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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소녀, 오래간만에 본 힘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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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힘있는 영화를 봤다.

 

같은 반에 친구가 사라졌고, 사람들이 한 명을 의심했다.
의심받는 친구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몰아세웠다.
궁지에 몰린 그는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더욱 가혹하게 몰아쳤다.
실종이 길어지며 어른들은 적당히 덮어서 정리하려던 순간 사라진 친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두가 장례식장을 찾은 그곳에 의심받던 그가 찾아와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의 결백이 다시 현실의 벽에 가로막하지 그는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쉼없이 몰아쳤다.
영화가 중반쯤 왔는데 이야기는 거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듯 했다.
심장을 쫀득쫀득하게 만드는 긴장감이 아니라 묵직한 발걸음으로 꿍꿍거리며 주변을 몰아치는 박진감이었다.

 

의심받는 그의 자살시도로 격렬한 전반부가 끝나고 이야기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톤이 조금 낮아지기 시작했다.
톤을 낮춘다고 긴장이 확 풀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는지 알수가 없었다.
집단의 광기에 맞선 개인의 저항을 얘기하려는 건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가서려는 건지,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살벌한 대결을 그리는 건지, 폭력적인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드려내려는 건지 아리송했다.

 

이럴 때는 그냥 감독을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그냥 따라가봤는데
사람들의 관계들이 역전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대결구조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진실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아닌 듯도 했고
구조적인 문제도 살포시 보이기는 했는데
갑자기 강렬한 상황으로 몰아가더니
영화가 끝났다.
그 과정이 난해한 것도 아니고
그 끝이 허무한 것도 아니지만
영화가 뭘 얘기하려는지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나서 오래간만에 사우나를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편안하게 영화를 되새김했더니
흩어진 퍼즐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세 명의 관계와 심리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사건을 둘러싼 친구들의 집단적 태도가 (동의되지는 않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아이들에 비해 단순한 어른들의 태도가 설명이 되었다.
결국 영화의 후반부는 대중의 광기를 역이용해서 피해자의 복수가 이뤄진다는 내용이었다.
감독이 이야기의 퍼즐들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지 않아서 곱씹어야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의 박진감이 덜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영화이기는 했다.

 

이 영화를 곱씹었더니 ‘파수꾼’이 떠올랐다.
‘파수꾼’에서도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폭력적인 관계와 그 구조를 아주 직설적이고 거칠게 드러냈었다.
그걸 힘있게 끝까지 밀어붙였던 ‘파수꾼’은 결말에 가서 어의없게도 가해자를 옹호해버림으로서 힘있는 영화를 구렁텅이로 밀어버렸다.
‘파수꾼’은 아주 힘있는 영화였지만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영화였다.
‘죄 많은 소녀’도 학교라는 공간의 폭력적 관계와 그 구조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흐름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개인들의 심리까지 담아내면서 꽤 잘 묘사했다.
‘파수꾼’과 달리 자신이 말하고자 바를 아주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잘 짜놓았는데, 그 치밀함이 지나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묻혀버렸다.
묵직한 주제에 힘있고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는 했는데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은 영화가 돼버렸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얘기해야할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주연인 전여빈을 비롯한 10대 역할을 한 배우들의 연기는 통통 살아있는 10대 모습 그대로였다.
특히 전여빈의 연기는 이 영화의 에너지 중에 반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멋진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런데 중견배우들의 연기는 너무 비교됐다.
중견배우들은 대부분 경력이 꽤 된 실력파들이었는데
연기를 하는 티가 너무 많이 났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어린 배우들의 모습과 너무 비교가 돼서 솔직히 민망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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