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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47회


1


정수기가 고장나서 a/s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리기사님이 고장원인을 찾지 못해서 보름 동안 애를 먹고 있습니다.
고치고 가면 또 고장나고, 그러면 다시 a/s를 신청하는 일이 반복됐지요.
그러다보니 저도 그렇고 기사님도 그렇고 서로 민감해지는 상황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고객인 저는 갑의 입장에 있습니다.
기사님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일텐데 당연히 을이나 병의 입장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행동과 말 한마디가 이분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름 조심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반복되는 a/s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해결방안을 속시원히 내놓는 것도 아니고
일처리도 빠르게 되지 않는 과정이 이어지다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네 번째로 a/s를 받은 후 다시 고장이 나자
고객센터로 전화해서 기사교체를 요청하게 됐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건조하게 말한다고 했지만
항의성 전화였기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고객센턴에서 전화를 반는 분도 조심스러워했고
a/s기사님도 더 조심스럽게 대응하기는 했지만
갑의 요구에 을들은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하면서 서비스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들은 얘기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비정규직들의 처지는 말할 나위도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이들에게 불합리한 조치가 없었을텐데”하는 후회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까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참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자기합리화도 해봅니다.
그런데도 한없이 공손하고 죄송해하는 이들의 태도가 마음을 불변하게 합니다.

 

2


지난 여름 동안 몸에 배였던 습관들을 고치고 있습니다.
더워서 하지 못했던 이러저러한 것들을 다시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마지막 더위가 계속 이어져서 그것도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헤헤헤
그대신 더워서 했던 것들을 줄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이 것이 음주입니다.


술은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조절하려고 하고 있는데
여름밤에 시원한 막걸리나 맥주 생각이 자주 나서
여름에는 일주일에 2~3회씩 술을 마시게 되더군요.
폭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주 술을 먹다보니 몸에서 신호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 1회 정도로 줄이려도 했는데 계속되는 더위에 조절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습니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술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내가 술을 즐겨야 하는데, 술이 나를 즐기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술을 먹지 않고 지낸지 열흘 정도 됐는데 특별히 힘든 건 없습니다.
다행히 몸이 술을 요구하는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는 소리지요.


몸은 술을 요구하지 않는데 마음은 수시로 술을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모질게 마음을 다잡아보기도 하고,
애써 무시해보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그냥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는데
이 녀석이 틈만나면 고개를 들어 저를 꼬시려하거든요.
술을 찾는 이 녀석이랑 이렇게 투닥투닥거리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 녀석이 외로워서 어딘가에 잠시 의지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요.
이 녀석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너무 나무라지 않고 살살 달래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은 처리해야할 일들이 많아서
좀 분주하기도 했고 때로는 심란하기도 했는데
마음이라는 녀석과 밀고 당기고 하면서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이제 9월이 됐으니 서서히 가을을 즐겨야겠지요.
내 마음이랑 같이 여유롭게.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름 동안 원없이 먹었던 수박, 참외, 호박 줄기를 걷었습니다.
줄기를 걷어내는데만 한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조그만 묘종 몇 개를 사다가 심었는데 이렇게 왕성하게 자랐다는 게 신기합니다.
그것도 넉달만에.
그 신기함을 즐기고 배우는 것도 농사를 짓는 재미입니다.


이제 잠시 땅이 쉬게 놓아두었다가
슬슬 겨울작물을 심기 시작해야합니다.
여름작물처럼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모진 추위 속에 자라나는 생명력도 만만치 않게 신기하거든요.

 

https://youtu.be/uaP8_eC_VTw (박은옥의 ‘윙윙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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