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 Letter to Sherman Stanley] 셔먼 스탠리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스탠리 동지,

오브라이언 동지가 다수파에 합류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지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동지의 편지는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동지의 예전 글들에 비해서 이 편지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전원회의(plenum)에 관한 문서들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수파의 결의안이나 맥스 섁트먼 동지의 결의안도 그 내용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동시에 동지는 당에 "대재앙"이 임박했다고 확신하고 있소. 그런데 왜 "대재앙"입니까? 화해할 수 없는 두 입장이 제출된 것은 "대재앙"이 아니라 끝까지 정치투쟁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제출된 두 결의안이 제4인터내셔널 강령에 대해 뉘앙스(어감) 를 달리하고 있을 뿐 입장이 같다면 어떻게 이것이 동지의 말대로 무원칙한 노선 이탈 즉 대재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뉘앙스의 문제라면 다수파가 자신들이 원하는 어휘들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다수파 당신네들이 원하는 뉘앙스를 택했으므로 이것은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소."라고 외칠 경우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어느 편의 대재앙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동지는 스스로 "여타 파벌들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나에게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동지는 내가 보낸 논문 중 "한 페이지가 어떤 이유인지 빠져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책임있는 동지들에 대한 악의에 찬 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한 페이지는 이곳의 비서진이 유감스럽게도 실수를 해서 빠진 것입니다. 번역을 할 수 있게 이미 새로 완전한 사본을 보냈습니다.

퇴보한 "노동자 제국(workers EMPIRE)"에 대한 동지의 주장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첫날부터 적들은 볼셰비키들이 "짜르식 영토확장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비방했습니다. 심지어 제대로 된 노동자국가(sound workers state)도 영토를 확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이 노동자 국가가 영토를 확장할 경우 지리적 경계들은 대체로 짜르의 영토 확장 경계들을 답습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혁명이 지리적 경계까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을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는 영토확장이나 영토확장의 지리적 방향 때문이 아닙니다. 관료적이며 반혁명적인 영토확장 방식을 반대할 뿐입니다. 동시에 맑스주의자인 우리는 역사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짜르, 히틀러, 챔벌린 등 어느 누구도 점령지에서 자본주의적 소유를 철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령지에서 소련 관료집단이 실시하고 있는 사적 소유 철폐라는 대단히 진보적인 조치는 다른 이유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10월 혁명은 아직도 관료집단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압살되지 않았으며 관료집단은 특정 상황에서 제국주의 적들에 대항하여 진보적인 조치들을 취할 입장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진보적인 조치들은 관료집단의 전반적인 반혁명적 활동에 비하면 훨씬 덜 중요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관료집단을 타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동지들은 스탈린-히틀러의 불가침조약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스탈린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세력이 미약하며 마음대로 즉시 크렘린 관료집단을 타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 동지들은 순전히 말을 통해서라도 만족감을 느끼려 합니다. 그래서 숙청당한 관료에게 스탈린이 레닌훈장을 박탈하듯이 소련에게 노동자국가라는 이름을 박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 유치합니다. 맑스주의자의 사회분석은 히스테리적인 반응과는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39년 10월 8일

동지적인 애정을 보내며

트로츠키

[4. Again and Once More on the Nature of the USSR]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해서 다시 또다시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

일부 동지들 그리고 브루노 알과 같은 과거 동지들은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토론과 이 결과 도출된 결정사항들을 까먹어 버렸다. 그러면서 소련에 대한 나의 견해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 가담한 바 있다. 그래서 소련을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면 자신이 일생을 바친 대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등. 대단히 명민한 정신분석학의 시조 프로이트(Freud)라면 이런 식의 말을 늘어놓는 사이비 정신분석가들에게 귓방망이를 날렸을 것이다. 내 자신은 이런 폭력을 행사할 천성이 결코 없다. 그러나 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사이비 정신분석가들은 대단히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인물들임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히 확신시키고자 한다.

스탈린 정권의 비열하고 냉소적인 행동은 모든 정도를 초월할 정도로 지독하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가들 모두에게 혐오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혐오감은 거부반응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해 즉각 행동으로 나설 힘이 없을 경우 참을성이 없는 혁명가들은 인위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항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테러행위가 하나의 전술로 채택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자주 나타나는 행위는 강한 어조의 표현, 모욕, 저주 등이다. 그리고 어떤 동지들은 "용어(terminological)" 테러에 의존하여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백분 이해하지만 관료집단을 계급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이다. 만약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이 계급이라면 이 집단은 역사의 사산아가 아니라 당당한 적자가 될 것이다. 약탈적인 기생행태가 "착취행위"라고 한다면 관료집단은 특정 경제체제를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지배계급이며 역사적 전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참을성이 없는 혐오감이 맑스주의 이론의 규율과 스스로 단절하면서 이제 막다른 골목으로 나아가고 있다!

깡패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자동차를 몰며 험한 길을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사고가 나고 이들은 체포되었다. 이제 감정이 격한 자동차 정비공이 이들이 타고 달아났던 자동차를 검사하고 있다. 차체는 찌그러졌고 차바퀴는 제멋대로 비뚜러졌다. 그리고 엔진도 일부 파손되었다. 이것을 보고 그는, "이것은 자동차가 아니야. 괴물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기술이나 과학의 측면에서는 가치가 전혀 없지만 깡패들의 행동에 대한 정비공의 정서적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괴물같은" 이 물체를 정비공이 고쳐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이 괴물이 손상된 자동차라고 생각한 후 고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느 부품이 상태가 좋으며 어느 부품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지를 결정한 후 일을 시작할 것이다.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소련을 바라볼 것이다. 관료집단이라는 깡패들이 노동자국가를 "괴물"로 변모시켰다고 말할 권리가 그에게는 완전히 있다. 그러나 일단 격한 반응을 거두고 정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에는 자기 앞에 놓인 소련이 손상당한 노동자국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동자국가의 엔진인 경제는 손상을 입었지만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으며 일부 부품들만 교체하면 완전히 원상 회복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비유이다.  

"반혁명적인 노동자국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소련을 노동자국가라고 계속해서 인정할 경우, 반혁명적인 노동자국가라는 새로운 범주를 설정해야 한다." 이 논리는 훌륭한 강령적 기준을 지극히 부정적인 현실에 대비시켜 우리의 상상력에 충격을 가하려 한다. 그러나 1923년 이래 소련이 국제적으로 더욱더 반혁명적인 역할을 자행한 바를 매일 보지 않았는가? 중국 혁명, 1926년 영국의 총파업, 그리고 아주 최근의 스페인 혁명을 잊었단 말인가? 완전히 반혁명적인 노동자 인터내셔널이 두 개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를 비판하는 인사들은 이러한 "범주"를 잊어버린 모양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의 노동조합은 자국 부르조아계급의 반혁명적인 정치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동조합의 진보적인 조치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자본가 계급에 대항해서 이들 조직들을 방어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반혁명적인 노동자국가에 대해서는 왜 똑같은 태도를 보일 수 없는가? 결국 노동자국가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동조합과 같다. 노동자국가와 노동조합에 대해서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다. 노동조합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현실로 인정하는 실체이다. 반면에 노동자국가를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강령적 "범주"로만 이해하는 한계에서 우리가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

현재 소련이 자신의 영향권을 확장하는 현상을 보고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우선 제국주의라는 용어의 사회적 내용을 확실히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로마의 "제국주의",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에 기초한 제국주의,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제국주의, 짜르 왕정의 제국주의 등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다. 권력, 권위, 재력을 확대하려는 경향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련 관료집단의 원동력이다. 이것은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넓게 규정짓는 요소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왕정, 과두정, 지배계층, 중세 신분계급 등은 모두 이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특히 맑스주의 서적에서는 제국주의가 금융자본의 팽창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이제 매우 정확히 규정된 경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소련 관료집단이 추구하는 대외정책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제국주의적"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럴 경우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정책을 독점자본의 정책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 두 현상은 팽창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두 군사력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공통점이라면 유일한 공통점이다. 이렇게 두 현상을 동일하다고 인정할 경우 남는 것은 혼란뿐이다. 그리고 이 혼란은 맑스주의자보다는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에게나 어울린다.  

짜르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

현재 소련은 폴란드의 새로운 분할에 가담하고 있으며 발트해, 발칸반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지로 손을 뻗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련은 짜르의 제국주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규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역사지리적 논리는 다른 어떤 논리들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다. 짜르 제국의 영토에서 성공한 노동자혁명은 애초부터 발트해 국가들을 정복하고자 시도했고 한때 정복한 적이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와 페르시아를 침공하려 했으며 어떤 때에는 군대를 바르샤바까지 진주시켰다(1920년). 이 혁명의 팽창은 짜르 제국의 팽창과 지리적으로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혁명이 지리적 조건들까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멘셰비키들은 볼셰비키들이 짜르의 외교정책을 똑같이 물려받아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지금도 기꺼이 이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논리를 그대로 모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제국주의 세력의 하수인이라고 ?

그러나 소련의 팽창정책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소련이 독일 제국주의를 원조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선 확실히 할 것이 있다. 심지어 완전히 건강한 노동자국가도 특정 상황에서는 이러 저러한 제국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세계제국주의의 고리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은 프랑스와 영국에 대항하여 일시적으로 독일 제국주의를 강화시켰다. 고립된 노동자국가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책략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책략이란 일시적으로 어느 제국주의 국가를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해서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순간에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며 덜 위험한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계산과 예측의 문제이다. 이러한 책략이 불가피하게 야기할 약점은 고립된 노동자국가가 이 책략을 통해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보상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책략을 써야하는 상황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소련 정부는 노동자국가를 살리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희생시켰다.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우크라이나에 대해 배신행위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계급의식을 보유한 모든 노동자들은 이 희생이 상황에 의해서 강요되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문제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스탈린 정권은 폴란드를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은 냉소적으로 폴란드 병합을 자랑했고 이로서 전세계 피억압 계급과 민족들의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감정을 건드렸다. 이 결과 소련의 국제적 입장은 대단히 약화되었다. 적군 점령지역이 집단적 소유로 탈바꿈한 경제적 효과도 이 정책이 가져온 해악의 10분의 1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소련의 대외정책은 제국주의 "우방"국들의 이익을 야바위꾼처럼 거들어주는 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로서 부차적이며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세계노동운동의 근본 이해가 희생되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의 방어"라는 구호로 5년 동안 노동자들을 속인 후에 소련은 현재 히틀러의 약탈 정책을 덮어주는 일에 골몰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현재 제국주의의 가장 가치있는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포위당한 퇴보한 노동자국가, 그리고 이 노동자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정책, 바로 이것이 소련의 대외정책을 정확히 규정한 말이다. 이것은 "(소련의) 제국주의 정책"만큼 발음하기가 좋지도 않고 짧지도 않지만 대신 더 정확한 규정이다.  

"차선책"

적군이 동부 폴란드를 점령하는 것이 나찌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는 것보다 더 낫다. 그러나 이 차선책도 히틀러가 더 커다란 해악을 미치도록 스탈린이 보장한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집에 불을 놓거나 놓는 것을 도운 후에 생존자들을 종으로 삼기 위해 집안에 있는 10명 중 5명의 목숨을 구해주고 나중에 종으로 만들었다면 10명 모두를 태워 죽인 것보다는 더 나은 행위이다. 그러나 이 방화범이 인명을 구조했다고 메달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메달이 그래도 수여되어야 한다면 메달을 수여한 후 곧바로 이 자를 사형시켜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어느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무장한 선교사들"

사람들은 총칼을 든 선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로베스삐에르가 한때 말한 적이 있다. 즉 군사적 폭력을 통해 혁명 사상과 제도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올바른 사고는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을 돕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이 혁명적 국제정책의 일환이라고 세계 노동자들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혁명군대가 진주하는 나라의 근로인민이 이 군사적 개입을 원해야 한다. 적극적 국제연대는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당연히 이것마저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스탈린 정권은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노동계급의 생각과 정서와는 완전히 별개로 군사적 개입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이 때문에 최근에 달성된 소련의 외교적 "성공들"은 소련의 이익을 아주 망쳐버렸으며 국제노동계급에게 극심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두 전선에서의 봉기

그렇다면 소련과 적군 점령지역에 대한 방어 노선은 올바른가? 이렇게 어느 동지들은 묻는다.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에게 대항하는 폴란드 노동자-농민의 봉기를 촉구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을까? 당연히 이것은 아주 매력적인 선택이다. 만약 혁명이 독일과 소련 그리고 양국 점령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면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책은 가장 유리한 상황에만 기초할 수는 없다. 혁명이 스탈린을 타도하기 전에 히틀러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럴 경우 제4인터내셔널의 동지들은 스페인에서 프랑코에 대항하여 공화군과 함께 전투를 벌인 것처럼 히틀러의 군대에 대항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스탈린은 물론 히틀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기를 충심으로 원한다. 그러나 이 독립이 쟁취되기 전에 우크라이나를 히틀러가 점령하려 한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명확하다. 히틀러에 대항해서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방어해야 한다.  

"무조건 소련을 방어하라"

"무조건" 소련을 방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련 관료집단에게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소련을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쟁의 동기와 원인에 관계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직면한 소련의 사회체제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동지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일 적군이 인도를 침공하여 그곳의 혁명운동을 진압할 경우 이 조치를 지지해야 하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일관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우선 왜 인도가 예로 들먹거려지는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더 단순 명료하다: 만약 적군이 소련 관료집단에 대항하는 노동자파업이나 농민의 항거를 위협한다면 우리가 적군을 지지할 것인가?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이다.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도구인 적군의 모든 행동을 우리가 지지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결코 없었다. 노동자국가인 소련 그리고 노동자국가에 속하는 것들만을 방어한다고 약속했을 뿐이다.

능란한 궤변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적군이 달성하는 "작업"의 성격에 관계없이 적군이 인도의 봉기 대중에게 패배한다면 결과적으로 소련이 약화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도 혁명운동의 압살에 적군이 일조할 경우 적군이 일시적으로 이 운동에 의해 패배하는 경우보다 소련의 사회체제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해를 입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적군이 오직 보나파르트 반동집단의 도구로서 행동하며 언제 어디서 소련의 사회체제를 방어하는지를 제4인터내셔널은 모든 경우에 알아낼 것이다.

반동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노동조합이 특정 산업분야에서 흑인의 고용을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한다고 치자. 이런 수치스러운 파업을 우리가 지지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파업 상황을 이용하여 고용주가 노동자의 조직적 자기방어 기구인 노동조합을 압살하려고 시도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럴 경우 반동적인 지도자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연히 노동조합을 방어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정책을 소련에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기본 규칙

모든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 정당은 전쟁 기간에 권력 장악을 목표로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은 자국이 소련과 동맹관계에 있든 적대관계에 있든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의 확고한 규칙이다.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소련이나 식민지 혁명의 이해를 방어하는 일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말로 필요할 경우 파업, 태업과 같은 가장 단호한 행동들을 조직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이 이 규칙을 정한 이후 강대국들 간의 동맹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규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일 당장 프랑스와 영국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위협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 노동자들은 군대와 보급품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가장 단호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상황의 논리에 의해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군수품을 보내야 할 경우 독일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 등 방해공작을 가할 이유가 없다.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

[전쟁에 돌입한 소련]이라는 글에서 필자는 "관료적 집산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이 이론상 존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일부 동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이것이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수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맑스주의자에게 역사적 필연은 숙명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는 "저절로" 실현되지 않으며 오직 살아 움직이는 세력, 계급, 정당들의 투쟁의 결과 실현된다. 노동계급은 역사적 진보를 대표하며 반면에 부르조아 계급은 반동과 쇠퇴를 체현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은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반동 세력이 사태를 장악한다면 사회는 어떤 성격을 띨 것인가?

맑스주의자들은 수많은 경우에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사회주의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인류는 야만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승리하는 "경험"을 접한 후 우리는 이렇게 수천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공산주의가 아니면 파시즘뿐이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일반적인 역사적 구도에 의한 예측보다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이질적이며 모순된 경로를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의 사멸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관료적 퇴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퇴보를 관찰하고 분석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맑스주의의 수정인가?

사회주의 혁명이 지연될 경우 고질적인 실업, 쁘띠부르조아의 궁핍화, 파시즘,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떠한 새로운 전망도 열어주지 못한채 인류를 멸망시키는 전쟁과 같은 야만적인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 왔다. 인류가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못할 경우를 이론적으로 인정한다면 새로운 "야만상태"는 어떤 정치적 사회적 모습을 띨 것인가? 우리는 맑스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과 소련의 퇴보는 신야만상태의 사회적 정치적 형태들을 개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주의냐 아니면 전체주의적 노예상태이냐 하는 문제는 이론적으로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선동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비자본주의적"이며 "비노동자적"인 새로운 국가 유형을 제시하는 동지들이야말로 맑스주의를 수정하고 있다. 필자의 대안은 이들 동지들이 스스로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동지들은 스스로의 결론에 놀라서 필자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한다. 필자는 이 비난을 우정어린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혁명을 낙관할 권리가 있다

[전쟁에 돌입한 소련]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증명하려고 했다: 비노동자적이며 비자본주의적 착취체제인 "관료적 집산주의"는 국제노동계급의 완전한 패배와 쇠퇴를 전망하고 있으며 가장 심오한 비관적 역사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망을 가질 진정한 이유들이 존재하는가? 우리 계급의 적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부질없는 짓은 아니다.

잘 알려진 주간 잡지 [빠리 석간](Paris Soir)은 1939년 8월 31일자 발간호에서 프랑스 대사 꿀롱드르(Coulondre)가 8월 25일 히틀러와 가진 마지막 회견 내용을 싣고 있다. 이 회견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다. (정보의 근원은 꿀롱드르 자신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맺은 조약("현실적인 조약")에 대해 자랑하면서 프랑스와 독일 군대가 서로 피를 흘릴 것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꿀롱드르는 이렇게 이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중적인 책략을 멋지게 구사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진정한 승리자는 트로츠키입니다. 이 점을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히틀러 총통이 대답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왜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에게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부여했소? 등등"

이 신사 양반들은 혁명의 유령에게 개인의 이름을 붙여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외교관계가 단절된 바로 이 순간 이 점은 극적인 대화의 핵심이 아니다. 뼈 속까지 오싹해진 제국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 사절 꿀롱드르는 히틀러에게 이렇게 겁준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혁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문제인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고 있소."

아주 놀랄만한 대화 내용임에 틀림없다! 꿀롱드르와 히틀러는 둘 다 유럽에 등장한 야만상태를 대표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야만체제가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세계의 모든 자본주의 지배자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의 완전한 사기침체는 계급 역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노동계급은 어리며 아직도 유약한 혁명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르조아 계급의 지도부는 발밑이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다.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초입에 이들 신사 양반들은 미리 자신들의 사회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혁명의 성공을 낙관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1939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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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20 2005/10/0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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