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문제"

소수파 동지들은 더욱 빈번하게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 문제는 그 자체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당운영 방식의 변화는 지도부의 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캐넌과 그의 협력자들을 지도적 직책에서 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섁트먼과 여타 동지들이 노선 변화의 이유로 제시한 "사건들의 구체성" 보다 "캐넌 분파"에 반대하는 경향이 먼저 존재했다. 여러 시끄러운 소수파의 목소리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목소리들은 과거 시간과 이유를 달리하며 지도부 반대 투쟁을 수행한 바 있다. 그리고 원칙에 기반한 투쟁의 근거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소위 "당운영 문제"로 화두를 돌렸었다. 몰리니에, 스니블릿, 베레컨, 여타 많은 동지들이 했던 행동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러한 전례들이 아무리 혐오스럽다 할지라도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직 문제"로 분파투쟁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단순한 "책략"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아니다. "러시아 문제"뿐만 아니라 당건설 방식 등 일반적 정치문제들에 대한 접근방식 그 자체에 쟁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록 대단히 혼란스럽게나마 소수파의 진실된 속마음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또한 러시아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소수파의 사고방법에 쟁점이 이루어질 부분이 더 많다. 우리는 이 사실을 증명하려 한 바 있다. 소수파는 현재 쁘띠부르조아 정서와 경향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용주의를 택한 버넘과 절충주의를 택한 섁트먼의 경우에서 노동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우리는 명확히 보았다. 에이번(Abern) 동지를 비롯한 그 밖의 소수파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이번 동지는 원칙에 입각한 토론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조직 문제"에 자신의 주장을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이번 동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버넘과 섁트먼은 소수파의 아마추어라면 에이번은 의심할 여지없는 프로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공산당에서 탈퇴하여 미국 내 "좌익반대파"의 독자적 존재를 시작한 전통 깊은 그룹을 에이번 동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의별 이유로 다수파를 비판하며 불만을 토로하는 동지들 모두는 이 그룹에 결집되어 있다.

모든 심각한 분파 투쟁은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계급투쟁의 상황을 반영한다. 다수파는 애초부터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매여있다고 확언하였다. 이와 반대로 소수파는 자신의 쁘띠부르조아적 성격 때문에 적대 분파인 다수파의 사회계급적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소수파는 현재 아주 결정적인 시기에 당을 마비시키고 있는 격렬한 분파 투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분파 투쟁이 정당성을 인정받고 무자비한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당내에 아주 진지하고 깊은 기초가 확립되어야 한다. 맑스주의자에게 이 기초는 오직 계급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격렬한 투쟁을 개시하기 전에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했다: 전국 위원회 다수파는 어떤 비노동계급적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러나 소수파는 이러한 계급적 평가를 내리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조금도 없다. "보수주의", "오류들", "나쁜 방법론들" 그리고 이것들과 비슷한 내용의 심리적, 지적, 기술적 결함들만을 볼 뿐이다. 소수파는 소련의 사회 성격에 관심이 없는 것과 아주 똑같이 반대 분파의 계급적 성격에 관심이 없다. 이것만 해도 현학적 경향과 신문쟁이류의 인상주의 색조가 결합된 소수파의 쁘띠부르조아적 성격이 충분히 증명된다.

분파 투쟁에 어떤 계급이나 계층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싸우는 분파들의 역사를 따질 필요가 있다. 소수파의 몇몇 동지들은 현재 진행 중인 분파 투쟁이 옛날의 분파 투쟁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들이 당의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피상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소수파의 근간은 3년 전에 마스티(Muste)와 스펙터(Spector)를 주위로 결집한 핵심 당원들이다. 다수파의 핵심은 캐넌을 중심으로 결집한 핵심 당원들 그대로이다. 주요한 인물 중에서 섁트먼과 버넘 만이 편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개인들의 편바꿈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두 분파의 전반적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여기서 분파 투쟁의 역사적 궤적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조지프 헨슨(Joseph Hansen)동지가 쓴 "조직 방식과 정치적 원칙(Organizational Methods and Political Principles)"이라는 논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글은 모든 측면에서 훌륭한 글이다.

우연적, 개인적, 일화적 측면들을 모두 없애고 현재의 분파들을 근본적 정치유형들로 환원시킨다면 당연히 에이번 동지와 캐넌 동지 사이의 투쟁이 가장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쁘띠부르조아적 계급구성과 함께 오랜 개인적 연줄로 결합되어 가족과 같은 특성을 가진 선전 그룹을 에이번이 대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캐넌은 형성 과정에 있는 노동자 정당을 대표하고 있다. 그동안 있어왔던 오류와 실수들을 논외로 한다면 이 투쟁에서 역사적 정당성은 전적으로 캐넌 진영에 있다.

소수파 동지들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끝까지 사고해 보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지도부는 파산했다", "정치적 예상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건들의 전개에 대응하지 못했다", "구호들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등 격렬하게 비난했을 때 이들은 근본적으로 당 청산주의자들이었다. 새로운 임무와 새로운 당 관계들 앞에서 오래 된 선전그룹이 보이는 불편함과 공포심 때문에 이런 한심스러운 태도가 나온 것이다. 개인적 연줄이 내포한 감상적인 정서가 의무감과 규율감에 길을 내주지 않으려고 한다. 옛날의 파벌적 연줄을 청산시키고 선전그룹의 최상 분자들을 노동자 정당 안으로 해소시키는 것이 현재 당의 임무이다.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 문제가 아니다. 캐넌보다 에이번이 당을 지도할 경우 더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에 대한 충성심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어제 내가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에이번 그룹의 동지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수천 번 이 결론을 말한 바 있다. 언제나 나는 이 그룹의 쁘띠부르조아적 구성을 강조했었다.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끌어들일 능력이 없는 쁘띠부르조아 당원들을 당원 후보의 자격으로 강등시킬 것을 끈질기게 반복해서 제안한 바 있었다. 이후 연속되는 사건들이 증명했듯이 개인적 편지, 대화, 충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사람은 정말이지 아주 드물다. 당내 노동계급 부위와 쁘띠부르조아 부위 그리고 이 두 부위가 차례로 발전한 두 시기 사이에 적대적 대립이 축적되고 표면에 드러나면서 격렬한 분파 투쟁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지부와 인터내셔널 전체에 이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방법만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명확하며 최종적인 해결책이다. 러시아 속담에 의하면, "친구 사이는 친구 사이이고 임무는 임무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 당의 통합은 불가능한 것일까?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을 어떻게 노동계급적 경향과 화해시킬 것인가?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일면적이고 비변증법적이며 잘못된 판단을 가져온다. 현재 진행 중인 논쟁에서 소수파는 명확하게 쁘띠부르조아적 특징들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소수파의 특징이 이것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소수파 동지들의 대다수는 노동계급의 대의에 깊이 헌신하고 있으며 배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 쁘띠부르조아적 환경에 묶여 있다면 내일은 노동계급의 환경에 묶일 수 있다. 일관되지 못한 동지들은 경험을 통해 일관성을 더욱 연마할 수 있다. 당이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조직 안으로 끌어들이면 심지어는 전문적인 분파 활동가도 노동계급의 규율에 따라 스스로를 교육시킬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이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조직 분열, 축출 등과 같은 위협적인 발언을 금지하면서 논쟁을 진행하자는 캐넌 동지의 제안이 절대 올바르며 적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당이 전체적으로 소수파의 노선을 추종할 경우 완전히 파멸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점은 확실하다. 현재 소수파는 맑스주의적 지도력을 당에게 제공할 능력이 없다. 현재 다수파는 노동계급에 대한 당의 임무를 소수파보다 더욱 일관되고 진지하며 깊이 있게 대변하고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다수파는 분파 투쟁을 조직 분열로 몰고가려고 하지 않는다. 올바른 사상은 승리하게 마련이다. 소수파의 건강한 분자들도 역시 조직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 과거 경험에 의하면 제4인터내셔널로부터 이탈한 모든 종류의 급조된 그룹들은 정체와 파멸의 운명을 맞았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다음 당대회를 구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대회는 소수파의 반맑스주의적 발명품들을 거부하고 당의 단합을 보장할 것이다.  

1939년 12월 15일    

[11. A Letter to John Wright] 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핸슨 동지에게 보낸 동지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당내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해서 단호하고도 비타협적인 이론적 정치적 투쟁을 전개할 필요성을 주장한 동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의 최근 논문이 항공우편으로 내일 그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 나는 소수파의 편향을 다수파 동지들 보다 더욱 날카롭게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타협없는 이론적 투쟁은 아주 조심스럽고 지혜로운 조직적 전술과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다음 당대회에서 현재 소수파가 다수파가 되어 당기구를 장악해도 절대 조직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이질적이며 불안정한 소수파가 조직을 분리시킬 빌미를 조금도 주면 안됩니다. 결국 소수파로 남는다 하더라도 당에 대한 규율과 충성심을 간직해야 합니다. 당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을 교육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캐넌 동지는 언젠가 편지를 통해 이것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현재 소수파가 다수파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그 수명은 몇 달 못갈 것입니다. 그러면 당내 노동계급 경향은 엄청나게 강화된 권위를 획득하여 다시 다수파가 될 것입니다. 대단히 단호하면서 한편으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현재 당내 노동계급 경향은 이러한 면모를 보여야 합니다.  

1939년 12월 19일

최대의 동지적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추신 : (1) 특히 가장 중요한 뉴욕 지부 당원들의 계급 구성이 아주 불리합니다; (2) 사회당 청년부 출신 당원들이 특히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 두 요인으로부터 나쁜 결과가 나왔습니다. 과거로부터 유래한 이러한 어려움들을 긴급 처방으로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단호함과 참을성이 요구됩니다.    

[12. A Letter to Max Shachtman] 맥스 섁트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최근의 논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의 사본을 보냅니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소수파의 편향은 아주 결정적입니다. 동지는 바리케이트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동지는 모든 쁘띠부르조아 및 반(反) 맑스주의 분자들에게 우리의 원칙, 강령, 전통에 대항해 싸우도록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동지를 설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 수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맑스주의적 분파와 협력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동지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동지의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동지와 48시간이나 72시간동안 중단 없이 토론하기 위해서 즉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습니다. 이 문제들을 나와 함께 토론하기 위해서 동지가 여기에 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만약 동지가 여기로 올 필요성을 느낀다면 참으로 기쁘겠지만  

1939년 12월 20일

레온 트로츠키

[13. Four Letters to the National Committee Majority] 전국위원회 다수파 동지들에게 보내는 4 통의 편지   

동지들,

전국위원회 소수파는 [사회주의 호소](Socialist Appeal)와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에 논쟁과 관련된 자신들의 글이 실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이 요구에 지지를 보낼 의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버넘 동지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동지들이 아주 진지하게 반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호소]는 특별 토론위원회 산하의 토론의 장이 아닙니다. 당과 전국위원회 소관사항입니다. 당내 토론집에 대해 소수파는 다수파와 같은 정도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 당 출판물들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의 견해가 바뀔 때까지 기존의 견해를 옹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식 출판물에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은 전국위원회 다수파가 정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점은 너무도 자명하여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불셰비키 당은 소수파에게 영구적으로 토론의 자유를 법적으로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관행이 버넘 동지의 발명품인 것도 아닙니다. 바로 프랑스 사회당이 당헌을 통해 이러한 권리들을 오랫동안 보장했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시기심이 많은 문필가 집단이나 의회 파벌들의 정서에 전적으로 부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파벌들이 연합하여 당내 노동계급 경향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결코 저지하지 못합니다.

노동계급 전위당의 조직체계는 혁명 투쟁의 적극적인 요구들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조직의 퇴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는 소극적인 목적에 종속되면 안됩니다. 당이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당헌 조항들이 아무리 지혜로 충만해도 당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의 측면에 대해서 말하자면 버넘 동지는 혁명 정당의 개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합니다. 사소하면서도 아주 의미있는 다이즈 위원회(Dies Committee)와 관련하여 그는 정치적 측면에서 이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측면 모두에 대해 그는 순전히 소극적인 방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사회성격 문제에 대해서 그가 순전히 소극적인 규정을 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혐오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한 모든 실천적 결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버넘 동지는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린 실천적 결론이 무엇이냐고요?

첫째, 당의 강령을 당이 인정하지 않는 모든 발명품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당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지금 소수파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시도를 당 전체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전국위원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한 호 전체를 토론을 위해 열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당의 입장은 무엇이며 이 입장을 수정하려는 시도가 어느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독자들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 입장은 반대파가 아니라 다수파가 내린다는 사실도 독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을 제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셋째, 만약 당내 토론집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당대회 의안과 관련된 논문을 특별히 모아서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론에는 최대한 진실하되 쁘띠부르조아 및 무정부주의 정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1939년 12월 26일

레온 트로츠키

동지들,

논쟁과 관련이 있는 소수파의 논문들을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호소]에 게제할 것을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전한 이 소식은 일단 나를 놀라게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나는 이렇게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이 두 동지가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논지는 대단히 조잡합니다. 그리고 논지들 사이의 모순은 날카롭습니다. 이 동지들은 다수파가 혁명 전통과 맑스주의 원칙을 대표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이론 투쟁에서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섁트먼과 에이번뿐만 아니라 버넘도 이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널리 알리고자 안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민주적인 여론 앞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스트먼과 같은 자들, 훅과 같은 자들 그리고 여타 분자들에게 자신들이 다수파에 비해 질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외치고 싶어 안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버넘 동지에게는 이러한 내적 필요가 특히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10월 혁명 전야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그리고 애국전쟁 물결의 압력 하에 많은 "국제주의자들"이 보인 것과 똑같은 내적 투항입니다. 이들 동지들이 드러내고 있는 모든 개별적 특이성, 우연, 오해, 오류 등을 추상한다면 지금 당내에는 처음으로 애국주의적 타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여러 동지들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지도부나 삐베르(Pivert) 분파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자들과 같이 이 두 동지들은 자신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 만큼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널리 알리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소망이 공공연히 선언된 후에야 이 두 동지의 정체가 명확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정을 말하는 이유는 이 두 동지들에게 결코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힘을 더 보태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조건하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당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며 이 판결이 민주적 애국적 판사들에게 선언될 때까지 이 판결에 대해서 항소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 문제를 전에는 너무 추상적으로 즉 이론 투쟁의 측면에서만 고려하였습니다. 이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골드먼 동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치 상황을 더 넓게 보면 당내의 민주적 애국적 분자들의 성급한 개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수파는 다수파와 마찬가지로 토론에서 자신들의 힘에만 기대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수파 내부에 존재하는 개별 분자들을 실험하고 우리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사태 해결에 좀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당을 위해 좀더 바람직할 것이다.

언젠가 엥겔스는 화가 끝까지 난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서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정서는 현재 소수파 대오에서 적게나마 감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들의 많은 부분은 볼셰비키 전통이라는 최면술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통을 결코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으며 공개적으로 이 전통에 대해 감히 도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섁트먼과 에이번은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제 이들은 화가 끝까지 난 쁘띠부르조아의 정서를 공공연히 즐기고 있습니다. 스탠리 동지의 최근 논문들과 편지들에서 이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탠리 동지는 자기비판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당의 강령과 전통을 공격하는 모든 영감들이 그의 뇌리에 각인되자마자 이것들이 선언되고 인쇄될 가치가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쁘띠부르조아적 자기만족감이 폭발하도록 촉발한 점에서 섁트먼과 에이번의 죄악은 특히 무겁습니다.  

1939년 12월 27일

레온 트로츠키

추신 : 스탈린주의 첩자들이 토론을 격화시키고 조직의 분리를 촉발시키기 위해 우리 대오 내에서 활동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특별히 이 관점에서 여러 잡다한 분파에 소속된 "투사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동지들,

[전쟁과 관료적 보수주의](The War and Bureaucratic Conservatism] 그리고 [러시아 문제에 대한 논란에서 무엇이 쟁점인가](What Is at Issue in the Dispute on the Russian Question)라는 제목의 소수파 논문 두 편을 받았습니다. 전자는 이미 검토를 마쳤으며 지금 후자를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글입니까! 올바른 사고를 표현하거나 올바른 사고를 올바른 지점에 위치시킨 문장을 하나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머리도 명석하고 심지어는 재능이 있는 동지들이 명백히 틀린 입장을 가지고 골몰하더니 이제는 스스로를 더욱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에이번 동지는 "조직 분리"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회당에 입당하는 전술과 관련된 토론 과정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편에게 겁을 위한 것일 것입니다. 아니면 정치적 자살을 감행하기를 그는 정말 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라면 이들 소수파의 정치를 우리가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이들은 당연히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라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큰 어른이 자살하겠다는 데 막을 수 있겠습니까.

버넘의 대응은 모든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도전에 해당됩니다. 변증법이 일종의 종교이며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면 이 해독으로부터 자기 당을 구하는 투쟁을 어떻게 그가 거부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 버넘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 이론지의 편집자인 버넘은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경구를 던지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4인터내셔널의 여론이 호락호락 놓아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버넘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이 당과 제4인터내셔널 앞에 철저히 드러날 때까지 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공개서한의 러시아어 편이라도 내일 모래까지는 보내겠습니다.

동시에 위 두 논문에 대한 분석 논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문제에 대해 이들이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아주 훌륭합니다.

정말 낡아빠진 이 두 문서를 읽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이가 갈립니다. 이 글들에 드러난 오류들은 너무도 기본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맑스주의의 근본원리](the ABC of Marxism)에 실린 지금 필요한 주장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 지경입니다.  

1940년 1월 3일

레온 트로츠키

동지들,

지금부터 2주일도 더 전에 섁트먼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동봉합니다. 이 편지에 대해 그는 답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무원칙한 투쟁이 그에게 남긴 심정이 이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반맑스주의자 버넘과 동맹을 하고는 이 동맹에 대해 비판한 나의 편지들에 대해 답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그의 병 증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이유로 그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보냅니다.  

1940년 1월 4일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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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26 2005/10/0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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