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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서의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주의 2 - 국제공산주의동맹

프랑스 전환과 무원칙했던 조합들

1933년 초 히틀러의 나찌의 집권과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들의 지도자들의 범죄적인 수동성이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전반에 충격파를 주었다. 독일에서의 재앙이 제3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반발의 징조 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자, 트로츠키는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기구로서의 생명을 다했음을 선포하고, 레닌주의의 기치를 앞으로 밀고 나갈 새로운 공산당들의 창건을 호소했다. 트로츠키가 작성했던 새로운 제4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호소했던 “4자 선언”(1933년 8월)에 ILO의 대표자들, 네덜란드의 스니블리에트 그룹, 네덜란드의 제2의 그룹,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분리했던 좌익인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이 서명했다. 1934년에 ILO는 스스로를 국제공산주의동맹(ICL)으로 재구성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곧 제3기 종파주의적 모험주의를 포기했다. 나찌의 승리에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미국 등 “민주주의” 제국주의자들과 동맹을 추구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이 새로운 풍조가 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이후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서 성문화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들과의 인민전선 연합들에서 현실화되었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 질서에 대한 도전을 더 이상은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에게 증명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스탈린이 스페인 노동자 혁명을 목졸라 죽인 것도 그의 희망었던 영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에 기여했다.

독일에서의 나찌의 승리는 대공황의 시작 3년 후 다른 곳에서의 계급투쟁의 부활과 동시에 벌어졌다. 노동자들과 청년 층 일부의 급진화가 사회민주당들의 내부에서의 힘차고 전투적인 좌익 세력들의 성장과 미국에서는 산업조직총회(CIO)의 상승에서 나타났다. 1934년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당의 투사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와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들의 선두에 섰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열정을 가진 청년과 노동자들에 개입하여 그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로의 일시적 입당들을 수행할 것을 그의 지지자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했다. 1934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실행되었던 이 전술이 “프랑스 전환”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회당으로부터 꽤 많은 수의 청년과 노동조합 투사 층을 획득했던 1936-37년 미국을 포함하여 다른 몇 개 나라들에서 곧 추진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아마도 분명히 정세가 이 전술의 성공적인 수행에 가장 열려 있었다. 당시 20만 명 정도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던 사회주의 청년(JS)의 마드리드 신문 Renovacion은 “볼셰비키화를 이루기 위하여 사회주의 청년과 사회당에 대한 입당으로 초대받은 스페인 최고의 혁명가들이며, 최고의 이론가들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1972년 7-8월 노동자전위 10호에서 번역된 Pierre Broue의 “트로츠키와 스페인 혁명”에서 인용). 심지어 뿌리깊은 개량주의자인 라르고 카발레로 조차 사회주의 혁명과 제4 인터내셔널을 요구했다.

닌과 안드라데는 범죄적으로 트로츠키의 부탁과 사회주의 청년의 호소들을 일축했고, 자신들의 조직이 PSOE/JS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트로츠키주의 SBLE의 미래 지도자인 마누엘 페르난데즈(Grandizo Munis로 알려진)를 포함하는 소수의 ICE 조직원들은 닌/안드레스의 방침을 거부하고 PSOE에 들어갔다. 이후에 무니스(Munis)는 “그러나 작은 조직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규모가 큰 공산주의 좌익의 분견대에게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었다. CL(공산주의 좌익)의 사회당 입당이 스페인 혁명의 경로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무니스, Jalones de Derrota: Promesa de Victoria[Espana 1930-39], [패배의 중대한 시점들: 승리의 약속(스페인 1930-39)] [멕시코 시티: 사설 “Lucha Obrera,” 1948])라고 썼다. 1936년 4월에, JS는 PCE에 처음으로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장악당했던 한편, 카탈로니아에서는 PCE가 PSOE와 통합하여 카탈로니아 통합사회당을 만들었다.

닌과 안데라데가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들의 강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움켜쥘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유일한 자들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비싼 값을 치르도록 했던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유능한 대중적 활동가지만 얼간이 종파주의자였던 휴고 오엘러 주변의 작은 소수파가 극좌 종파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사회당 입당을 반대했고, 곧 제임스 캐넌이 이끌던 트로츠키주의 다수파로부터 분리했다. 국제적으로, 오엘러는 기회주의적 화해주의의 관점으로부터 자신들의 국가들에서 프랑스 전환을 반대했던 닌 등과의 무원칙한 블럭에 가입했다.

아스투리아스 봉기

1차 공화국 정부에서 자신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범죄적인 역할에 대한 분노가 스페인 사회당 대오의 급진화에 있어서의 특별한 요소였다. 1차 공화국 정부의 노동계급과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들이 광범위한 증오와 극도의 혐오감을 유발했다. 1933년 1월의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있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영감을 받았던 농민 반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 임계점이었고, 새로운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CNT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기권할 것을 촉구했고,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공화-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투표하지 않았다. 성직자와 군주제주의 반동 당들이 선거를 휩쓸었다.

성직자-파시스트 CEDA(스페인 자치적 우익 조직 총연맹)의 조직원들이 1934년 10월 내각에 합류하도록 초청 받자, 스페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분출했다. 강력한 PSOE가 지도하던 광산노동자 노동조합에 중심을 두고 있던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들은 봉기로 일어섰다. 경찰 막사들이 공격을 당했고, 노동자들에게 (장악한 군수공장에서 획득한) 기관총과 소총들이 분배되었으며, 수도 오비에도와 다른 지역들이 봉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모두가 독일 노동자들의 쓰라린 경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그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를 결의했다.”고 BOC 조직원이면서 반란의 선두에 서 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 연맹의 중심적 지도자였던 마누엘 그로시(Manuel Grossi)는 자신의 1935년 서술인 “아스투리아스봉기사회주의혁명의 15”(런던, 사회주의 정강, 2000년)에서 썼다.

이곳은 노동자 준타(노동계급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폭넓은, 권위를 가지는 위원회)의 건설에 대한 트로츠키의 끈질긴 호소들을 실현하기에는 척박한 토양이었다. 트로츠키가 1931년에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본적인 중핵을 포함하는 준타를 통해서만 오직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그리고 그래서 역시 혁명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실히 할 수 있다. 오직 노동계급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정도에서만, 준타는 권력을 위한 투쟁의 기관으로 변형될 것이다”(“스페인 혁명과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들”, 1931년 5월 28일). 하지만, 닌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BOC에 의해 시작되었던 “노동자 연맹”에 서명을 했다. 이 조직들은 선출되지도 않았으며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의 참여를 수반하지도 않았다. ICE와 BOC에 추가적으로 PSOE/UGT, PCE, 그리고 지역 CNT를 포함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연맹을 설립했던 1934년 3월 28일 협약은 “이 조약의 조인 날짜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다른 동맹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내거나 악화시키는 모든 선전 캠페인들은 중지될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었다(아스투리아스봉기에서 인용). 노동자연맹은 경쟁하고 있는 정당들과 강령들이 시험을 받을 수 있는 공개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위한 전망의 주변으로 혁명적 전위가 건설될 수 있도록 하는 도가니로서 기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조직들의 지도부들 사이에 이루어진 최소의 공통분모적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 비적대협약이었다.

아스투리아스 반란은 임박한 혁명과 그 혁명에 대한 배신과 혁명의 패배의 전조였다. 장군 프랑코가 아스투리아스 봉기대를 분쇄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처음으로, 외국인 용병부대들과스페인 식민지 모로코로부터 무어인 군대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프랑코는 나중에 스페인 혁명을 분쇄하기 위하여 이 군대들을 활용했다. 5천명의 노동자가 죽고 3만 명이 투옥되었던 고립된 아스투리아스 코뮌에 대한 진압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노동자 조직들 사이의 단결에 대하여 새로와진 감정을 가지는데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열망들은 개량주의자와 중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계급 협조적 연합에 대한 지지의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프랑스 전환과 무원칙했던 조합들

1933년 초 히틀러의 나찌의 집권과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들의 지도자들의 범죄적인 수동성이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전반에 충격파를 주었다. 독일에서의 재앙이 제3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반발의 징조 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자, 트로츠키는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기구로서의 생명을 다했음을 선포하고, 레닌주의의 기치를 앞으로 밀고 나갈 새로운 공산당들의 창건을 호소했다. 트로츠키가 작성했던 새로운 제4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호소했던 “4자 선언”(1933년 8월)에 ILO의 대표자들, 네덜란드의 스니블리에트 그룹, 네덜란드의 제2의 그룹,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분리했던 좌익인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이 서명했다. 1934년에 ILO는 스스로를 국제공산주의동맹(ICL)으로 재구성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곧 제3기 종파주의적 모험주의를 포기했다. 나찌의 승리에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미국 등 “민주주의” 제국주의자들과 동맹을 추구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이 새로운 풍조가 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이후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서 성문화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들과의 인민전선 연합들에서 현실화되었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 질서에 대한 도전을 더 이상은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에게 증명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스탈린이 스페인 노동자 혁명을 목졸라 죽인 것도 그의 희망었던 영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에 기여했다.

독일에서의 나찌의 승리는 대공황의 시작 3년 후 다른 곳에서의 계급투쟁의 부활과 동시에 벌어졌다. 노동자들과 청년 층 일부의 급진화가 사회민주당들의 내부에서의 힘차고 전투적인 좌익 세력들의 성장과 미국에서는 산업조직총회(CIO)의 상승에서 나타났다. 1934년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당의 투사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와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들의 선두에 섰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열정을 가진 청년과 노동자들에 개입하여 그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로의 일시적 입당들을 수행할 것을 그의 지지자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했다. 1934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실행되었던 이 전술이 “프랑스 전환”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회당으로부터 꽤 많은 수의 청년과 노동조합 투사 층을 획득했던 1936-37년 미국을 포함하여 다른 몇 개 나라들에서 곧 추진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아마도 분명히 정세가 이 전술의 성공적인 수행에 가장 열려 있었다. 당시 20만 명 정도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던 사회주의 청년(JS)의 마드리드 신문 Renovacion은 “볼셰비키화를 이루기 위하여 사회주의 청년과 사회당에 대한 입당으로 초대받은 스페인 최고의 혁명가들이며, 최고의 이론가들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1972년 7-8월 노동자전위 10호에서 번역된 Pierre Broue의 “트로츠키와 스페인 혁명”에서 인용). 심지어 뿌리깊은 개량주의자인 라르고 카발레로 조차 사회주의 혁명과 제4 인터내셔널을 요구했다.

닌과 안드라데는 범죄적으로 트로츠키의 부탁과 사회주의 청년의 호소들을 일축했고, 자신들의 조직이 PSOE/JS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트로츠키주의 SBLE의 미래 지도자인 마누엘 페르난데즈(Grandizo Munis로 알려진)를 포함하는 소수의 ICE 조직원들은 닌/안드레스의 방침을 거부하고 PSOE에 들어갔다. 이후에 무니스(Munis)는 “그러나 작은 조직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규모가 큰 공산주의 좌익의 분견대에게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었다. CL(공산주의 좌익)의 사회당 입당이 스페인 혁명의 경로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무니스, Jalones de Derrota: Promesa de Victoria[Espana 1930-39], [패배의 중대한 시점들: 승리의 약속(스페인 1930-39)] [멕시코 시티: 사설 “Lucha Obrera,” 1948])라고 썼다. 1936년 4월에, JS는 PCE에 처음으로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장악당했던 한편, 카탈로니아에서는 PCE가 PSOE와 통합하여 카탈로니아 통합사회당을 만들었다.

닌과 안데라데가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들의 강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움켜쥘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유일한 자들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비싼 값을 치르도록 했던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유능한 대중적 활동가지만 얼간이 종파주의자였던 휴고 오엘러 주변의 작은 소수파가 극좌 종파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사회당 입당을 반대했고, 곧 제임스 캐넌이 이끌던 트로츠키주의 다수파로부터 분리했다. 국제적으로, 오엘러는 기회주의적 화해주의의 관점으로부터 자신들의 국가들에서 프랑스 전환을 반대했던 닌 등과의 무원칙한 블럭에 가입했다.

아스투리아스 봉기

1차 공화국 정부에서 자신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범죄적인 역할에 대한 분노가 스페인 사회당 대오의 급진화에 있어서의 특별한 요소였다. 1차 공화국 정부의 노동계급과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들이 광범위한 증오와 극도의 혐오감을 유발했다. 1933년 1월의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있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영감을 받았던 농민 반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 임계점이었고, 새로운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CNT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기권할 것을 촉구했고,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공화-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투표하지 않았다. 성직자와 군주제주의 반동 당들이 선거를 휩쓸었다.

성직자-파시스트 CEDA(스페인 자치적 우익 조직 총연맹)의 조직원들이 1934년 10월 내각에 합류하도록 초청 받자, 스페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분출했다. 강력한 PSOE가 지도하던 광산노동자 노동조합에 중심을 두고 있던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들은 봉기로 일어섰다. 경찰 막사들이 공격을 당했고, 노동자들에게 (장악한 군수공장에서 획득한) 기관총과 소총들이 분배되었으며, 수도 오비에도와 다른 지역들이 봉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모두가 독일 노동자들의 쓰라린 경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그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를 결의했다.”고 BOC 조직원이면서 반란의 선두에 서 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 연맹의 중심적 지도자였던 마누엘 그로시(Manuel Grossi)는 자신의 1935년 서술인 “아스투리아스봉기사회주의혁명의 15”(런던, 사회주의 정강, 2000년)에서 썼다.

이곳은 노동자 준타(노동계급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폭넓은, 권위를 가지는 위원회)의 건설에 대한 트로츠키의 끈질긴 호소들을 실현하기에는 척박한 토양이었다. 트로츠키가 1931년에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본적인 중핵을 포함하는 준타를 통해서만 오직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그리고 그래서 역시 혁명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실히 할 수 있다. 오직 노동계급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정도에서만, 준타는 권력을 위한 투쟁의 기관으로 변형될 것이다”(“스페인 혁명과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들”, 1931년 5월 28일). 하지만, 닌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BOC에 의해 시작되었던 “노동자 연맹”에 서명을 했다. 이 조직들은 선출되지도 않았으며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의 참여를 수반하지도 않았다. ICE와 BOC에 추가적으로 PSOE/UGT, PCE, 그리고 지역 CNT를 포함했던, 아스투리아스 노동자연맹을 설립했던 1934년 3월 28일 협약은 “이 조약의 조인 날짜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다른 동맹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내거나 악화시키는 모든 선전 캠페인들은 중지될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었다(아스투리아스봉기에서 인용). 노동자연맹은 경쟁하고 있는 정당들과 강령들이 시험을 받을 수 있는 공개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위한 전망의 주변으로 혁명적 전위가 건설될 수 있도록 하는 도가니로서 기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조직들의 지도부들 사이에 이루어진 최소의 공통분모적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 비적대협약이었다.

아스투리아스 반란은 임박한 혁명과 그 혁명에 대한 배신과 혁명의 패배의 전조였다. 장군 프랑코가 아스투리아스 봉기대를 분쇄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처음으로, 외국인 용병부대들과스페인 식민지 모로코로부터 무어인 군대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프랑코는 나중에 스페인 혁명을 분쇄하기 위하여 이 군대들을 활용했다. 5천명의 노동자가 죽고 3만 명이 투옥되었던 고립된 아스투리아스 코뮌에 대한 진압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노동자 조직들 사이의 단결에 대하여 새로와진 감정을 가지는데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열망들은 개량주의자와 중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계급 협조적 연합에 대한 지지의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POUM의 창립

1934년 9월 전국 총회에서 닌/안드라데의 ICE는 프랑스 전환을 수행하는 것은 “우리를 무정형의 집단으로 침몰하게”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엄숙하게 결의했다(더간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POUM의 기초”로부터 인용). 1년 후인 1935년에, ICE는 모린의 BOC와 통합하여 POUM을 창설하고 런던 사무국에 합류하면서 진정으로 무정형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주로 영국의 독립노동당(ILP)과 독일의 SAP와 같은 다양한 중도주의 조직들의 무원칙한 연맹이었던 런던 사무국은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 “인터내셔널”을 단결시키는 유일한 힘은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에 대한 반대, 즉 자신들 각자의 국가별 기회주의적 기호들에 기반한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의 압박과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원칙에 대한 반대였다.

POUM은 형식에서는 종파적이었으며, 본질적으로는 기회주의적이었다. POUM은 스스로를 조직적으로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통적인 대중조직들에 대치시켰다. 그러나 PSOE, PCE, 그리고 CNT의 잘못된 지도자들과의 정치적인 분쟁을 바라지 않던 태도가 이러한 행위의 배경에 있었다. 내전 동안에, POUM은 스페인 노동계급 대중의 신임을 주장했던 조직들의 민병대들로부터 분리하여 자기 자신의 민병대를 조직했다. 1936년 1월에 공화파들, PSOE, 그리고 PCE 사이의 계급협조적 블럭이었던 “좌파 선거 협정”에 사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POUM은 내내 인민전선을 신봉했다.

트로츠키는 닌/안드라데의 냉소적인 위선과 총체적인 기회주의를 아래와 같이 폭로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이름이 지시하는 것처럼,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적절한 모든 경우에서 타락하지 않는 혁명가들인 척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함이다. 특별히, 그들은 프랑스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이 사회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엄청나게 비난을 했다. 절대로 안 된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기치를 위하여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대중적인 정치조직 대오 안에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그 조직에 들어가는 것은 기회주의이다. 그러나 대중을 속이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덮어가려주는데 복무하는 의도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강령에 기초하여 개량주의 정당의 지도자들과의 정치적 연합을 결정하는 것은 용기이다! 이보다 더 맑스주의를 타락시키고 팔아먹는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

- “POUM의 배신” 1936년 1월 23일

여기서 다시, 훗날의 닌 옹호자들이 그의 방어에 나선다. 더간과 성인화한 전기문, “역사 속에서의 POUM, 안드레스 닌, 그리고 스페인 혁명”에서 과거 POUM 청년 지도자 윌레발도 솔라노(Wilebaldo Solano)는 트로츠키와 ICL의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Secretariat/IS)이 닌의 모린과의 통합에 찬성했다고 주장한다. 더간에 따르면, “POUM의 창립에 대한 IS와 트로츠키 모두의 최초의 반응이 신중한 긍정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트로츠키와 POUM”).

트로츠키가 그들의 중도주의 정치에 대하여 비타협적으로 적대적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BOC와 POUM에 관한 트로츠키의 저작들의 모든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거짓이다. 트로츠키는 POUM에 대하여 거의 낙관적이지 않았다. 통합에 앞서 IS와 닌 지도부 사이에 격렬한 서신 교환의 과정이 있었다. 1935년 7월에 보낸 편지에서, IS는 ICE가 심지어 분파적 권리조차 없는 가운데 “노동자 농민 블럭에 의해 흡수당하고 있”으며, “그러한 환경에서는 새로운 당으로부터 어떠한 좋은 것도 생기지 못한다 .... 무엇이 새로운 당의 기치가 될 것인가? 런던-암스테르담 사무국의 잘 알려진 배너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우리가 번역한 트로츠키의 “La revolution espagnole”에서 재출판)

닌은 모린이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원칙들”을 받아들였다고 맹세하고, IS가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부족했음”을 호통을 치면서, 즉각적으로 IS의 주장들을 거부했고, ICL과의 더 이상의 토론을 중단했다(“전국위원회로부터 국제서기국에 보내는 편지”, 1935년 7월 21일, 같은 책(우리의 번역)에서 재출판).

더간은 닌의 BOC와의 통합이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the United State)을 창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캐넌의 미국 공산주의 동맹(Communist League of America)의 머스트(A.J. Muste)의 좌선회하고 있던 중도주의 미국 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과의 통합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런던 사무국에 속해있던 POUM과는 달리, 노동자 당은 분명하게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선언했다. 1935년 7월 IS의 편지가 지적하고 있는 것 처럼: “만약 동지가 창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당이 제4 인터내셔널과 관련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면(미국과 네덜란드에서처럼), 이것은 새로운 견인력으로서 국가적수준에서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통합은 생각해 볼만하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당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통합’의 기구로서 스스로를 표현한다면, ... 그렇다면 그러한 당과의 통합은 우리 경향의 청산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더간은 이것이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제인 것처럼 POUM의 제4 인터내셔널에 대한 적대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실제로는, 이것은 혁명적 맑스주의를 모든 종류의 중도주의적 혼란과 구별짓는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문제였다.

닌의 잘못된 확신을 되풀이하면서, 더간은 모린 그룹이 트로츠키주의로 이동해 온 것으로 묘사하고, 트로츠키가 “BOC의 정치에서의 이러한 진화에 대하여 눈치채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그를 혹평했다(“트로츠키와 POUM”). 그가 나중에 아래와 같이 분명하게 밝혔듯이, 모린 또한 이 진화를 “눈치채고 있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BOC의 이론과 실천에 의하면, BOC는 러시아혁명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좌익 사회당 쪽에 가까왔다. BOC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맑스와 엥겔스, 레닌, 그리고 부하린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트로츠키에 의해서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스틸린으로부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조지스 가르니어(Georges Garnier)의 아스투리아스 봉기의 “프랑스판 서문”에서 인용

정말이지, 더간이 POUM 창립에 대한 트로츠키의 “신중한 낙관론”의 유일한 “증거”로 들추어내는 것은 트로츠키의 글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나온 것이 아니라, IS 대표로 스페인에 파견되었던 진 로스(Jean Rous)의 통합에 대한 1935년 10월의 보고로부터 나온 것이다. 로스는 “새로운 당이 선포되었다. 우리는 주목하고 있다. 국제적인 요소들에 기초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이 당이 권력과 권위를 획득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데,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맑스주의의 길에서는 이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다(Le revolution espagnole [우리의 번역]에서 재출판)”라는 트로츠키의 발언을 인용한다. 이 모든 “증거들”이라는 것이 트로츠키가 만약 새로운 당이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맑스주의의 길을 따르는 경우에, 계속적인 협조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모든 기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더간은 전술적 유연함과 무원칙한 화해주의를 동일시한다.

닌과 안드라데는 ICL과 결별했고, 트로츠키와 IS에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했다. 문제는 먼 곳으로부터 스페인 트로츠키주의를 구원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였다. 트로츠키는 반복하여 정치를 강조했다. 통합 선언을 읽은 후, 트로츠키는 POUM의 런던 사무국에 대한 충실한 지지의 반혁명적 중요성에 집중하면서 POUM의 모순들과 얼버무림들에 대하여 가차없는 비판을 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했다(“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1935년 10월 18일). 1936년 1월 자신의 글에서, 트로츠키는 닌/모린 그룹의 성격에 관한 ICL 내부에서의 어떠한 혼란에 대해서도 경고했으며, 이들 중도주의적 배교자들과 배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화해 불가능한 반대를 강조했다.

“언제나 꿀꿀이 죽 같은 조직이었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스페인 조직은 오른쪽과 왼쪽으로의 끊임없는 동요 끝에 모린의 카탈로니아 연맹과 통합하여 중도주의 강령에 기초한 ‘맑스주의자(?) 통합’당을 창설했다. 그 이름에 현혹된 나머지 우리 자신의 정기간행물들 중 일부가 이 당이 마치 제4 인터내셔널 쪽으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써왔다. 경솔한 상상...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의 세력들을 과장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한 것이 실체로 하여금 잔인한 각성을 초래하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 “POUM의 배반”

중도주의적 동요와 인민전선의 배신

공화파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1936년 “좌익 선거 협정”은 사적소유와 부르주아지 지배를 지키기 위한 문서였다. 협정은 군장교와 교회의 존엄은 보장했고, 농경지, 산업이나 은행에 대한 어떠한 국유화도 거부했고,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지역에 대한 민족적 억압을 계속했다. 협정은 (스페인의) 모로코에 대한 식민지 점령을 지지했고, 스페인의 외교 정책이 제국주의 도둑들의 소굴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원칙들”을 따를 것을 권유했다. 협정 조인자들에는 PSOE/UGT, PCE, 과거 CNT 지도자 안겔 페스타나의 생디칼리스트 당, 그리고 POUM의 장 안드라데가 포함되었다. 비록 협정에 가맹하지는 않았지만, CNT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인민전선에 투표하도록 독려했다.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썼다.

“대부분의 이들 정당들이 스페인 혁명이 고조되던 기간에 혁명의 선두에 섰고, 혁명을 배신하고 짓밟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새로운 양상은 모린-닌-안드라데 당의 조인이다. 과거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그야말로 ‘좌익’ 부르주아지 계급의 꽁무니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굴욕적인 타락은 생각하기 힘들다!...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 ‘통합 맑스주의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들’(안드레스 닌, 장 안드라데 등)은 우리의 스페인에서의 ‘특수한 조건들’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탓하면서 자신들의 협조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회피하려고 수차례 시도해왔다. 이것은 모든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전통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그들의 나라의 특수한 조건들을 자기 자신의 나라를 넘어서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맑스주의의 국제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있다.”

- 같은 책

다시 한번, 더간이 닌을 방어하기 위하여 달려든다. 선거 협정에 공식적으로 사인한 것에 관하여 POUM을 꾸짖는 한편으로, 그는 “주어진 정치적 정세에서 POUM은 우익에 대항하여 협정을 지지하는 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지만, 당의 입장에 혼선을 주지 않으면서 이것을 하기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외부로부터 독립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POUM의 창설”). 여기서 다시, 1930년대와 그 이후에서처럼, 인민전선에 대한 지지가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처럼 노동계급의 피를 대가로 치른 “최악의 범죄”이기 보다는 전술적 책략으로 간단하게 표현되고 있다.

1931-33년 연합정부에서도 역시 수상이었던 좌익 공화파 정치인 마누엘 아자나(Manuel Azana) 하의 인민전선 정부의 1936년 2월 선거는 경작지의 몰수와 1936년 2월과 7월 사이의 수백 건의 파업들을 포함하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거대한 격변의 시기를 열었다. 인민전선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진압하기 위하여 강력하게 활동했지만, 부르주아지 주인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는 스페인 주둔군에게 도시를 장악할 것을 통신으로 명령했다. 정부는 노동계급에 의한 어떠한 저항도 막는 한편으로 프랑코 세력들과 협상을 하기 위하여 난리였다. 다음날, PSOE와 PCE 지도자들은 “정부는 명령하고 인민전선은 복종한다”라고 충성스럽게 선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거짓말로 자신들을 달래려고 하는 정부의 노력들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7월 19일에 CNT/FAI와 POUM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무기를 거부당한 노동자들은 소총들과 다이나마이트를 장악하고 군 주둔지들을 포위하여 무장해제 시켰다. 혁명적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수일 내에, 카탈로니아 전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게 되었다. 7월 20일에는 아스투리아스 광산으로부터 공급을 받은 5천명의 다이나마이트 부대가 거리를 지키기 위하여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무장한 노동자위원회들이 국경에 있던 관세사무소원들을 쫓아냈다. 노동조합 증이나 노동계급의 정치정당이 발행한 가입증만 있으면 입국이 허용되었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중요한 부위들, 특히 카탈로니아에 있던 이들은 도망치거나 쫓겨나 프랑코의 군대가 통제하던 지역들에 모여들었다. UGT와 CNT의 공동위원회가 스페인 전역의 운송을 담당했다. 노동자들은 버려진 공장들을 접수하여, 지역 수준에서 생산을 조직했던 집산공장들을 창설했다. 이러한 집산공장들이나 협동조합들은 해상운송, 광산, 전기, 운송, 가스와 수도공급, 그리고 많은 다른 산업들 속에서 조직되었다.

부르주아지 정부는 계속해서 “통치”는 하였으나 권력은 실제로 무장한 노동자들과 그들의 위원회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것은 이중권력의 상황이었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역사적으로 혁명을 예비하는 준혁명적 시기에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구는 여전히 과거의 주인들의 수중에 있지만, 새로운 사회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계급이 비록 아직은 나라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상당한 부분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했던 정세가 조성된다”. 문제는 트로츠키가 불렀던 것처럼 이 “양면의 통치권”이 혁명에 이롭게 해결되는가 아니면 반혁명에 이롭게 해결되는가 였다. 트로츠키는 2월과 10월 혁명들의 사이의 시기 러시아에서 “문제는 그렇게 제기되었다”고 설명했다.

“부르주아지 계급이 실제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살짝 바꾸면서 과거의 국가기구를 장악하게 될 것인지 (이 경우 소비에트들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면 과거의 정부 기구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정부 기구가 봉사했던 그 계급의 지배까지 일소하면서 소비에트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할 것인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가들[SRs]은 첫 번째 해결책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는 두 번째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승리했다.”

러시아 혁명적 역사(뉴욕, 사이먼과 셔스터 출판사, 1932년)

그러나 스페인에는 볼셰비키 당이 없었다. 스탈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혁명”의 이름으로 무기를 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부터 빼앗은 권력을 되돌려 줄 것을 부르주아지 계급과 함께 호소했다. CNT 지도자 가르시아 올리버(Garcia Oliver)가 상술했던 것처럼,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카탈로니아 에스쿠에라(Catalan Esquerra)의 지도자 루이스 컴패니스(Luis Companys)는 노동자들이 프랑코를 물리친 후에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의 회합에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당신들이 승리했고 모든 것이 당신들 권력 안에 있다. 만약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만약 당신들이 카탈로니아 대통령으로서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아니라고 말해라. 그러면, 나는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한 병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반면 만약 당신들이 오늘 이 도시에서는 결의되었지만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직 결정되지 못한 투쟁 속에서 나의 당원들, 나의 이름과 나의 신망과 더불어 내가 이 사무실에 있는 것이 효용이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들은 카탈로니아가 세상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선진화된 국가들의 전위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리라는 진실한 소망 속에서 부끄러운 과거가 오늘 영면에 들었다고 확신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 정치인으로서 나와 내가 한 말을 믿어도 된다.”

- Jose Periats Valls의 “스페인혁명에서의 CNT”(해스팅스, 잉글랜드, 멜쳐 출판사, 2001)에서 인용

이것이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듣고 싶어했던 모든 것이었다. 가르시아 올리버는 “무정부주의자 연합 독재로 혁명을 목졸라 죽이는 것으로 귀결될 혁명적 전체주의를 피하던 CNT와 FAI는 협조과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그들은 카탈로니아 민주주의자의 말을 믿었고 자치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컴패니스를 유지시켰고 그를 지지했다.”로 그의 설명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볼셰비키 전위의 부재 속에서의 이중권력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와는 달리, 스페인에서의 다양한 공장위원회와 민병대 위원회들은 일반적으로 선출되지 않았고, 그들의 구성과 성격이 어떤 그룹이 통제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 다양했다. 이것들을 공장과 요새들로부터 대표들의 선출, 즉각적 소환에 대한 종속을 통하여 진짜 소비에트들로 변형시키고, 전국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맞서는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기관들로 중앙집중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오직 이중권력이 그러한 조직적 규모을 갖출 때에만, 현재의 우세한 정권과 위원회들이 국가의 형식이 되는 새로운 혁명적 질서 사이에서의 선택이 일정에 올려지게 된다” (모로우, 스페인에서의혁명과반혁명).

반파시스트 민병대(CCMA)의 중앙위원회는 카탈로니아 노동자위원회들의 네트워크의 정점에 있었다. 1936년 7월 21일 15인 위원회로 설립된 CCMA는 CNT, UGT와 기타 노동자 조직의 대표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에스쿠에라의 대표들까지 포함했다. 에스쿠에라가 포함되어 있는 조건에서, 좌익 무정부주의 두루티의 친구들에 대한 소중한 평가에서 역사가 어커스틴 귈라몬(Agustin Guillamon)은 “어떤점에서도이중권력정세는존재하지않았다. 이것이 스페인 혁명과 내전에 대한 어떠한 이해에 대해서도 결정적이다. CAMC는 계급협조주의적 대행자였다.”(두루티의친구들그룹:1937-1939 [샌프란시스코: AK 출판사, 1996])고 주장했다.

CCMA에 에스쿠에라를 포함시킨 것은 개량주의와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의 계급협조적 정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CCMA가 곧바로 인민전선정부에 의해 분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증명되듯이, CCMA는 단순히 인민전선 정부의 확장은 아니었다. 모로우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과거의 국가 기제에 실제로 의존하는 연합정부와는 달리,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중앙위원회는 노동자 조직들과 민병대들에 의존했다. 에스쿠에라와 에스쿠에라에 가장 가까왔던 자들 -스탈린주의자들과 UGT - 은 당분간 단지 따라다닐 뿐이었다. 중앙위원회의 포고들은 카탈로니아에서 유일한 법이었다. 컴패니스는 의문의 여지없이 중앙위원회의 명령들과 재정적 지시들에 복종했다. 아마도 민병대들을 조직하기 위한 중앙으로서 시작했지만, 중앙위원회는 필연적으로 점점 더 많은 정부적 기능들을 맡아야만 했다. 곧 중앙위원회는 노동자 경찰국을 조직했고, 보급국을 조직했는데, 보급국의 말은 공장과 항만에서는 법이었다....

“민병대들의 중앙위원회의 주변에는, 다양한 반파시스트 조직들의 합동위원회들의 형식으로 공장, 마을, 보급, 식량, 경찰 등등의 여러 위원회들이 집결했는데 실제로는 합동위원회들이 각각의 구성부분들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했다. 물론, 첫 번째 혁명의 파도 이후 위원회들은 그것들의 기본적인 허약함을 드러냈다. 위원회들은 조직들의 상호 합의에 기초했는데, 이 합의로부터 성원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첫 몇 주가 지난 후에 스탈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에스쿠에라가 자신감을 회복했고, 자기 자신들의 강령을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CNT 지도자들은 혁명에 해로운 양보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는 위원회들은 상호합의의 방식을 포기하고 민병대들과 공장들로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의원들에 의한 다수결 결정의 방식을 수용함으로써만 오직 진보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모로우, 인용된 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들을 목졸라 죽이고 있던 계급협조주의적 정치들에 맞서는 투쟁의 구체적인 표현은 에스쿠에라를 CCMA로부터 축출하라는 요구였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프랑코에 맞선 투쟁 속에서 에스쿠에라에 의해 무기를 거부당했던, 프랑코 세력들을 노동자들이 물리친 이후 무정부주의와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이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들” 쪽으로 돌아가 그들을 신봉했던 것을 목격했던 전투적인 카탈로니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심금을 강하게 울렸을 것이다. CCMA로부터 에스쿠에라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잘못된 지도자들의 배신을 폭로하고, 그래서 노동자권력의 기치와 혁명정당의 건설을 위한 투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획득하기 위한 지렛대로서 복무하는 날카로운 계급 전선을 형성해 냈을 것이다.

동시에, 단순히 CCMA로부터 부르주아지 계급의 대표들을 축출해낸다는 것은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POUM은 자신들이 강했던 레리다(Lerida)에서 지역 노동자 위원회로부터 에스쿠에라의 대표자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POUM은 인민전선에 굴복했고, 노동자, 농민, 민병대의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평의회의 건설에 반대했다. 심지어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공장과 민병대 부대들에서의 그러한 위원회들의 선출조차 거부했다.

닌은 그런 폭넓고 권위적인 계급투쟁의 기구들은 러시아에서 등장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투쟁의 전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바보 같은 주장을 하면서 스페인에서는 소비에트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조직과 투쟁의 전통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노동조합들, 자기 자신의 당들, 자기 자신의 조직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비에트가 우리들 사이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권력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1937년 4월 27일 La Batalla, 모로우의 인용된 책으로부터 인용). 이것은 CNT와 다른 경향들과의 정치투쟁을 위한 닌의 의욕부족의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POUM의 능력이 POUM에게 실질적인 권위를 주었다. 이 권위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해제하고 CCMA와 지방 노동자위원회들을 용해시키는 것에 사용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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