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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7 – 높은 벽 앞에서의 반복적인 자해

 

이번 모임에서는 자해를 통해서 자신의 절박함을 얘기할 수 밖에 없었던 아주 힘든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얘기와 달리 모임의 분위기는 너무 편안해서 중간에 가벼운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계속되는 모임을 통해 김동수씨 가족들의 힘겨운 얘기를 마음으로 들으며 쌓여가는 신뢰를 서로가 확인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1년 가까이 여러 가지 현실의 문제 앞에서 번번히 높은 벽을 실감하고, 유족들에 대한 관심과는 달리 철저히 소외되기는 하는 처지에 김동수는 지쳐갔다.
2015년 3월 19일 치유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온 김동수는 세월호 생존자인 화물기사 후배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후배는 “돈이 없어서 죽을만큼 힘들다” “가족협의회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형님만 믿고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며 힘든 마음을 털어놓는다. 배·보상 문제 해결이 길어지면서 본인의 심리적 압박도 심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몸과 마음의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불안감까지 덥쳐온 김동수는 “손이라도 잘라서 장애등급이라도 받으면 돈이라도 나오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택 화장실로 들어가 양손에 30여 차례 자해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마침 집에 있었던 큰딸이 그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김동수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큰 딸은 이날 이후 혼자 집에 있기를 두려워하는 등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고, 이 문제로 인해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자해 이후 한 달 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동수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막장드라마를 쓰고 싶다”며 불안하고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큰 파도가 지나가고 배·보상 문제가 조금씩 풀려가는 속에 세월호 특조위가 출범해서 우여곡절 속에 활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세월호 희생자들 속에서 철저히 소외된 김동수에게 세월호 특조위 역시 저 멀리서 별도로 진행되는 활동일 뿐이었다.
그러다 세월호 청문회가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서 “진상규명을 하겠다면서 생존자는 왜 빼냐?”고 따졌다. 그래서 2015년 1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세월호 1차 청문회에 참석하게 된다.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이 그곳에서의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얘기하는 모습에 불만이 쌓여가고, 점심시간에는 청문회장 앞에서 진행되는 어버이연합의 집회를 보면서 울분을 삭혀야했다. 그러다 오후에 해경 관계자들이 나와 너무도 무책임하고 성의없게 답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쌓였던 불만과 울분이 폭발하고 만다. 김동수는 조그만 가위로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하면서 “변명하지 말고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라” “한놈만 미안하다고 해라”며 울부짖었다.
당시에 왜 그렇게 격하게 반응했냐는 질문에 김동수는 “해경들이 답변하는 것을 들으면서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해경들을 죽이지는 못하니까 그냥 내 자신한테 그렇게 하게됐다”고 답변했다.
이 사건으로 세월호 청문회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기는 했지만 일부에서는 “김동수가 청문회를 망쳐버렸다”며 강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동수와 유족들간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갔다.


두 번에 걸친 자해로 생존자들의 문제가 잠시 언론의 조명을 받기는 했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았고 고립은 더욱 심해져갔다. 그러던 가운데 2016년 세월호 2주기가 다가오면서 김동수의 마음은 또다시 심란해진다.
2015년 세월호 1주기 행사 때에도 제주도교육청에서 진행한 행사에 생존자들이 빠져있는 걸 항의한 끝에 참석하게 됐던 경험이 있는 김동수는 2주기 행사는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둘째 딸을 보러간다며 포항으로 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회 지인을 통해 울산에서 세월호 관련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참석하게 됐는데, 온통 미수습자와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로만 채워지는 모임을 지켜보다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포항으로 왔는데 포항에서 2주기 행사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 그 행사에 참석해서 관계자에게 발언을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져서 마이크를 잡고 세월호의 실상을 얘기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고 2년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세월호에 대한 얘기를 했던 순간이다.


그렇게 2주기를 끝내고 제주로 내려온 김동수는 세월호 생존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찾아간다. 2016년 4월 18일의 일이다.
그동안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했던 김동수는 그날도 병원에서 안마를 받고 커피를 마시며 생존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했다. 거의 매일 술에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생존자들의 얘기를 들으며 마음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낀 김동수는 그 답답함과 분노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제주도청을 찾아갔다. 도청 현관 로비에 들어서자 칼로 손과 발 등을 자해하면서 “이 통증 좀 없애줘라”며 울부짖었다.


다시 또 그렇게 극한 선택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2주기가 되어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해결되는 것은 없고 가족들의 고통은 심해져만 갔다”며 너무도 답답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도청을 찾아가 “이곳에서 2주기를 맞는게 너무 힘드니까 2주기 때 외국이라도 좀 보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고 돌아오는 답변은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김동수는 또 다시 그런 방법으로 생존자의 현실에 대해 얘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복되는 자해 속에 주위에서는 “그렇게 어렵게 살아나왔으면서 그런 식으로 죽으려 하느냐?”는 한탄을 하기도 했지만, 김동수는 자신의 행동을 ‘자살시도’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였다. 김동수는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제발 내 얘기 좀 들어달라”며 말하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병원에 입원해 치료는 받는 과정에서 김동수는 더욱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저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고, 아직도 그 때의 일이 또렷한데, 나는 뭐하고 있는거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한테만 이런 고통이 계속되는가.”
“몸은 점점 안 좋아지고, 약은 점점 강해지고,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데...”
“내 딸이 이 못난 아빠 때문에 공무원시험도 보지 못하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질식할 정도로 머리 속을 가득 메운 생각들 끝에 김동수는 다시 칼을 집어들어 자신의 팔에 ‘죄인’이라고 글을 써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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