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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호텔, 한 발 앞서가 자신을 돌아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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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가 극장을 집어삼켜버린 이때 ‘강변호텔’이 극장에 걸렸다.
한 달 전에 개봉한 영화가 이 시점에 걸리는 게 뜬금없기는 했지만
영화와 삶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어트리고 다시 성찰의 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속에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익숙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흑백의 톤이 조금 흐리고 어두웠는데 일부러 거리두기를 하려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이런 거리두기마저 최근 그의 영화의 익숙한 방식이 되고 있으니...
홍상수 영화는 머리 속을 완전히 비우고 그냥 따라가면 재미가 있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그의 얘기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런데 영화가 반쯤 진행됐는데도 어디로 가려는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뭔가 얘기를 할듯할듯 하면서 괜히 질질 끌기만 하는 분위기는 당황스러웠다.
사랑에 상처를 입은 남녀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여자는 여자끼리만 어울리고, 남자는 남자끼리만 어울린다.
거기다가 남자들의 관계는 부자지간이다.
남녀가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감정이 춤을 추는 일도 별로 없고
홍상수 영화의 전매특허인 술자리를 갖지 않으니 담배만 연신 피워대고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맴맴 돌고 있는데 중간중간 상징적 장면까지 나온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고 힘들었다.


그렇게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야기를 따라갔더니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드디어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서 이야기의 매듭이 풀어지기 시작했고 감정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남자는 남자끼리 술을 먹고, 여자는 여자끼리 술을 먹는 게 아닌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술을 먹으며 그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감정이 두 자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는 하는데 맥아리가 없다.
“이거 뭐하자는 거야!”라며 슬며시 화가 나기도 했다.


바로 그때 배우들의 감정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그들의 얘기가 내면의 모습을 드러냈고
그 얘기 속에 감독의 목소리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기주봉을 중심 자리에 앉힌 것도
부자관계가 등장한 것도
남녀가 어울리지 않은 것도
감정이 넘실대지 않은 것도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홍상수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변명하고 있었고, 그 변명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고, 그 통증을 묵묵히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참아내던 통증의 고름을 짜내듯이 감정의 춤사위를 벌이고 나서
홍상수 영화로서는 아주 파격적에게도 비극으로 결말이 맺어진다.
그 비장미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는 듯이 바라보기도 하고
스스로의 목에 칼을 갔다대기도 하더니
미래로 한 발 미리 나아가서 과거를 돌아보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성찰은 역시 한 수 위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감탄을 하면서 극장을 나오는데
문득 김민희의 자리가 눈에 밟혔다.
어느 날 갑자기 홍상수 영화에 등장해서
운명처럼 독한 사랑에 빠져든 그는
홍상수 영화의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지만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홍상수의 성찰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그는 사랑 그 이후를 계속 성찰해나가고 있고
그려면 그럴수록 연인의 자리는 애매해질 수 밖에 없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처음으로 만났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노련한 조련사인 홍상수는 김민희가 마음껏 뛰어놀게 만들어줌으로서
김민희의 매력을 물씬 발산하게 했지만
본인 스스로 영화 속으로 들어와버린 홍상수는
김민희를 조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조련하고 있었다.
서로의 관계를 보듬으며 발전해나가지 못하는 위험하고 아픈 사랑의 씁쓸한 현주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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