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의 탈당은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인사들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사들의 탈당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1940년 5월 28일

레온 트로츠키

[33.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은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증법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습니다. 그가 섁트먼에게 가한 타격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원칙에 입각한 또는 그렇지 못한 동맹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이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번도 참 불쌍합니다. 4년전 그는 성부(聖父) 마스티와 복사(服事) 스펙터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속화된 카톨릭 신자 버넘과 그의 변호사 섁트먼을 대상으로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의 예상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년 혹은 수십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 사건이 진행하는 속도는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너무 빨라서 바로 다음날 우리의 예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섁트먼도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6월 5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4. On the " Workers " Party] " 노동자 " 당에 대해서  

질문 :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와 소수파는 조직을 분리할만큼 정치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트로츠키 : 이 경우에도 문제를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증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물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조직을 분리할만큼 크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 써클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노동계급과 멀어지는 경향을 소수파가 보였다면 이 사소한 정치적 차이는 완전히 다른 가치,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소수파는 노동계급과는 이질적인 다른 사회계급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다수파는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서 모든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는 결국 조직을 분리했습니다. 이것은 소수파의 내적 사회적 감정이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글을 보면 이 점을 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노동계급 혁명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강제적으로 혁명정당에 참여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참여하면 당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민에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자고 촉구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을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은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도구는 맑스주의 이론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것보다 더 좋은 도구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는 자기 연장에 대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연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이 연장을 버리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는 황당한 연장을 찾지도 않습니다.

버넘은 속물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나의 당에 들어갔다가 탈당하고 또 다른 당에 들어갑니다. 노동자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혁명정당에 가입하여 인민들에게 사상을 전파하고 이들의 행동을 촉구할 때 이 행위는 전쟁에 나선 장군의 행동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민을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총포가 질이 떨어짐으로 더 좋은 총포가 발명되기까지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장군이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이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버넘이 바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는 장군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업자들의 존재, 전쟁 등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로 남아있습니다. 이 현실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연기한 것은 버넘 혼자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는 속물은 아니지만 약간 멍청합니다.

그가 쓴 글을 여기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에 기여하려면 지식인은 자신이나 남을 속여서는 안된다. 가짜 동전으로 알면서 진짜 동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년과 수십 년에 걸쳐 배운 것을 위기의 순간에 잊어서는 안 된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여기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다."

소위 "노동자"당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고 수립하면서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맑스주의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다가오자 맥다널드는 "모든 이론을 회의하라"고 말합니다.그리고 맑스주의를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하지 않은 채 혁명에 헌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새로운 이론은 그 자신의 회의적인 이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없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대중의 투쟁은 무엇이며 혁명가는 무엇입니까? 그의 글 내용 전체는 경악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인사를 지도자로 허용할 수 있는 당은 진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라는 맹수의 성격은 무엇인가? 트로츠키는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낮익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느 파벌이 한 계급을 다른 계급과 싸우도록 이간질시키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일시적으로 독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전체주의 체제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근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켜 버렸다. 과거의 형태들을 조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내적 생명력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나찌 관료집단은 새로운 지배계급인가?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비견되는 새로운 사회형태인가? 이것도 역시 진실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고 파시즘을 새로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업에 사용하고 있는 연장은 중요하지 않지만 일에 대해서는 헌신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아주 거치른 말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의 글은 실망한 지식인을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과 앞으로 다가올 끔찍한 시대가 패배와 희생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의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도 회의와 혁명적 헌신이 통일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혁명이 합리적이며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혁명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이론이 없이는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론적 회의주의를 전파하는 자는 반역자입니다.

우리는 파시즘의 여러 요소들을 분석했습니다:

1. 국가권력에 가장 커다란 독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급들의 적대관계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파시즘은 옛날 보나파르트주의와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상승기에 존재한 반면 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쇠퇴기에 등장하는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언제나 강조해왔다.

2. 사적 소유를 제거하지 않은 채 새로운 기술과 사적 소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시도가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계획경제"는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구출하려는 시도이다.

3. 일국 내에 존재하는 새로운 현대 기술의 생산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파시즘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은 일국 내로 제한될 수가 없다. 결과는 전쟁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우리는 이미 분석했다.

버넘과 마찬가지로 드와이트 맥다널드도 당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가 약간 더 게으르므로 버넘보다 나중에 탈당할 것입니다.

한때 버넘은 "좋은 재목"이라고 간주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노동계급 정당은 당에 기여할 모든 지식인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운동을 위해 디에고 리베라를 구하려고 나는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 모든 인터내셔널들이 이런 종류의 경험을 거쳤습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아주 변덕스러웠던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reiligrath)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2 제3인터내셔널은 막심 고리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리베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들은 우리와 결별했습니다.

물론 버넘은 우리 운동에 좀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캐넌 동지는 그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글솜씨가 있으며 깊지는 않지만 재빠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이것에 대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저술가는 잊어버릴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인사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무쏠리니 역시 한때는 "좋은 재목"이었습니다!  

1940년 8월 7일

코요아칸

[35.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드와이트 맥다널드가 편집하는 잡지 [당파 평론 ] 8월호에 실린 그의 글을 읽어 보았는지요.

이 사람은 속물 지식인 버넘의 제자였습니다. 버넘이 탈당한 후 그는 "과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섁트먼의 당에 남았습니다.

파시즘과 관련하여 그는 우리의 노선을 서투르게 해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석을 자기가 새로이 발견한 것처럼 위장하고 일부 뻔한 말들을 우리 것인 양 위장시켜놓고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 전체는 전망과 균형을 결여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지적 정직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버넘의 고아인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냉철하며 회의적인 눈으로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다시 검토해야한다." 266쪽에 이 글이 나옵니다. 불쌍한 "노동자당"은 이 "검토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물론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버넘과 같이 탈당하는 것일 겁니다.

그 글의 마지막 4줄은 탈당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 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 자신을 지식인으로 내세울 수 있다."

이론적 회의에 기초한 혁명활동은 내적 모순의 가장 후진적인 형태입니다. 혁명투쟁의 법칙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대중의 혁명투쟁에 헌신 "할 수 없습니다. 혁명적 헌신은 이 헌신이 합리적이며 합당하다는 확신 즉 이 헌신이 혁명 목표에 조응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에 대한 회의"는 운동을 개인적으로 포기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섁트먼은 이런 와중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총서기"로서 그는 너무 바빠서 쁘띠부르조아 속물들로부터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1940년 8월 9일

레온 트로츠키

[36. A Letter to Chris Andrews] 크리스 앤드루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 동지,

당이 채택한 반(反) 평화주의 입장을 평가한 동지의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입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장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핵심내용이 혁명적이며 우리 시대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모든 문제들은 비평의 무기뿐만 아니라 총칼의 비평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둘째, 동지의 글은 종파주의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사건들과 대중들의 정서에 대비시켜 우리 노선의 신성함을 추상적으로 확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쌍한 "노동 행동"지 8월 12일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강제 징집에 대한 루이스의 투쟁에 우리는 100%의 지지를 보낸다." 우리는 단 1%도 루이스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조국을 완전히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방어하고자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지원병 제도는 군사적 관점에서 낡아빠졌을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위험합니다. 노동자 절대 다수는 이렇게 이해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강제징집을 찬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찬성은 "노동계급의 무장화"를 매우 혼란스럽고 모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종파주의자들은 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제징집이라고 ? 좋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이 제도를 시행할 것이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출발점으로서 아주 훌륭합니다.  

1940년 8월 17일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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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41 2005/10/0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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