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국제공산주의동맹의 글_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_8부_트로츠키주의 대 SWP 수정주의

가디언에 대한 응답

왜곡의 스탈린 유파에 대한 재고찰

 

8부 트로츠키주의 대 SWP 수정주의

 

 

“트로츠키의 유산”에 관한 가이던 시리즈의 마지막 4개의 글들은 스탈린주의 노동자 당과 이 보다는 덜한 정도로 노동자동맹(WL)의 현재의 정책들에 관하여 검토하면서 트로츠키주의가 개량주의이며 “반혁명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바쳐진다. 어떤 글도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에 관하여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때는 제4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당이었던 SWP는 훨씬 이전에 개량주의의 늪을 위하여 혁명적 트로츠키주의의 길을 포기했다. 가장 먼저는 “권력으로 향하는 게릴라적 길”을 예측함으로써 1961-63년에 카스트로주의에, “일관된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로 결과할 것이라는 이론을 가지고 흑인 민족주의에 보조를 맞추고,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장악된 인민전선 반전운동의 조직자가 되면서 SWP는 1965년에 개량주의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때 이래 SWP는 흑인들 (공동체 통제)과 여성들로부터 동생애들과 미국 인디언들에 이르기까지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기결정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위한 단일 이슈 운동들을 조직하면서 새로운 영역들 속으로 이 계급 협조주의를 확장해왔다.

 

반면 WL이라는 정치 깡패들은 그 순간에 유행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휴이 뉴튼, 홍위병들, 호지명, 아랍 민족주의자들, 좌익 언사를 늘어놓는 노동조합 관료들) 그것에 일시적으로 순응하려고 자신들의 정치적 노선을 지속적으로 바꾸고, 잠시 후에 고작 보다 “정통의”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미국 사회주의 좌익에 자신들의 자국을 남겨왔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모든 것이 다 망라되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이행의 강령이라는 볼셰비키 정치들을 위하여 투쟁할 필요성을 제거할 것이라는 믿음과 사이비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초 보수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종류의 노동자 협잡꾼이라도 추종하려는 항구적인 열정이다.

 

그래서 SWP와 WL의 정책들을 인용함으로써 트로츠키주의가 개량주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레닌이 후르시쵸프를 인용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길”에 찬성했음을 “증명하는” 것만큼의 대략의 가치를 지닌다.

 

 

여성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지난 10년 동안의 SWP의 부패한 배신들 때문에, 많은 투사들의 마음속에서 트로츠키주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에게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 가장 어리석은 개량주의자와 혼동되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대이비드슨과 같은 모[택동]주의자들에게 올바른 공격들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SWP의]의 접근은 대중적인 민주주의 운동들에서의 각각의 즉자적 발전을 기회주의적으로 쫓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젠 각각의 지지자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로 지도하는, 각각의 부분들에서 ‘전위의 전위’는 현재는 청년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추가 규정을 가지는 ‘전위’라는 호칭을 듣는다.

-가디언, 1973년 6월 13일

 

이전에 SWP의 유럽 친구들에 의하여 “개입 부위들의 변증법”으로 불렸던 이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의 부정이며, 여성주의, 민족주의, 학생의 힘 등에 대한 그들의 강령적 굴복에서 표현된다. 다른 곳에서, 대이비드슨은 흑인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민족주의를 추종한다고 SWP를, 그리고 노동귀족의 배외주의를 추종한다고 WL을 비판했다(가디언, 1973년 5월 30일). 다시 한 번 이것은 옳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저급한 것이다 -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맑스주의 강령을 향한 최소한의 발걸음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SWP가 소부르주아지 여성주의자들을 추종한다고 비판한 이후, 대이비드슨은 “여성해방을 위한 대중적 민주주의 투쟁”을 대치시킨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인데,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단지 “민주주의적”인 (그리고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부르주아지 가족의 유지(간단하게 “가정에서의 책임들을 남편들이 동등하게 분담하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가족을 “개혁하는 것”)와 “심지어는 착취계급들의 여성들”과의 동맹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SL[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체현한다

 

부르주아지 평화주의에 굴복하기는커녕, SL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계급-투쟁적 반대,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파업들, 반전운동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의 축출, NLF에 대한 군사적 지지, 인도차이나 전체의 공산주의로의 전진을 요구한다. 그리고 SL만이 유일하게 소부르주아지의 징병거부 대신에 군대에서 공산주의적 활동을 일관되게 주창하였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에 굴복하기 보다는, SL은 인종적 기초에서의 모든 차별을 끝장낼 것, 지역공동체 통제와 차별적 고용에 대한 반대, 통합된 계급투쟁의 강령에 기초한 과도적인 흑인 조직을 요구했다.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SL은 부르주아지 여성주의와 다양한 노동자주의 그룹들의 똑같이 반동적인 추상주의에 대한 굴복 반대했다: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하여 구상된 것과 같이,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여성해방을, 여성운동으로부터 부르주아지 정치인들의 축출을, 요구에 기초한 낙태의 자유를 요구했고, SL 여성지부의 궁극적 창설이라는 전망을 채택했다.

 

모든 껍데기뿐인 맑스주의 조직들 가운데 혼자서만, SL은 조직적으로는 별개지만 정치적으로는 당에 종속되는 청년 지부(혁명적 공산주의 청년, RCY[현재는 스파르타쿠스 청년 동맹, SYL]와 함께 레닌주의적 청년-당 관계들을 고수해왔다.

 

민족주의 대 계급투쟁

 

흑인 민족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대이비드슨은 소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을...추종한다고 SWP를 비판하고, 그리고는 미국의 흑인들은 하나의 민족을 구성하며 분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선언한다. 미국에서 “흑인 국가”라는 민족주의 이론은 흑인들(그리고 기타 인종적 민족체적 소수자들)이 비록 압도적으로 최하위 층들에서 이기는 하지만 완전하게 미국 경제에 통합되어 있으며, 어떠한 공통의 영토나 특별한 언어나 혹은 문화를 가지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가비 추종자들의 “아프리카로의 복귀”, 흑인 국가 이론, 그리고 기타 모든 형태의 흑인 분리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고, 가장 착취당하고 잠재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부문을 별도의 목적들을 위하여 투쟁하는 별도의 조직들로 고립시키는 주요한 효과를 지닌다. 지역공동체 통제에 대한 열망을 가진 SWP와 대이비드슨의 10월 동맹 같은 모[택동]주의자들과 흑인국가라는 반동적인-공상적인 관념들을 가진 공산주의동맹 모두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 계급에 긴박시키는데 복무한다. 흑인 정치정당에 대한 SWP의 열정은 그들을 (1971년 개리 대회와 같은) 흑인 민주당의 떠들썩한 회합에 열광하게 하는 한편, 흑인-국가 분리주의는 포드 재단의 지원을 받는 뉴와크의 이마무 바라카(레오리 존스) 같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선동가들을 돕는다.

 

미국 좌익들의 폭넓은 부분들에 의한 흑인 민족주의에 대한 굴복은 부분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이 가장 착취당하는 부위가 참으로 미국 사회주의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흑인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잠재적 지도부위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가장 선진적인 인자들의 하나의 전위당으로의 통합과 흑인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통합된 계급투쟁의 강령을 위한 가차 없는 투쟁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중으로 억압받는 부위들 사이에서의 활동의 특수한 방책들을 위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SL은 흑인 분리주의에 대한 양보로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흑인 대중들 가운데서 민족주의와 더 잘 투쟁하기 위하여 과도적인 흑인 조직을 요구해왔다(“흑(黑)과 적(赤) - 니그로[원문 그대로] 해방을 향한 계급투쟁의 길”, 스파르타시스트, 1967년 5-6월).

 

 

레닌주의 대 노동자주의

 

1969년 후반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의 웨더만-RYMⅡ[혁명적 청년운동 Ⅱ] 지부의 소멸 이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소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지배적인 형태들로서의 조악한 노동자주의가 흑인 민족주의와 여성주의에 합류했다. 노동계급의 현재의 후진적인 의식성에 순응하면서, 노동자주의자들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수준에서 조직화함으로써 즉각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추구해왔다. 사회주의적 의식성은 혁명정당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노동계급으로 가져가져야만 한다는 레닌의 언명을 유념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일부 경우들에서는 부정하면서), 오늘날 급진적 노동자주의자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개량주의 공산당의 그것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노동조합 활동을 수행한다. 전투적인 언사를 내뱉는 모든 권력을 가지지 않은 관료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권력을 가진 관료들의 꽁무니에 서서, 그들은 캠퍼스들을 위하여 NLF, 모[택동] 등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아껴두면서, 노동조합들 안에서는 정치투쟁을 수행하지 않는다.

 

껍데기뿐인 트로츠키주의 조직들 중에서, 노동자주의는 노동조합들 안에서 이행의 강령 전반을 위하여 투쟁할 필요성을 부인하는 형태를 취해왔다. 일부 가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임금 요구 하나만이 혁명적이라고(노동자동맹), 이행의 강령은 부분 부분으로, 한 번에 한 방침씩 노동자들에게 복무되어야만 한다고(계급투쟁동맹) 주장하며, 다른 조직들은 여전히 이행의 강령을 말로는 선포하지만 권력을 위한 전략을 모든 가능한 전직 관료를 “비판적 지지” 하는 것에 기초한 것으로서 바라본다(혁명적 사회주의동맹). SWP는 그 나름대로 노동조합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며, 자신의 기관지에서 권력을 가진 쪽과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쪽 양쪽 모두의 자유주의적 관료들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를 한다.

 

반대로,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은 노동조합들의 지도부를 위하여 투쟁하기 위한 이행의 강령에 기초한 활동가 조직을 요구한다. 기꺼이 특정 투쟁들에서 공동전선들을 형성하고자 하는 한편으로, SL은 근본적인 임무를 단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반대파의 창출로 여긴다. 트로츠키와 더불어, 우리는 이행의 강령이 노동조합들에서의 투쟁을 위한 강령임을 단언한다. 이것이 모든 활동가 강령이 반드시 SL의 원칙들에 대한 선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어야만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특정 정세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성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가장 잘 복무하는 그러한 요구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행의 요구들이라는 활동가 강령이 전투적 개량주의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정치적 전망을 담는다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대이비드슨은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은 결국에는 “반(反)공산주의”가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1940년 트로츠키의 SWP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인용한다. 최근 우리는 “진보적” 관료들과의 블럭들에 관한 일방적인 강조와 노동조합들 안에서 공산주의적 기둥을 세워내는 것에서의 실패라는 SWP의 정책에 대한 우리의 비판들을 자세히 풀어내는 “노동조합들에서 트로츠키주의적 활동”(노동자전위 25-28호)에 관한 일련의 글들을 출판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동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에 집중했던 것은 완전하게 올바른 것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운동 내부에 있는 루즈벨트의 대리인들이었고, 2차 세계대전 동안 무파업 서약의 작성자들이요 집행자들이었다. 물론, 누구도 그들의 노동조합 활동에서 공산당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10월동맹이나 혁명적 노동조합(혹은 또한 어떤 전투적 개량주의 관료)에 있는 대이비드슨의 친구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한결같이 (농업노동자들[Farmworkers]의 차베즈 같은) 권력을 가진 좌파 관료들을 지지했고, 현직의 지도부가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환상들을 불러일으키기에도 너무나 보수적일 때에는 권력을 잃은 관료들과 블럭을 맺었다.

 

그 시리즈의 보다 초기 글들에 있는 트로츠키의 입장들에 대한 왜곡이라는 자신의 패턴에 일치하게, 대이비드슨은 SWP의 스탈린주의자들에 맞서는 “진보적”인 관료들과의 블럭 맺기라는 실천을 트로츠키가 옹호했다는 인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다. 그렇지 않다! 1940년에 트로츠키는 명시적으로 친 루즈벨트 노동조합주의자들을 향한 관대함을 이유로 SWP를 비판했고, 공산당 대오들을 향한 방침을 역설했다.

 

 

제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한 투쟁

 

볼셰비키주의로부터 중도주의로의 SWP의 퇴행은 1961년 어떤 날 하루에 간단히 발생했던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제4 인터내셔널의 강령적(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직적) 퇴행의 과정의 결과였다. 1953년 통합된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정당의 조직적 해소를 의미했던 FI[제4 인터내셔널]의 분리가 임계점이었다. 제4 인터내셔널 국제 서기국 의장이었던 마이클 파블로에 의하여 제기되었던 (새로운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중도주의적인 것으로 새롭게 이름을 붙였던) 개량주의 스탈린주의 정당들 속으로의 “깊은 입당”이라는 강령이 분리의 중심에 있었다. 파블로는 혁명적 지도부의 위기를 혁명에 대한 핵심적인 장애물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며, 제4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그 해결책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는커녕, 그는 자본주를 뒤덮고 있는 위기가 (그의 “전쟁-혁명 테제”) 스탈린주의자들이 적어도 기형화된 혁명들은 떠맡도록 강제할 것이라는 객관적주의적 이론을 채택했다. 그래서 파블로의 FI 3차 대회(1951년)의 “국제적 전망에 관한 테제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결국에는 객관적 조건들이 특정한 단계에 도달한다면 혁명의 길에 있는 모든 주체적인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중운동의 성격과 원동력을 결정한다.”

- 제4 인터내셔널, 1951년 8-9월

 

파블로의 노선의 함의가 지배적의 스탈린주의와 사회 민주주의적 정당들로의 FI의 청산임이 분명해졌을 때, 그리고 이것이 SWP에 그 자신의 내부에 있던 (코크란과 클라크가 이끌던) 청산주의적 친 파블로 분파에 의하여 분명해졌을 때, 당 다수파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제임스 캐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파블로주의 수정주의의 본질은 트로츠키주의의 일부, 오늘날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당의 문제로 요약되는 노동운동 지도부의 위기로서의 인류의 위기라는 개념의 전복이다.”

- “분파 투쟁과 당 지도부”, 1953년 11월

 

1953년 파블로주의 수정주의에 의한 FI의 조직적 파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체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던 다수의 요소들의 결과로서 발생했으나, 특히 유럽 지부들이 그러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실질적으로 그들의 전쟁 이전 지도부 전체가 나찌의 게스타포나 혹은 스탈린주의 GPU에 의하여 살해당했었다. 트로츠키와 함께하는 살아 있는 연속성이 사실상 단절되었다. 게다가 그 지부들은 상당수가 살해되었고 대개는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되었었던 반면, 스탈린주의자들은 반(反) 히틀러 민병대 투쟁들의 지도부를 통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동유럽에서 러시아 군대의 보호 아래 수립될 수 있었고, 중국에서의 농민기반의 봉기가 자본주의의 타도와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이들 예상치 못한 전개들에 직면하여,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최초의 반응은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정권들은 여전히 자본주의였다는 것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55년까지는 중국이 기형화된 노동자국가가 되었다고 판결내리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스탈린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변증법적 이해를 천박하게 만들면서,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들이 더 이상 현실에 적합하지 않을 때까지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 방향감각 상실이 파블로 주변의 수정주의 경향으로 하여금 동유럽에서의 제한적인 사회적 이행들로부터 비 프롤레타리아트, 비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이 어떠한 형태의 사회혁명이라도 지도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리면서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열망들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온전한 지도부와 증가된 당원들과 노동계급과의 유대를 가진 채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빠져나왔고, 아직 스탈린주의자들이 유럽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허약했기 때문에, SWP는 이러한 과정들로부터 가장 적게 영향을 받았다.1953년에 SWP가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위한 투쟁을 이끌어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SWP]은 1950년대 후반까지는 어떠한 국제적 활동으로부터도 실질적으로 철수하면서, 실제로는 단지 절반의 투쟁만을 수행했다. SWP가 파블로에 반대했던 프랑스와 영국 다수파와 함께 만들었던 “국제 위원회”는 거의 전혀 활동을 하지 않았다. 당이 코크란-클라크 투쟁에서 자신의 실질적인 노동조합 중핵 전체를 잃게 되자, 그리고 자신의 전체 조직원들의 더 많은 부분이 매카시의 나날들 동안에 떠나자, 지도부는 1950년대 후반에 대중적 영향력을 재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이 매달릴 수 있는 일부 세력이나 운동을 찾아서 오른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은 라틴 아메리카 전반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공감의 물결을 일으켰던 쿠바 혁명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당 지도부는 비록 아직까지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건강한 노동자 국가였으며, 피델 카스트로는 타고난 맑스주의자라고 선언했다(즉 비록 그가 처음에는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 이후에는 스탈린주의자로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처럼 행동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놀랍지도 않게, 이것은 유럽에서 파블로주의자들에 의하여 취해진 것과 똑같은 노선이었다. 만약 소부르주아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들이 동유럽에서 사회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면, 카스트로 같은 소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렇게 해서, 실천적으로 SWP는 파블로주의 노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SWP 내부에서 쿠바를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로 간주했고, SWP 지도부의 카스트로와 유럽 파블로주의자들에 대한 굴복을 비판했던 반대파(혁명적 경향,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의 전신) 하나가 형성되었다. 1963년에 RT[혁명적 경향]은 “통합 서기국”을 만들기 위한 유럽 파블로주의자들과 SWP의 재통합을 위한 기초였던 다수파의 문서에 대한 반테제(“제4 인터내셔널의 재탄생을 향하여”)를 제출했다. 당 다수파가 농민에 기반하는 “권력으로 향하는 게릴라적 길”을 지지했던 반면, RT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농경혁명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지도할 수 있다는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을 옹호했다.

 

RT는 다수파의 파블로주의자들의 소부르주아지 세력들에 대한 추종에 대한 혁명적 반대를 이유로 1963년 SWP로부터 축출되었다. 그 이후로 SWP의 정책들과 스파르타시스트 그룹의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간격은 계속해서 넓어졌다. 한 때는 트로츠키주의였던 SWP는 이번에는 흑인 민족주의에, 부르주아지 평화주의와 여성주의에 굴복했고, 이 점에서 오늘날 SWP는 미국의 지배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되고자 하는 기호들을 가진 견고해진 개량주의 조직이다.

 

우리는 이 패배들의 역사로부터 그것이 스탈린주의적 기원에서 비롯하건 아니면 과거 한 때의 트로츠키주의로부터 비롯하건 수정주의는 똑같은 결과들을 낳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가디언이 방어하는 모[택동]주의는 SWP의 수정주의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제공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NPAC, WONAAC)와 연합한 SWP의 단일 사안의 개량주의적 운동들 대신에, 모[택동]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PCPJ)와 연합한 복수 사안의 개량주의적 운동을 제안한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스탈린주의, 파블로주의 수정주의와의 명확한 결별과 미국에서는 오직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에 의해서만 체현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립성이라는 맑스주의 강령으로의 복귀이다. 국제적으로 이것은 FI 재건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강령적으로 통합된 민주주의적 중앙 집중주의적 트로츠키주의 경향을 위한 가차 없는 투쟁을 의미한다.

 

파블로주의를 타도하라!

제4 인터내셔널의 재탄생을 위하여!

 

1975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던 이 팜플렛은 1973년 6월 22일부터 1973년 10월 12일까지 노동자 전위 23-30호에 시리즈로 등장했던 8개의 기사들을 포함한다. WV[노동자 전위]는 스파르타시스트 동맹의 신문이다. 스파르타시스트 청년 동맹은 SL의 청년 지부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