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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숙의 세월호 증언 1 – 남편이 사람들을 구했다고해서 뿌듯했었는데...

 

이번 모임부터는 김동수씨의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고통에 대한 얘기를 듣습니다.
힘들어하는 당사자 옆에서 그 모든 것을 받아안으며 자신의 힘겨움은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부인인 김형숙씨의 증언을 몇 차례 듣고 김동수씨의 증언을 다시 이어갈 예정입니다.


김형숙이 남편과 함께 활어장사를 할 때는 매일 같이 일을 하면서 싸우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 남편이 큰 마음을 먹고 화물차 운전을 하게 되면서 객지로 자주 나가게 되자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서 챙겨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커서 큰애가 대학에 들어가고 남자친구도 생기고 하는 걸 보며 이런저런 고민도 생겼다. 사는 집도 전세로 옮겨야하고, 나중에 아이들 결혼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일을 했다. 낮에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독서논술 지도선생으로 일을 하고, 휴일에는 교회 일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던 어느날 아침에 아는 분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지금 인천에서 오는 배가 넘어졌다고 그러는데 동수씨 그 배에 탔냐?”는 말에 심드렁하게 “목포배 탄걸로 아는데...”하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남편과의 전날 통화기억을 더듬어보니 남편은 서울에서 짐을 실었다고 했다. 그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큰딸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한 후(그때 큰딸은 소방공무원시험을 3일 앞두고 있었다) 오빠네랑 같이 상황을 알라보러 이동했다. 방송을 믿지 말고 빨리 회사로 찾아가라는 말을 듣기도 해서 회사로 향하는데 오전 9시쯤 회사에서 김동수는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향을 바꿔 제주해경을 찾았지만 제주해경에서는 “진도해경 소관이라서 우리는 자세한 걸 모른다”는 얘기만 들어야했다. 기자들만 잔득 있는 그곳에서 답답한 마음에 “tv라고 좀 보게 해달라”고 하자 민원실로 가라고 해서 민원실로 갔더니 그곳 tv는 고장나있었다. 그래서 다시 다시 숙직실로 가서 tv를 보고 있는 10시 55분경 딸의 휴대폰으로 김동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수신상태가 좋지 않아 전화가 자꾸 끊겨 통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길 반복하다가 11시 10분경 어렵게 통화가 이뤄졌다. 김동수는 “나는 구조됐는데 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남아있다. 내 힘으로는 더 구조하지 못하겠더라”며 상황을 알려왔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나서 큰 한숨을 내쉬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사람들이 곧 구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왔을 때 친척들에게서 남편이 tv에 나왔다는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그저 걱정해주는 전화로 받아들였다.


다음날 남편이 제주로 온다고해서 제주항으로 향했다.
엄청난 수의 기자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배가 도착했고, 거의 마지막으로 남편이 내렸다. 딸들이 달려가 아빠에게 안기며 무사히 살아돌아온 아빠를 반겼다. 그 이후 기자들이 계속 따라다니며 어수선한 속에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다. 화물기사 동료들이 “형님은 꼭 얘기를 해야한다”며 남편이 기자회견에 참가하게 되자 김형숙은 “우리 남편이 뭔가 대단한 일을 했나보네”라는 생각에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남편이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그저 통상적인 절차려니 생각을 하고 입원한 남편을 남겨두고 일을 나갔다. 그날 아는 분이 “그런 일을 겪고나면 분명히 트라우마가 찾아올테니까 잘 지켜봐라”는 얘기를 해줬지만 남편의 모습이 그렇게 심각해보이지 않아서 심드렁하게 넘겨버렸다. 일을 마치고 병원을 찾아갔을 때도 동료들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트라우라가 뭔지도 몰랐다.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목욕을 하고 오겠다고 나간 남편이 얼마되지 않아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우리는 아직도 차가운데 있는데, 아저씨는 따뜻한 곳에 있네요’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서 목욕을 못했어”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며 “이 사림이 왜 이럴까”하며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남편은 tv를 잘 보지도 않고 어느 순간부터는 잠도 잘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편이 사람들을 구조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배로 옮기는 과정을 도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후 tv에서 소방호수를 잡아당기며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남편의 모습이 나오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간 이후 사람들에게서 전화들이 많이 걸려오기도 해서 남편의 심각함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람을 구했다는 뿌듯함이 더 앞섰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수술도 받고 한 달여만에 퇴원을 한 남편은 진도에 가서 자원봉사라도 하고 와야겠다며 딸들과 함께 진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남편의 상태가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치료와 사고대책 등으로 바빴고,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상황이 되버린 김형숙은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그때 왜 부인에게 자신의 심각함을 얘기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동수는 “처음에는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가족들한테 얘기해봐야 괜히 마음만 아파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이후에도 남편은 병원을 자주 드나들면서도 동료기사들과 나쁘게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김형숙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자주 산책을 나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김동수는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으로만 거닐려고 했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이르면 “세상이 왜 나한테 이러냐”면서 악을 쓰며 욕을 쏟아냈다.
김동수는 “사람들을 만나면 ‘빨리 잊어라’라는 얘기만 하는데 그 일을 어떻게 잊으란 말이냐. 그때 세상과 싸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욕을 하면서라도 풀어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김형숙은 그런 남편의 모습이 너무 무섭고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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