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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거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나는 철학을 공부 하면서 데카르트를 공부하지 않고 넘어 간 적이 없다. 하지만 매 번 데카르트를 보면서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데카르트 철학을 단순히 근대 철학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수준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데카르트의 철학보다는 데카르트의 삶이나 어떻게 하여 이런 철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고 방법서설은 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었다고 본다.
이번에 [방법 서설]과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나온 데카르트 철학 부분을 함께 공부를 한 것이 나에겐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까지 데카르트를 이해하는데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많이 의존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이해하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데카르트 한 사람을 알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이 부족한 점을 [방법 서설]이 채워주었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철학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알려져 있다. 이 말이 알려주듯이 데카르트는 중세의 시각을 벗어나 근대의 시각을 시작하였다. 중세는 신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데카르트의 철학이 남았다는 것은 데카르트의 처세가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대의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가 있다. 아무튼 이렇게 데카르트는 은근슬쩍 새로운 사고를 시작하였다.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제1원리이다. 이 명제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가 생각한다는 것 때문이라고 본 점에서 ‘나’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이라는 중세의 관점에서 갈라서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여럿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반박할 수 없는 지식, 즉 수학적 지식과 모두가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가 진리라고 말한다.
문제 설정
‘나’라는 주체가 신에게서 벗어나 진리를 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알아 갈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본유관념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해결한다. 본유관념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말한다. 이것을 통하여 ‘나’라는 주체는 신이 없이도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근대 철학의 출발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주체가 이성에 내장되어있는 본유관념을 이용하여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우선한다. 생각하는 것은 정신이고 존재하는 것은 육체라 볼 수 있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로 존재하면서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육체가 어떻게 일치 하는가 즉 주체와 대상이 어떻게 일치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성을 얘기 한다. 이성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성을 데카르트는 신이 주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누가 이성을 주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이성으로 완전한 것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많은데 데카르트가 근대와 중세의 중간에서 공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과학과 수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수학의 방식은 누가 보아도 맞는 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이라는 표현에 신뢰를 가지는 것은 근대의 과학이 가졌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이 과학이라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 통제가 되지 않는 육체는 불확실한 것이며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육체의 활동을 이성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고 이것을 데카르트의 도덕론이라 부른다.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이 육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알아야 한다. 이에 데카르트는 해부학을 공부하고 근육과 심장의 움직임을 연구 하였다. 육체를 기계적 작동의 원리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완전한 이성이 어떻게 통제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 사이에 연결선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통하여 정신이 육체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끝으로
데카르트에게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의 존재여부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많은 사람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지식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스콜라철학이 불분명한 논리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 시대상으로는 새로운 전환이었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데카르트의 철학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가 데카르트를 공부하면서 데카르트의 생애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그의 생애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고, 그 환경 속에서의 철학이며 시대적인 한계도 분명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데카르트를 보는 것은 근대 철학의 시작이며 근대 철학 딜레마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욱 철학의 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저작 중 ‘방법서설’과 ‘정념론’을 읽었다. 방법서설의 번역은 이현복씨의 것을 추천한다.
댓글 목록
빨간뚱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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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데카르트는 라틴어로 책을 쓰면서 "Cogito ergo sum." 이라 썼고, 이것은 직역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인데 불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Je pense donc je suis."가 되었습니다. 이 donc(고로, 그러므로)이라는 단어가 문제인데, 이것이 중간에 삽입되면서 데카르트 사상에 대한 큰 오해를 야기하게 되었죠. 내가 생각한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선후관계나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불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donc 이라는 단어로 인해 원래 의미가 상당히 다르게 해석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다시 확인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종원 저, "서양철학의 이해"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굴뚝청소부는 정말 비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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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뚱띵이/저희가 읽은 방법서설(이현복씨 번역)에는 "그리고 내 스승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내 조국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이 책을 쓰는 것도 전적으로 순수한 자연적 이성만을 사용하는 사람이 옛날 책들만을 신뢰하는 사람보다 더 올바르게 내의견을 판단해 주리라고 기대하기 떄문이다" 라고 나와 있는데요. 데카르트가 라틴어로 책을 쓴게 아니라 저희가 읽은 프랑스어판이 라틴어로 번역된거같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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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pense donc je suis가 라틴어판으로 번역되며 Cogito ergo sum이 된 것 같기때문에 원전에 비춰 나는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해석이 맞는것 같습니다.그리고 방법서설 각주를 보니 「성찰」에서는 ego sum, ego existo(나는 있다,나는현존한다)는 명제가 앞선 명제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정리를 하면서 이 Cogito ergo sum 명제를 다시 봐야겠다는 필요를 느꼈던것도 있고요.
데카르트 원전을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만 이진경씨의 책도 철학에 대한 해석영역의 차이들이라는 점에서 참고하기 좋은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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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뚱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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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설이 불어로 써진 것은 맞구요, 데카르트가 대부분의 저작을 라틴어로 썼다는 말이었는데 정확하게 쓰질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술 마시고 급히 댓글을 작성하다보니...ㅋ불어 단어 donc이 종종 "그러므로" 라고 해석되지만, 데카르트가 초지 일관 이야기하는 cogito 문제를 고려할 때, "그리고" 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데카르트는 사유와 존재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나 선후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유명한 철학개론서들이 있지만, 지나친 단순화 내지는 도식화 문제가 있고, 해석영역의 차이로 인정하기엔 좀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 특히나 굴뚝청소부는 권장하고 싶지 않네요. 최대한 원서를 통해 접근하시길 권해드리고 싶어요~
물론 이현복 선생님 덕에 제대로 된 데카르트 번역서가 나오고 있고 다른 책들도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서양철학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대부분 철학자나 저서에 있어서 오역이라는 난관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무척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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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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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잡지가 하나 나왔네요. 창간 축하드립니다.저도 <방법서설>은 프랑스어로 씌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의 덧글들을 보고 좀 찾아봤더니, 프랑스어로 1637년에 처음 출판된 것이 맞더군요. 이후 1656년에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 사이인 1644년에 라틴어로 쓴 저작 Principia philosophiae에서 cogito ergo sum이라는 구절이 (딱 그대로는 아니지만)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cogito ergo sum이란 구절이 딱 그대로 쓰인 곳은 <방법서설>의 라틴어 번역판에서인 것 같은데.. 이건 그리 확실친 않네요..)
결국 룩님 말씀이 맞단 말씀인데... 그렇다고 해도 위 덧글에서 룩님께서 구사하신 추론방법은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보단 오히려 저는 빨간뚱띵이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던 것인지 더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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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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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뚱띵이/아 donc 해석이 '그러므로'와 '그리고' 사이에서 나눠지는군요. 저희가 해석에 관한 것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다만 각주에 나는 있다, 현존한다는 명제를 보며 cogito 명제에 대한 보편적인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저희가 원전을 보며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굳이 원전을 볼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서설이나 정념론을 보면서 더욱더 원전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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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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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음. 저는 설득을 위한 추론을 하려했던 것은 아니고 책의 내용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려했답니다. 사실 빨간뚱띵이님이 다시 달아주신 댓글을 보며 저희가 원전을 읽으며 cogito명제에 대해 느꼈던 의문과 비슷한 내용인것 같습니다.그리고 꼬민은 잡지는 아니구요. 짧은 소식지 형태랍니다^^; 축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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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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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 "저는 설득을 위한 추론을 하려했던 것은 아니고 책의 내용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려했답니다." --> 여러모로 황당한 대답이네요.. 어쨌든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부가 정보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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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룩의 어떠한 추론에서 설득력이 부족했는지를 말씀해주시면 더 좋을 듯해요.. ^^;빨간뚱띵이/댓글을 읽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조금 더 설명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존재하는 나의 속성이 '생각한다'"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맞는지요?
그리고 보통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언급될 때에도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의 전제로 받아들여 지는 것 같습니다. 인식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잘못 해석된 것이라고 보시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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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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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이 || 이제와서 "룩의 어떠한 추론에서 설득력이 부족했는지"를 말씀드릴 필요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만 만들 뿐인 것 같아서요. 실제로 멍청이님께선 결과적으로 "룩은 '추론'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고 계시지만, 정작 룩님께선 본인은 추론을 한 게 아니라 "책의 내용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시려고 했다지 않나요?위 덧글을 달 때 제가 생각했던 것을 전부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그냥 간단히 조금만 말씀드리죠. 처음에 제가 룩님의 덧글에서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룩님께서는 "<방법서설>이 원래 라틴어로 쓰였느냐, 아니면 프랑스어로 쓰였느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대한 문제, 즉 이미 "사실"로서 확립되었지만 오직 논의 당사자(룩님과 빨간뚱띵이님)의 무지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어떤 사항에 대한 문제를, 엉뚱하게도 "추론"의 형태로 해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룩님께서 제시하신 "근거"가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 경우엔, 당사자들의 "무지" 때문에 문제가 생긴 만큼, 하다못해 백과사전이라도 찾아보고서, 앞서 말씀드린 "이미 확립된 사실"을 "확인"하면 그만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런 어설픈 "추론"에 기대, (<방법서설>은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자기 의견이 옳다고 "전제"해 버린 뒤에, 룩님께서는 "Je pense donc je suis가 라틴어판으로 번역되며 Cogito ergo sum이 된 것 같기때문에 원전에 비춰 나는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해석이 맞는것 같습니다"라고 주장하시기까지 했죠. 저는 이런 식의 "추론"이 데카르트를, 그것도 "다시" 보신 분한테서 나온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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