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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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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읽는 라디오 ‘살자’를 진행하고 있는 성민입니다.
뜨거운 여름이 맹위를 떨치는 요즘 어떻게들 지내시나요?
실제 더위보다 언론의 설레발이 더 요란스러워서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다들 잘 견디고 계시겠죠?
오늘 방송은 여름나기에 대해 얘기해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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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4년차 초보농부가 작년부터 감귤농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동안 부모님이 해오시던 걸 본격적으로 맡아서 하고 있는데
과수농사라는 게 초짜가 하기에는 엄청 힘들다는 걸 알아가고 있습니다.


감귤수확을 마치면 감벌과 유인과 정전을 해야 합니다.
감벌이야 나무 한그루를 통째로 잘라내는 것이어서 어렵지 않은데
나뭇가지를 살피고 모양을 만들어가야 하는 유인과 정전은 두려움 속에 해야합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도 받고 아는 분에게 조언도 듣지만
나뭇가지를 움직이고 잘라내야 하는 일은 항상 무섭습니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어설프게 유인과 정전을 마치면 여름이 됩니다.
여름은 나무도 잘 자라지만 잡초와 병해충도 활발해지는 때입니다.
잡초야 도 닦는다는 생각으로 매일 뽑으면 되는 것인데
병해충 방제는 또 다른 두려움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는 진딧물, 응애, 나방을 찾아내서 제때에 방제해야 하는데
이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나뭇잎이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하루하루 나뭇잎을 살피며 긴장의 연속입니다.


작년에는 물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 여파가 올해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물조절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하우스 주변에 비닐이 찢어진 곳이 없는지도 가끔 살펴야 하고
하우스 시설에 녹슬거나 부서진 곳이 없는지도 살펴서 제때에 고치기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초짜에게는 긴장을 해야하는 일들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는 분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사소한 것들이겠지만 제게는 심각한 일들이어서 항상 두렵거든요.
그런데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서 물어볼 때마다 신경도 쓰입니다.
‘너무 자주 물어봐서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도 그때마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때로는 너무 장황하게 설명해주셔서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항상 그렇게 설명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엄청난 위안이 됩니다.


감귤농사를 10년쯤해야 나무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했는데
2년차인 저는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배워가야겠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감귤나무에 대해 이렇궁저렁궁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저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야겠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긴장 속에 보내는 여름은 더위를 걱정할 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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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사랑이와 산책을 하고 나서 광주리를 들고 텃밭을 돌아봅니다.
그러고나면 각종 야채가 광주리에 가득합니다.
본격적으로 하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렇게 즐거움을 먼저 만끽하지요.
얼마 전부터는 수박과 참외까지 먹을 수 있게 돼서 풍성한 여름을 원없이 즐기고 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마치고나서 샤워를 한 후
아침에 수확한 채소와 과일들로 반찬을 만들고 냉국도 만듭니다.
그렇게 싱싱한 식사를 하고 있으면 보양식이 따로 없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올해 임순례 감독 버전으로 개봉하기도 했는데
저는 작년에 일본영화로 봤었습니다.
도시생활을 하다 상처를 안고 시골로 내려온 이가
직접 농사를 짓고 그 수확물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내용은 아주 단순한데 그 잔잔한 정서가 너무 좋았던 영화였습니다.


왜 ‘리틀 포레스트’ 얘기를 꺼냈는지 아시겠지요?
저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맛깔스러운 요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제가 재배하고 수확한 것들로 마련된 밥상을 대하고 있으면
저도 영화 속 주인공 못지 않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어가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마음의 찌꺼기들을 걸러내려고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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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쯤 저녁을 먹고나면 한낮의 뜨거웠던 열기가 조금은 사그라듭니다.
그러면 사랑이와 같이 저녁 산책을 나갑니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나름 알차게 보낸 하루를 갈무리하는 시간이지요.


산책길에 있는 퐁낭 아래에는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차려졌습니다.
저는 원래 이 마을 출신도 아닌데다가 싸가지가 없어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면 뒤에서 저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흘려버리지요.


매일같이 그 시간에 사랑이와 산책을 하다보니 알아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퐁낭 아래 어르신들이 말을 붙여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가볍게 댓구를 하고 지나가지요.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아는 척하는 게 귀찮았었는데
이제는 저와 사랑이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게 싫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저녁 산책길에 시원한 매실액기스를 한통 들고 나갔습니다.
퐁낭 아래 다가가서 어르신들에게 드시라고 드렸지요.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더군요.


그후로도 퐁낭을 지날 때면 여전히 인사도 없이 지나지만
서로 가볍게 말이 오고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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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이래저래 하루를 보내고
한낮의 뜨거웠던 열기도 가라앉은 저녁 8시
서서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하는데


가끔 막걸리를 한 잔 합니다.
아침에 딴 토마토로 안주를 삼습니다.
사랑이는 벗이고요.


보통 9시면 잠을 자는데
이렇게 한 잔 하는 날은
한 두 시간 늦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서 밤의 여흥을 즐기지요.


음악도 듣고,
달도 보고,
사랑이도 쓰다듬고,
머리 속 생각들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혼자 먹는 술이 외롭지는 않은데
잦아지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으로 조절하려고 노력은 합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날씨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늘어서 살짝 고민스럽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의 하루가 마무리됩니다.

 


(박하재홍의 '하쿠나마타타' feat. 한정훈 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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