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2006/01/31 14:50

무제(제목을 못정함)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이 명제는 계급사회 속에서 가진자와 못 가진자,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이 상존하는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통용되는 진리다. 가진자는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가장 억압받고 착취를 받는 계급이 항상 시대에 앞서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웠으나 대부분의 계급사회가 다른 계급사회로의 이전을 나타내면서 투쟁의 주체가 권력을 잡지 못하고, 다른 계급이 권력의 주체가 되어 이전과는 다른 계급사회가 형성되어 왔다.

 

계급투쟁의 핵심은 권력 투쟁이다. 어느 계급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계급투쟁의 승패가 갈라서게 되고 그 사회는 새로운 계급간의 결투의장으로 변하게 된다. 몇천년의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진실은 더 이상 피억압계급이 침묵하는 다수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젠 전국적으로 단일하게 지배계급과의 투쟁 속에서 피지배계급은 흩어져 있지 않으며, 단일한 목적을 가지고 투쟁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의 공통의 목적은 피지배계급이 권력을 잡아야만이 현실을 바꿀 수가 있는 것이며, 같은 시간에 같이 노동을 하는 관계로 함께 할 수 있는 그 모습에서 새로운 사회의 맹아를 보여주면서 승리를 예감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대의 폐해를 부수고 더 낳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계급관을 가진 전국적인 정치 조직이 대중과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고민은 언제든지 대중과 함께 하고 그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하는 가로 항상적인 고민을 해온다. 현실의 계급투쟁의 발전 상태, 향후의 발전적인 모습을 상상하면서 주체적인 준비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로 시작된 고민들은 현재까진 민주노동당이라는 틀 속에서 맴돌아 가는 다람쥐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다. 현재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에겐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 자신들이  비빌 언덕이 필요한 것이지 빌붙어 살아가는 처갓집이 아닌 것이다. 모랄레스. 차베스 등등이 비록 정권을 잡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개량을 의미 할 뿐, 사회주의로 나가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이 권력은 전무한 관계로 의회내, 합법적인 권력의 이양 속에서 득을 보는 것은 결국 자본가들인 것이다. 유럽식의 국유화 조치는 사회내의 물적 안정을 시킬 수는 있는 개량조치로서, 대중의 투쟁의 힘에 강제된 떡고물 속에서, 권력을 잡아야 할 피지배계급은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가 계급의 생산을 높여주기 위한 자국의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인 것을 좌익 정권의 출현으로 기쁜 맘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좌파들의 모습 속에서 아직도 과학적인 사상으로 무장된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요원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젠 투쟁의 모습을 제대로 구현해 내도록 하자. 노동계급이 올바른 투쟁의 방식을 가지고 나갈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계급사회에선 어느 사회에서든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도덕, 가치관 등 그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인 것이다. 그 뿌리를 두고서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것은 이전까지 위치만 바뀐 계급사회에서의 모습이었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방식은 정통성이라는 방식을 들고 나와서 언제든지 그것은 여태까지 해왔던, 바뀔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강조를 하면서 그것은 인류가 해왔던 방식이라고 늘 주장 해 왔다. 이제부터는 그러한 가치관은 바뀌어야 한다. 공장에서 나타나는 집단적인 생산방식은 행동의 집단화를 가져오고, 행동의 집단화는 소수보단 다수가 유리한 방식으로 바뀌면서 다수를 위한 가치관을 강제한다. 그것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다수의 견해를 따르지만 소수의 견해도 존중해야 한다라는 말로써 나타난다. 현재의 선거 제도에서 과연 다수의 견해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라도 했던가, 결코 그런 일은 이루어 질 수가 없다. 계급사회에선 이루어 졌다라는 환상 속에서 언제든지 지배계급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광대들의 역할로 언제든지 피지배계급의 힘이 약화가 되면 그 역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다시금 반복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피지배계급은 선거라는 역할에서 표를 찍는 기계로서 정치엔 무관심하게 변하게 만든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이익이 정치 속에서 제대로 발현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의 반복은 대중들을 정치에 대한 불신과 경멸로 이어지면서 그에 대한 작용으로 투표율은 떨어져 가게끔 유도를 하고 지배계급은 그것을 통하여 더욱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피지배계급의 힘은 무엇일까? 지배계급의 힘은 무엇일까? 둘다 물리력이라는 것에 의존하고 잇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배계급에겐 또 하나의 힘이 잇는데 바로 앞에서 내세운 정통성이라는 무기로서 피지배계급들에게 전파를 한다는 점이다. 여태까지 인류가 해 왔던 습관을 그대로 답습해야만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다라는 점을 항상 그들의 채널을 통하여 언급하고 반복 강조 해 왔던 것이다. 그 힘을 부수기 위해선 피지배계급에겐 그것을 이길 대안으로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찾아야 하며, 그 답은 현실에서 나타나는 객관적인 법칙을 따라갈 과학에서, 과학은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인 것이다. 현실의 반영 속에서 자본주의는 무계급 사회로 가기 위한 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맹아로서 집단적인 공장 체제인 것이다. 요즘엔 새롭게 팀제 방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다. 자본주의 발전은 극으로 치달아 가고 있으며, 더 이상 다수의 피억압계급을 존속시켜서는 안되며 발전에 따르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건설하기 위해선 이전까지의 투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방식은 지배계급을 다른 소수로 바꾸는 형식을 취했지만 앞으로의 방식은 다수가 지배계급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방식은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여타 방식을 보완해야 하며,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잇다라는 사고 방식을 부정하고 1+1=2다가 아니라 3이나 4가 되는 단결된 힘이야말로 역사를 바꿀 수 잇는 원동력이라는 측면 속에서 새롭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일부 작은 집단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투쟁의 방식을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다 더 넓은 공간에서 확장된 지역 속에서 감성에 호소하기보단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이성적인 입장을 강조하여 강력한 조직을 꾸려 나가야 하는 것이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목적 일수뿐이 없는 것이다. 특히나 계급정당으로서 노동자계급을 위한 정당이 존재하지 않은 현실에선 더욱더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계급정당으로서 전국적인 정치조직은 어떠한 투쟁방식을 선호한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투쟁의 방식은 그 특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뿐이 없으며, 그 상황에 맞는 투쟁의 방식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과학을 이해하고 따르는 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다만 어떠한 투쟁의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원칙은 존재한다. 현실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가기 위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그들 스스로가 권력을 잡아야함을 선전 선동을 해야 함이 언제든지 해야 하는 일이며, 거기에 모든 투쟁의 방식을 종속 시켜야 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투쟁의 방식은 조직화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결여된 어떠한 투쟁의 방식은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기 만족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뿐이 없으며, 이는 조직의 발전을 저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떠한 투쟁이라도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인 경험을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더욱더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에 의한 조직을 위한 방식으로 나타내야 하며, 이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계급정당 형성 및 발전시킬 수 있는 종속이 되어야 하며, 이는 대중을 피지배계급의 사상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형태로 나타 나야하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은 자신들이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모든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고, 그에 맞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다. 또한 지배계급이 가진 장점의 모든 것을 이어받기 위해서라도 모든 방식을 이용해야하며, 어떠한 방식이 잘못되었다라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 맞는 방식의 투쟁을 못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부분에서만 자신들의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회내의 투쟁과 의회밖에서의 투쟁, 그 중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밖의 투쟁을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피지배계급의 힘을 끓어오르게 하기 위해서, 지배계급의 정치질서가 가지는 환상을 부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피지배계급이 가지고 잇지 못한, -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배계급에 비해서 양적인 부분이  떨어지는 언론 방송 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선전선동을 보다 강화하고 확대하고자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의회 내나 밖에선 그 환상을 깨기 위한 입법절차나 그 밖에 다른 여타의 투쟁방식은 새로운 환상을 심어주는데 일조를 해서는 안되며 지배계급의 힘은 입법기관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 경찰, 군대, 검찰, 정보기관 등등으로 나타내는데 대중에게 정치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함을 바탕을 두고 있엉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가 누적된 모습이요, 미래는 현재를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계급투쟁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잇는 것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권력계급으로 나타날때이며, 그렇게 만든 것은 그들 스스로 이지만 길을 잡아 그 길로 인도해야하는 의무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몫이다.

민주노동당에 내에서의 당직 선거는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섰는가? 무슨 계급적인 모습에서 대중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가! 1~2%의 득표율에서, 많게는 10여% 이상의 차이가 발생하여 떨어진 모습에서, 당선이 된 쁘띠부르조아들의 모습은 자칭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어떠한 모습으로 투영이 되어 대중에서 계급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자신들의 계급성에 맞는 길을 찾아가게 하고 잇지 않는가! "우리는 존재를 통한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존재한다."(비뢰도 17권 중에서) 존재가 있기에 의식이 있고 그 존재는 자신의 위치에 맞는 의식과 행동을 표현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 정당을 노동대중의 계급정당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을 하고 노동계급정당의 한 모습이라고 자기만족적으로 규정하고픈 의도로서 개량정당이라는 회피성, 또는 도피성 발언을 하면서 그안에 틀어 박혀 있어서 나오지 못한 모습은 하늘의 별을 따주겠다고  애인한테 과장적인 몸짓을 하는 60년대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계급정당이란 계급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정당은 자신의 투쟁의 형태나 모습은 객관적인 법칙에 의거하여 대중을 현실에 안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비시켜 권력의 핵심으로서 자리 매김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대다수의 대중이 권력에서 소외된 자본주의체제의 선거 및 입법부의 활동은 그것에 따르는 주의 상황이 존재하며, 계급적인 관점에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모습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처럼 지배계급의 모습이 직접적인 지배형식이 아니라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지배계급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어내어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그것이 없는 정당은 노동계급정당일 수가 없다. 그것은 계급적인 주체로서 나타날 수가 없으며, 한국의 민주노동당이라는 존재는 서구의 개량정당의 모습에서 나타나며, 이후 노동대중은 그들의 표를 찍는 하나의 기계로 전락시키는 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해방연대, 다함께등의 민주노동당내의 사회주의 세력의 진정한 모습이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서 나가는 노력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고,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엔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 했다. 선을 쌓은 집에 반듯이 경사가 남고 불선을 쌓은 집에 바듯이 재앙이 남는 다라고 했다. 동지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를 뒤를 따라 오는 후배 및 선진 노동자들에겐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 졌는지를 살펴보아라. 그것은 계급적인 모습이 아니라 야합의 모습으로 계급간의 투쟁이 모습이 아니라 쁘띠부르조아를 억지 춘향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도둑의 심보인 것이다. 쁘띠부르조아들은 언제든 노동자계급을 이용하고자 하지 그들과 함게 하고자 않는다. 자신들의 손에 천한 기름이 묻지 않기를 바라면서, 육체적인 노동의 경박함을 정신노동의 우아함으로 대체하고자 노동계급이 뒤에서 밀어주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쁘띠부르조아에게 기름을 칠한다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민주노동당을 계급정당이라고 착각하고 그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면서 울부짖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에서 비애감이 나타난다. 동지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동지들이 진정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에 대해서 현시기 어떠한 모습을 비추어 주어야 하는지를 아직도 깨달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 깨달음을 얻어 한차원 더 높은 능력을 발휘하겠는가. 피안은 멀리 있는게 아니고 우리의 현실에 존재한다.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의 방식에서 선거라는 특수한 문제를 들고 나와서 그안에 매몰되어지는 모습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며, 올바른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된 모습에서 자신들의 투쟁관을 대중에게 구현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투쟁, 민주노동당이여 노동자계급정당으로 바뀌어야한다, 북한의 인권문제, 등등의 모습에서 잘못된 사상의 파편 속에서 계급관을 가지지 못하고 대중들의 당면문제를 해결을 하면 마치 투쟁의 모습을 한층 끌어올린다라는 자가당착에 빠져 더 이상의 당파성은 사라지고 쁘띠부르조아에게 무릎을 끓고 빌면서 이것이야말로 반자본주의 정신이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성이라고 주장을 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노릇인 것이다. 우리에겐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성을 그대로 간직한 계급정당이요, 노동계급대중을 사상과 목적의식성으로 무장시키고 투쟁의 방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전투강령으로서 노동자통제를 제시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중에게 호소하기를 비정규직철폐를 목놓아 외치고 - 물론 그것을 거부하고, 희석화 시키려는 태도보다는 진보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결과론적인 의미로서 미래에 나타나는 제 계급적인 투쟁의 목적으로서는 현시기에 조응하기만 할뿐 그것의  진정한 목적인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것은 필연적으로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투쟁을 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목적에 맞는 전술을 가져야 하는 것인데, 그 방식은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초나라왕이 한나라왕에게 전투중에선 이겨도 결국엔 지는 형국으로 변한 것은 바로 각각의 국면에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국면에서 승리를 해야한다라는 맹점에 사로 잡혀 자신들의 역량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결과로 항우는 자살을 할 수뿐이 없는 사면초가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동지들, 프롤레타리아트에겐 부르조아의 커다란 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보단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조직이요, 과학을 가지고 정확한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다. 쁘띠부르조아의 조직 안에서 마음놓고  그 조직의 진보적인 이미지만을 대중에게 일부 보여줄 뿐 노동계급적인 모습을 보여 불수는 없는 것이다. 쁘띠부르조아의 조직에서 더 이상의 진보라는 것은 또 다른 노동계급의 착취제도의 존속일 뿐이며, 그 안에서 아직도 희망을 갖는 것은 망상에 빠진 정신병자들과 별차이가 없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조직이 무기로서 나타날 때는 자기 계급의 주체적인고 자주적인 모습이 나타날 때이고, 그것이 없다면 쁘띠부르조아의 조직 안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조차도 쁘띠부르조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관료화되기가 쉽다. 조직의 특히나 더 아웃사이더에겐 치명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뜻이 있고, 조금만 뒤를 돌아본다면, 민주노동당내에선 왜 사회주의세력이라고 주장하는 조직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외각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자신들의 조직이 왜 하부에선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대중에게는 멀어져갔던 모습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바로 NL들처럼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고, 스스로는 올바른 계급관을 가지지 못하여 술에 물 탄 듯, 물레 술 튼 듯한 모습이 실망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민주노동당내의 선거에서 좌익이라고 하는 세력이 선전을 했다고 하지만, 뚜렷한 계급관을 가지고 이긴다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 계급정당이었을 때 이야기고, 그렇지 않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조직이 당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조직의 향후 발전 방향과 현재까지의 발전 모습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런 당에 매달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에서 이윤을 함께 또는 같이 나눠 먹을 수 있다라는 확신이 존재하던지, 자신들의 사상이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흐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유아적인 작태일 때 가능 할 것이다.

 

쁘띠부르조아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잇다라고 하는 조직은 자신이 아직도 쁘띠부르조아사상에 매몰되어 잇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할 것이다. 그들의 행동, 사상을 표현해 주는 그들의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제 형태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계급적인 관점을 확연하게 보여 주고 있다. 차베스, 모랄레스 등등의 남미에서의 좌익 정권이라고 불리는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환영하는 모습, 현재의 노동대중의 투쟁을 비정규직 철폐투쟁이라는 것에 한정을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차별을 스스로 불러 일으켜 투쟁의 수위를 낮추어 지배계급의 지배를 더욱 공거히 해주는 모습, 농민들의 투쟁에서의 뚜렷한 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채 반세계화, 수입개방 철회라는 대중추수주의로 빠져가는 모습에서 과학은 사라지고 공상적인 사상만으로 대중과 함께 하고자하는 기회주의로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투쟁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정치적인 경험을 뚜렷한 목표를 각인시켜 그 길로 나가게 하는 것이지, 그 안에서 매몰되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도끼 자루 썩는줄 모르고  신선놀음에 매료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동지들의 한탄속에 담겨진 모습을 보는 대중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반응으로 일관하게 될 것이다. 노동대중의 텃밭에서 패배했던 보궐선거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들은 민주노동당의 모습에서 다른 정당과의 차별성을 느끼지 못했고 솔직히 느낄수도 없었던 일은 바로 그 조직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인 한계성이라는 것을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동지들 및 자칭 선진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잇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머리는 아직도 대중을 앞서서 함께 하고자 하기보다는 대중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부정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사회를 찾으려는 과학도들에겐 현실의 객관적인 발전 경로를 명확하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무계급 사회로 가는 첫걸음으로서의 과도기를 표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과도기는 계급을 철페하기 위해서 여태까지 나타났던 사회의 전반적인 소수의 지배를 다수의 지배로 바꾸기 위해선 다수의 독재가 필요하며 다수의 독재는 그 사회의 중심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이 차지해야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계급정당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체가 아니며, 그 중에서도 선진적인 노동대중의 일부만이 - 어짜피 모든 노동대중의 이익을 대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활동을 하고, 다른 이들을 이끌고 나가는 선진대중이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파악 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대중들 속에서 알아내어 그들의 이익을 대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 계급정당에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며, 당원들에 의해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구현해 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겐 계급투쟁의 전반에 걸쳐서 전체 노동대중의 이익을 대변 할 수도 없고,  할 능력도 없다. 그들은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억압받고 착취를 받아 필연적으로 가장 강력한 투쟁의 주체의 역할의 이익에 민감하게 나타날 수뿐이 없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체제내의 변화 발전을 나타내면 결과적으로는 대중의 투쟁을 체제내의 개혁 및 개량으로 투쟁을 한정시키며, 반자본주의의 나래는 꺾여 체제 내속의 희망 속으로 빠져 무지개 너머는 무엇이 존재할까라는 상상만을 꿈꾸는 몽상가들의 집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투쟁은 아직도 지속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향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잊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 해 볼 필요가 있다. 잊혀진 과학을 다시 햇빛 속으로 꺼내어 대중들과 함께 하도록 하자. 최대강령으로 가기 위한 최소강령으로서의 가교가 된다라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 그것 자체가 이미 최소, 최대강령으로 나누었다는 사실이며, 현시기의 투쟁의 목표는 과도기 투쟁이 아니라 사회주의로 나가는 투쟁이라는 것엔 과도적강령을 주장하는 동지들은 빼고 다들 알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 대중이라는 우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에서 핑계거리를 찾는 그런 작태는 그만 하자.

 

피지배계급에겐 지배계급에게 대항 할 수 있는 무기는 조직뿐이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은 쁘띠부르조아의 개량주의정당에서 기생하는 모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는 별도로 자신의 조직의 독자성을 가져야만 하면서 투쟁의 방식과 형태 및 강령에서 쁘띠부르조아정당과의 차별성이 나타나야 한다. 이렇게 나타날 때만이 계급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정당의 건설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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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31 14:50 2006/01/3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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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부리  | 2006/02/07 16:17
거참 오랫만에 보는 힘있는 글 힘받아 읽고 갑니다. 그란데, 자기소개에서 "위해서"가 아니라 "맞서서"인듯? 몽상가님 '노동자계급의 관점' 글들이 더 힘있는 공명을 멀리 내면 좋겟다 함시롱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건 맞는데, 제 오랜 생각은 그 의식의 어휘들 역시 변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아직 벼리지는 못했고요. 존재의 규정을 받는 의식의 어휘와 개념들이 변화중인 존재를 지칭하기에는 부정합적인 면들이 늘어나왔고, 제대로 편을 가른 "계급투쟁"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서도 강력하고도 알딸딸한 어휘들과 수사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건필, 건투쟁함시롱 화이팅!
부탁  | 2006/02/13 16:20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간곡한 부탁이 하나 있다면 바탕색 (노란색, 연두색 전부) 좀 바꿔 주시고 단락 좀 많이 나누어 주시길. 글 읽다 보면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흰바탕에 검정 글자 많이 쓰는 이유가 보기는 좀 그래도 눈이 제일 편하거든요. 꼭 흰바탕이 아니더라도 좀 덜 자극적인 바탕색 부탁드리고요. 제 댓글처럼 단란 좀 많이 나누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choyul  | 2006/02/14 11:29
부탁/ 열심히 단락을 나누고자 합니다만 아직도 실수가 많네요^^
초보자의 실수를 이해해주시기를 부탁 드리고 화면의 색상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너부리/ 감사합니다.
부탁  | 2006/02/14 14:52
바탕색이 읽기에 훨씬 좋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