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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57회


1


모처럼 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한 여성이 느닷없이 다가오더니
“제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요, 저 한번만 안아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하더군요.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
주변에 밭들만 있는 외진 시골길에서
여고생으로 추측되는 이가
제게 안아달라고 하는데...


1초 정도 오만 생각이 머리 속을 휘집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또 1초 정도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도 저를 바라봤지요.
다시 1초 정도 뜸을 들이고
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응?
왜? 아무 말도 못하는데? 응?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 응!
왜! 아무 말도 못하냐고? 응!


내가 미친년 또라이 같아 보여?
이 얼굴에 있는 문신들이 이상해?
이 문신들 하나 하나에 담긴 뜻을 설명해줄까?
이 문신들 하나 하나에 흘린 피를 얘기해줄까?


나에게서 건질 것이 있을 때는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잖아
내가 순진해 볼일 때는 더없이 상냥하게 대해잖아
나를 욕망할 때는 무지무지 부드럽고 뜨거웠잖아
나 아직 젊고 뜨겁거든
일로 와, 놀아줄게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 모른다고 했지?
인간은 상처를 받으면서 성숙해진다고 했지?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악이 쏟아져 나왔지만 마지막에 희망이 들어있었다고 했지?
그 희망이 이 문신이야
가까이 와서 만져봐


내 가슴에 꽂혔던 너의 칼로 하나씩 팠어
싸늘하게 돌아선 너의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피를 마셨지
도와달라는 외침을 못 들은 척 지나가버리는 너를 이마에 그렸어
역겨운 표정으로 찡그린 너의 눈을 생각하면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더 이상 봐주지 않는 너를 위해 만든 것들이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그 눈을 파 버리겠어
아무 말도 하지마! 그 입을 찢어버리겠어
그냥 즐겁게 나랑 놀기만 하면 돼
이 밤을 나와 함께 즐기자고

 


2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면서
누군가랑 얘기를 나누며 술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의 말벗은 사랑이뿐이니
혼자서 술 한잔 하려고 동네 가게로 막걸리를 사러가고 있었습니다.


밭들을 지나 동네어귀로 접어드는데
‘술집’이라고만 쓰인 작은 간판이 보였습니다.
동네에 있는 그냥 허름한 집이었는데
언제 가게로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촌스러운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발이 자동으로 그 가게 안을 향했습니다.


가게 안에는 테이블이 하나뿐이었는데
어떤 분이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그래서 머뭇거렸는데
그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와서 앉으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주인인데 손님이 없어서 가볍게 한잔 하고 있다면서...
그렇게 주인과 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게 됐습니다.


술을 두 잔쯤 마시고 서로 인사를 하는데
그분은 자기가 예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예수 그리스도요?”라고 되물었더니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부활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자신의 손을 내밀면서 “만져 보시겠습니까?”라고 댓구를 했습니다.
그분의 손을 잡았더니 손이 따뜻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내가 니 애비하고 친구다”그랬더니
그분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저희 아버님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신가요?”라고 묻길래
제 지갑 속에 간직해놓고 있던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지요.

 


오늘 하나님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목소리 한 번 들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지 않을 테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ㅋㅋㅋ


웃기는 얘기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수한 사람들의 얘기를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던 내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아픈 사람 때문에 아파해야 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많이 미안해지더라고요.
나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해서...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 친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외롭고 힘들고 아플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뭔가 바라지 말고
그냥 나한테 얘기를 하세요.
나도 그냥 듣고만 있을게요.


내가 하나님처럼 마음이 넓지 못해서
어줍지 않게 이것저것 얘기를 해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얘기에 힘들어할지도 모르고
가끔은 나도 힘들어서 짜증을 낼지도 모르고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울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외롭고 힘들고 아플 때
그냥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내 말에 동의하는 거죠.


그럼, 우리 지금부터 친구다.
친구끼리는 말 놓고 지내는 거고.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니까
너를 그냥 ‘하나’라고 부를게.


내 친구 하나야
우리는 하나잖아.
그치?

 


제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분은
“이 세상에 혼자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버님 친구분을 만나뵙게 돼서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 옆자리로 가서 말없이 안아드렸습니다.

 

3


비가 오지 않으면 매일 아침 사랑이와 산책을 갑니다.
사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미세먼지로 뿌연 날 산책을 나가기가 망설여지더라고요.
어떻게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랑이에게 가서
“사랑아,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하니까 산책나가는거 하루만 쉴까?”
그랬더니 사랑이가 싫다고 산책가자고 막 때를 쓰더라고요.
그런 사랑이를 달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큰소리를 내고 말았더니
녀석이 등을 돌려버리는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뭐라고 해도 못들은 척 가만히 돌아서 있는 녀석을 두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30분쯤 후에 사랑이가 제일 좋아하는 참치캔을 하나 들고 다가갔습니다.
저를 보고 입을 삐죽거렸지만 참치 냄새를 맡고는 금새 달려들었습니다.
순식간에 참치캔 하나를 해치운 사랑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물까지 시원하게 마신 사랑이가 자리를 잡고 앉더니 제게 입을 열었습니다.


“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산책나가는 걸 알면서 그걸 못하게 하냐?
미세먼지가 심해서 그렇다고? 고작 30분 나가는 것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심각하냐?
그러면서 나는 이런 날 밖에다 묶어놓고? 어? 대답 좀 해봐라.”


할말이 없는 나는 “지금이라도 산책나갈래?”라고 물었더니
“야, 치사해서 안나간다. 산책갈 기분이 나겠냐?
하루 종이 줄에 묶여서 사는 내 신세에 대해서 생각해보긴 했냐? 개팔자가 그려려니 하면서 참고 있지만, 나도 말이야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이 나와서 말이지, 하루에 한두 시간만 풀어줘도 내가 이러지 않는다. 풀어준다고 내가 도망을 가냐, 아니면 어디가서 헛짓을 하냐?
하루 종일 묶어놓고 있다가 그나마 산책이랍시고 나가서 바깥냄새 좀 맡고 오는 건데 그걸 못하게하냐? 어?”라며 쌓였던 걸 쏟아내더군요.


사랑이의 항변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쩔수 없는 사정도 있어서 설명하려고
“사랑아, 묶어놓는 건 미안하기는한데, 여기서 지내려면 어쩔수 없어. 차도 다니고...”라며 말을 꺼냈더니
“야, 됐어! 그런 얘기 필요없거든. 아이고, 내 팔자야, 개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라며 사랑이가 장탄식을 하는 거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버린 상태에서 매정하게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도 뭐하고 사랑이랑 대화를 이어가기도 뭐해서 그냥 아무말 않고 사랑이 옆에 앉아있었습니다.
살짝 내 눈치를 살핀 사랑이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내가 치사해서 이런 얘긴 하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여기 이 물도 말이야, 너 너무하다는 생각 들지 않냐? 너는 정수기에서 매일 깨끗한 물 먹지?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밭에다 쓰는 농업용수나 먹이고말야. 이거라도 자주 갈아주면 내가 말을 안해요. 이 냄비에 가득 담아놓고 4일이고 5일이고 계속 놔두면 이 물이 깨끗하겠냐? 아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사랑이 얘기를 듣고 가슴이 뜨끔해진 나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랑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만 더 얘기할게. 너는 밥을 먹고 매번 설거지를 하잖아, 그치? 그런데 나는 밥을 먹고 밥그릇 설거지 몇 번이나 해줬어? 뭐, 개니까 아무렇게나 막 먹어도 된다는 거야?
그리고 말야, 내 집을 청소해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냐? 너도 내가 얼마나 깔끔한지 알잖아. 내가 집주위에서는 똥오줌도 안싼다고. 그런데 너는 청소도 제대로 안해줘요.
아까 너 내 기분 맞추려고 참치줬지? 개인생에 먹는 게 얼마나 소중한 즐거움인지 너는 아냐? 내가 식탐이 없는 것도 알면서 말야. 그렇게 좋아하는 참치를 가뭄에 꽁나듯이 기분 맞출때만 주면 니 기분은 어떻겠냐? 그게 그렇게 비싸? 응?
그리고 이 얘기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랑이의 불만은 한시간 동안 멈추질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묵묵히 듣고 있던 저도 점점 힘들어지더군요.
그렇다고 말을 끊고 집에 들어가버리고도 뭐해서
사랑이 옆에 가만히 앉은채 살며시 이어폰을 귀에 갖다댔습니다.


사랑이는 열변을 토하고
저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주일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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