악, 교정, 구체화 등을 통해 개념들에게 풍부한 내용과 신축성을 부여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현상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개념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즉 일반적인 의미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 발전단계의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일반적인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포위된 후진국 러시아의 노동자국가를 제시한다.

변증법적 사고와 일반적 사고의 관계는 움직이는 화상과 정지된 사진의 관계와 같다. 움직이는 화상은 정지된 사진의 법칙을 넘어서지 않는다. 다만 정지된 사진들을 운동의 법칙들에 따라 결합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삼단논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삼단논법들을 결합시킨다. 헤겔은 [논리학](Logic)에서 일련의 법칙들을 수립했다. 양의 질로의 전화, 모순을 통한 발전, 가능성의 불가피성으로의 전화 등등. 단순 삼단논법이 좀더 기초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만큼 변증법적 법칙들은 이론적인 사고를 위해 중요하다.

헤겔은 다아윈과 맑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이 사상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한 덕분에 헤겔은 과학의 일반적 발전과정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비록 천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첫걸음이었기 때문에 이 첫걸음은 헤겔에 의해서 관념적인 성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궁극적 현실로 잘못 바라보았다. 그러나 맑스는 이 관념적 그림자들의 운동이 물질세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변증법 앞에 유물론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이유는 이 사고 방식의 뿌리가 하늘나라나 "자유의지"라는 심오한 영역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 즉 자연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의식에서, 심리학은 생리학에서, 유기 세계는 무기 세계에서, 태양계는 성운으로부터 나왔다. 물질의 모든 발전단계에서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탈바꿈했다. 변증법적 사고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사고는 변화하는 물질의 표현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물질환경 내에서는 신 , 악마, 불멸의 영혼, 법과 도덕의 영원한 기준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의 변증법은 자연의 변증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철저하게 물질적 성격을 띤다.

다아윈은 종의 진화를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함으로써 유기체 분야 전체에서 변증법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구가했다.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모한다는 사실과 원소 주기율표가 발견된 것도 역시 변증법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했다.

사회과학에서와 같이 자연과학에서도 분류의 문제는 종과 원소 등의 변모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8세기에 창안된 린네(Linn )식 체계는 종의 불변성에 기초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외형적 특징에 따라 식물들을 묘사하고 분류하는 데에 머물렀다. 식물학의 유아기는 논리학의 유아기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사고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처럼 변화 발전하기 때문이다. 종이 불변한다는 사고가 결정적으로 반박되고 식물 진화의 역사와 식물 해부학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과학적 분류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다아윈에 비해 맑스는 의식적으로 변증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생산력의 발전과 소유관계의 구조를 통해 인간사회를 과학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의 기초를 발견하였다. 그는 현재까지도 대학사회에서 풍미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대개의 분류법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분류법을 창안하였다. 노동자국가의 개념과 이 국가의 붕괴 순간은 맑스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에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자만에 가득 찬 무식한 인물들은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는 현대의 과학 사상을 통해 운동의 법칙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투쟁은 까마득한 과거, 쁘띠부르조아의 보수주의, 대학교 분위기에 물든 인물들의 자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희망의 깜빡거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소련의 사회 성격

버넘 동지는 소련이 "노동자국가도 아니며 부르조아국가도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규정으로서 역사발전의 고리에서 강제로 떼내어져 허공에 매달린 규정이다. 그리고 사회학의 어떤 요소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모순적인 역사 현상 앞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이론적 투항을 한 것과 같다.

버넘 동지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탐구했을 것이다: (1) 소련은 어떤 역사 과정을 통해 탄생했는가? (2) 그동안 이 체제는 어떤 변화들을 겪었는가? (3) 이 변화들은 양적인 단계에서 질적인 단계로 나아갔는가? 즉 이 변화들은 새로운 착취계급에 의한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지배체제를 탄생시켰는가? 이 문제들에 답했더라면 버넘은 소련이 여전히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성립가능한 이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변증법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마술의 열쇠가 아니며 구체적인 과학적 분석을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 분석을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이끌어 준다. 그래서 주관주의와 스콜라주의라는 사막에서 무미건조하게 방황하는 것을 확실하게 막아준다.

브루노 알은 소련과 파시스트 국가들을 "관료적 집산주의"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소련,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정권은 모두 관료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경제 영역에는 계획의 원리가 존재한다. 어느 경우에는 사적 소유가 청산되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적 소유가 제한되었다, 등등. 따라서 역사적 기원이 서로 다르고 구체적인 비중이 서로 다르고 계급적 의미도 서로 다른 일부 외적인 특징들이 상대적으로 비슷하다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리고 이 결과 이 나라들의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이런 분석 방식은 어떠한 계급적 성격도 고려하지 않은 채 "통제 경제", "중앙집중적 국가"라는 범주를 창안하는 부르조아 교수의 분석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다. 브루노 알과 그의 추종자들 또는 버넘과 같은 반(半) 추종자들은 사회 분류법의 영역에서 헤겔, 다아윈, 맑스의 확실한 전세대에 속하는 린네와 기껏해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소련의 사회 성격은 "중요하지 않다"며 우리 정책의 방향은 "전쟁의 특징"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절충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아마 브루노 알과 같은 부류보다 더 나쁘고 더 위험한 자들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전쟁이 마치 사회를 초월한 독립적 현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성격이 지배계급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배계급은 국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사회적 요인이다. 이 동지들이 거대한 사건들의 충격 속에서 맑스주의의 근본 원리마저 이렇게 쉽게 잊어버릴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변증법적 사고를 거부하는 소수파 이론가들이 소련의 모순적 성격 앞에서 한탄스럽게 굴복하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혁명에 의해서 구축된 사회적 기초와 혁명의 퇴보로 인해 등장한 지배집단의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아주 크다. 그러나 이 모순은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관료집단을 타도하고자 하는 우리의 투쟁은 이 모순에 근거하고 있다. 보나파르트 파벌인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해 소련의 사회적 기초를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일부 초좌익들은 확신하고 있다. 이들은 황당무계의 최종 단계에 이미 도달했다! 10월 혁명에 의해 건설된 사회적 기초를 무시한 채 이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소련이 파시스트 국가라고 확신하고 있다.  

진화와 변증법

버넘 동지는 자신이 진화론자이며 우리 변증법 옹호자들만큼 사회와 국가형태의 발전 과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아윈 이래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진화론자"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진정한 진화론자라면 진화론을 자신의 사고 형식에 적용시켜야 한다. 진화론 자체가 아직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창시된 초보 논리학은 진화 과정들을 분석하는 데 확실히 불충분하다. 헤겔의 논리학은 진화의 논리학이다. "진화"의 개념 자체가 대학 교수들과 자유주의 저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하고 근본 정신이 희석되어 이제는 평화적인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진화는 적대적 세력들의 투쟁을 통해 진행되며 일정 시점에서 변화의 완만한 축적은 사물의 껍질을 깨뜨리고 파국과 혁명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진화의 일반법칙들을 사고 자체에 적용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은 속류 진화론자와 구별되는 변증법 옹호자이다. 피아노 연주자가 손가락 운동을 하듯이 혁명 투사에게는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문제들을 움직이지 않는 범주들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속류 진화론자들은 특정 영역에 대해서만 진화를 인정하는 선에서 머문다. 그리고 이외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식"이라는 뻔한 말들만 늘어놓는 것에 만족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는 소련의 존재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소련 관료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최소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있기 전까지는 소련 체제가 대체로 "진보적인 것"이며 관료집단의 혐오스러운 특징들은 ("이것들은 원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점차 탈각되어 평화적이며 고통이 없는 "진보"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소련의 내부 모순들과 동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소련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점에서 속류 쁘띠부르조아 급진주의자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와 비슷하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점령한 후 이제 핀란드를 점령하자 속류 급진주의자들은 승리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방법론이 그 올바름을 증명받았다! 그러나 점령군 당국이 점령지 인민들에게 지주와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권유했을 때 이들은 이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관료적-군사적 방식으로 수행된 사회의 혁명적 조치들은 우리의 변증법과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한 우리의 규정을 반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규정의 올바름을 논란의 여지없이 입증시켰다. 이러한 맑스주의 분석의 승리를 참을성 있는 선동으로 활용하는 대신에 이들은 범죄행위에 속하는 경박함을 드러내며 사건들이 우리의 예상을 거부했으며 우리의 분석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으며 새로운 용어들이 필요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무슨 용어들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소련의 방어

우리는 철학에서 시작하여 이제 사회학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겼다. 그런데 이 두 영역에서 소수파의 두 지도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은 반(反) 맑스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또 한 명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음이 명백해졌다. 이제 정치 특히 소련 방어의 문제를 다룰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정도의 커다른 놀라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소수파는 우리 강령의 입장인 "무조건적 소련 방어"가 "애매하고 추상적이며 시대에 뒤진(!?)" 것임을 발견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미래의 어떤 "조건들" 속에서 혁명의 성과들을 기꺼이 방어할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새로운 입장에 최소한 약간의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 결과 적군(赤軍) 과 비밀경찰을 도구로 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추구한 국제정책을 그동안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혔다! 사실 이미 오랫동안 우리는 소련 관료집단을 봉기를 통해 타도할 필요성을 특히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후 조건적으로라도 관료집단의 국제정책을 방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소수파의 잘못된 노선은 지금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임무들을 갈갈이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노선마저 거짓으로 윤색하고 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렸으며 이미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버넘과 섁트먼은 환멸을 느낀 지식인 집단을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The League of Abandoned Hopes)"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한 후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이 군사적으로 대결할 때 이 한심한 동맹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집요하게 물었다. 이들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히틀러나 일본 또는 영국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소련을 방어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훅(Hook), 이스트먼, 리용(Lyons) 등이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선언할 것을 이 기회를 빌어 요구한다 등등 " 버넘과 섁트먼은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않았고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들을 명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이 동맹 역시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을 선언할 것인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 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할 것인가?" (강조는 인용자) 놀라자빠질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강령이 선언하는 바이다. 1939년 1월 버넘과 섁트먼은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입장을 지지했으며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방어를 한다고 완벽하게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스페인 혁명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에 작성되었다.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보여준 범죄적 정치행동은 폴란드나 핀란드에서의 경우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 했다고 캐넌 동지는 아주 올바르게 표현했다. 전자의 경우 소련 관료집단은 교수형 집행인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목을 매달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관료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런데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이 선언한 입장으로 왜 갑자기 돌아섰는가? 왜? "사건들의 구체성" 때문이라고 섁트먼은 지극히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설명다운 설명이 아니다. 그러나 설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스페인 공화군 진영에 참여함으로써 소련은 전세계 부르조아민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스탈린의 행동은 똑같은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미친듯한 비난을 받았다. 버넘과 섁트먼은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의 여론에 동조했을 뿐이다. 이것이 진짜 설명이다. 온갖 시끄러운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소수파의 입장은 당내에서 "좌파"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사실은 불행하게도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뭔가 `참신한' 것을 통해 운동에 공헌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험들에 비추어 자신들을 다시 평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거부하는 `교조주의자'(`보수주의자'? - 필자)는 아니라는 것 등을 믿으며 이 점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자기기만인가! 이들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사실들을 드러내거나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첨가하지 않았다." 이 두 동지들은 참으로 멋지게 글을 인용하고 있다!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 우리가 새로운 장(章 )을 하나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섁트먼 동지의 이러한 노력에 협력할 것을 나는 제안하는 바이다

노동계급의 대의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버넘과 섁트먼 과 같은 뛰어난 동지들이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의 별로 무섭지도 않는 신사분들에게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버넘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섁트먼이 방법론 자체를 경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올바른 방법론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 또한 모든 새로운 결론들을 이전의 결론들과 연속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에 이 결론들은 쉽게 기억에 남는다. 정치적 결론들이 경험적으로 도출되거나 일관되지 못한 결론들이 일종의 장점으로 선언된다면 맑스주의의 정치 체계는 반드시 인상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너무나 많은 측면에서 인상주의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사태의 급격한 전환은 경험주의자-인상주의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표현을 구사하려는 불타는 열망을 드러낸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

소수파는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에 대해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아마 약간 수정만 하면 보르디가(Bordiga), 베레컨(Vereecken), 스니블릿(Sneevliet), 페너 브락크웨이(Fenner Brockway), 마르쏘 삐베르(Marceau Pivert) 등과 같은 기회주의자들도 이 문서에 서명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결코 이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 소련 관료집단의 특징들과 소련군이 "침략"했다는 사실들만을 담고 있는 이 문서는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은 핀란드와 소련을 같은 수준에 놓으면서 한치의 여지도 없이 "양국 정부와 군대들을 모두 비난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의 필자들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알아채리고서는 글 내용과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없이 느닷없이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 전망을 적용(!)시킬 경우 당연히(이 "당연히"란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제4인터내셔널은 핀란드와 소련의 각기 다른 경제관계들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진주처럼 빛난다. "구체적인" 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상황이란 군사적 상황, 대중의 정서, 양국의 서로 반대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체적인" 상황들이 어떻게 "고려될 " 것인지에 대해서 이 결의문은 조금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소수파가 전쟁과 관련하여 "양국 정부와 군대들 모두"를 똑같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군사적 상황과 사회체제의 차이들을 "고려할 "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의심할 여지없는 죄악을 벌주기 위해 이 결의문은 모든 색조의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과 같이 핀란드에 진주한 적군이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통제를 도입하면서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내일이면 스탈린 일당은 핀란드 노동자운동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가장 날카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대대적으로 촉진시키고 있으며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소수파 지도자들은 현재 핀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개념들과 고상한 감정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쟁은 내전에 의해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군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들과 같은 편이 되어 있다. 한편 핀란드 군대는 유산계급, 보수적 노동 관료층,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빈곤층에게 적군이 일깨우고 있는 희망은 국제혁명이 개입되지 않는 한 환상으로 끝날 것이다. 이들과 적군 사이의 협력관계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 일당은 곧 핀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핀란드 인민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핀란드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구체적인" 내전에서 제4인터내셔널의 "구체적인" 투사들은 어떤 "구체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가? 스탈린주의자들이 스페인 사회주의혁명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제4인터내셔널 투사들은 이들과 똑같이 공화국 진영에서 싸웠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행위를 더욱더 지지하면서 이들과 같은 진영을 형성해야 한다.

소수파의 발명가들은 과격한 어조로 자기 입장의 결함을 은폐한다. 이들은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딱지 붙인다. 과학에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다! 지금부터 금융자본의 대외정책과 대대적인 파괴적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의미를 명확히 하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교육을 시키는 일도 크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매우 성급한 스탠리 동지는 스탈린 관료집단이 동시에 독일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고함지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 문제를 다른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대체할 때에나 나올 수 있다.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은 모두 제국주의자들인가? 이러한 사고는 변증법이 아니라 상식에 의존하는 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다.

만약 내일 영국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인도인들에게 히틀러가 무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면 독일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 등으로 이 구체적인 히틀러의 행동에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독일 노동자들은 인도인들이 가능하면 빨리 무기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이 점이 스탠리 동지에게 아주 명확하게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가상적인 예가 될 뿐이다. 다만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파시스트 정부가 특정 상황 속에서는 (바로 다음 순간에 목을 졸라 죽이기 위해) 일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예를 사용했을 뿐이다. 가령 어떤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프랑스의 노동자혁명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소련의 관료집단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핀란드의 혁명운동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물론 내일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목졸라 죽이기 위해 지금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스탈린 지배집단에 의해 촉진되고 파괴되고 목졸려 죽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특정 사회혁명운동을 제국주의라는 잡동사니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은 이론적 정치적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제국주의" 개념을 고무줄 늘이듯이 늘이는 것은 참신한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현재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들의 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들도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자본가 계급의 목적은 너무도 명확하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소련의 팽창정책 사이의 사회적 모순을 지워버린다. 소유의 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진짜 제국주의를 돕는 것이다. 그러면 섁트먼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새로운 용어 사용법은 객관적으로 제4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적 용어로부터 이들을 멀어지게 하면서 "민주주의자들"의 용어 사용법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한다. 슬프게도 이러한 상황은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 여론의 압력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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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24 2005/10/0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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