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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53회

 

 

 

1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이른 새벽에 깼습니다.

그렇게 찌뿌둥하게 하루가 시작됐는데

오전에 잠시 일을 하고나서

무거운 몸과 마음을 풀려고 요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땀을 흘리고 있는데 사랑이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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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 : 사랑이, 왜?

사랑이 : 어, 운동 언제 끝나?

성민이 :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사랑이 : 운동 끝나면 산책 갈 거야?

성민이 : 운동 마치고 점심 먹고 나가자.

사랑이 : 어, 그래?

성민이 : 왜 그러는데?

사랑이 : 아니,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책 나가면 좋을 것 같아서.

성민이 : 너 지난 주에 우주 갔다 오고 났더니 괜히 싱숭생숭 해졌나보네.

사랑이 : 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성민이 : 알았어, 운동 여기서 마칠게. 우리 맛있게 점심 먹고 산책 나가자.

사랑이 : 고마워. 그런데 어느 쪽으로 산책 갈 거야?

성민이 : 음... 그냥 평소 가던 데로 갈까? 왜 가고 싶은 데 있어?

사랑이 :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성민이 : 흐흐 알았어.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특별히 옆 마을까지 길게 산책하자.

사랑이 : 와~ 정말이야?

성민이 : 그래, 나도 산책하면서 가을을 즐겨보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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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랑이는 신나서 앞서갑니다.

그런 사랑이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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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밭들에는 어린 모종들이 잘 자라라고 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연이은 태풍 때문에 모종 심는 시기가 늦어져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잘 자라기만 바랄 뿐이죠.

겨울 작물은 이맘때가 가장 왕성한 시기여서 쑥쑥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요즘이 봄이나 여름보다 더 좋습니다.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낸 사랑이와 저도 요즘 산책이 가장 편하고 즐겁습니다.

가을은 쓸쓸한 계절이 아니라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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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밭의 돌담이 살짝 무너졌는데 아직도 그대로네요.

이렇게 방치된 지가 보름은 된 것 같습니다.

 

 

사랑이 : 여기는 왜 그대로 두고 있을까?

성민이 :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사랑이 : 이 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게을러서 그런가?

성민이 : 뭐 그럴 수도 있고...

사랑이 : 이거 다시 쌓는데 10분이면 될텐데, 어지간히 게으른 사람인가 보네.

성민이 : 이 밭에 겨울작물을 심지 않을 걸 보면 무슨 일이 있어서 밭에 신경 쓰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 : 그런가? 여기만 이러니까 이빨 빠진 할머니 같은데. 헤헤

성민이 : 그렇긴 한데, 이빨 빠진 할머니라고 놀리는 건 좀 그렇지 않니? 할머니가 이빨 빠지면 얼마나 속상하겠냐.

사랑이 : 아, 미안.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음... 그러면 먹다만 옥수수라고 할까?

성민이 : 그건 나쁘지 않네. 그래도 이렇게 한 군데 살짝 허술해 보이는 곳이 있으니까 여유롭지 않냐?

사랑이 : 음... 글쎄, 나는 보기 싫은데.

성민이 : 그런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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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가을은 어린 작물들이 쑥쑥 자라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여름 동안 잘 자란 감귤이 익어가는 때이기도 합니다.

서서히 익어가기 시작하는 감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두 달 후면 잘 익은 감귤을 수확하느라 바빠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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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기의 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벌초를 했는지 잡초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가을은 여름 동안의 열기를 떨어내는 깔끔함이 자리 잡는 때이기도 합니다.

여름 동안 제법 자란 제 머리카락도 조만간 손질을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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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를 핑계 삼아 옆 마을까지 산책을 나왔더니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사는 곳보다 조금 더 한라산으로 가까워지니 그만큼 더 포근해지는 느낌이네요.

사랑이는 익숙한 곳을 벗어나니 새로운 냄새들을 실컷 즐기면서 아주 신이 났습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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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서 있는 소나무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있습니다.

저 모습을 보니 약간 구부정하게 걷던 제 자세가 꼿꼿하게 펴집니다.

 

 

성민이 : 사랑아, 땅만 보지 말고 저기 소나무를 한 번 봐봐.

사랑이 : 어, 소나무가 왜?

성민이 :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멋있지 않아?

사랑이 : 음... 멋있는 건 잘 모르겠는데 구름 위에 가지가 있어서 시원하기는 하겠다.

성민이 : 푸흐~ 그렇네, 구름들이 모두 소나무 가지 밑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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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지만 낮에는 약간 더운 기운이 있습니다.

그래서 산책코스를 약간 돌아서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시골에 살지만 주변에 온통 밭들뿐이어서 숲길을 걸어보는 게 오래간만입니다.

밭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곳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이 가끔 보입니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으려니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신나서 앞으로 막 나아가려고만 하던 사랑이의 발걸음도 여기서는 조금 여유로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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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와 다시 이어진 길에서 오래간만에 말이 보였습니다.

기르던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이곳에 놓아둔 모양입니다.

여유롭게 풀을 먹던 말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멀뚱히 쳐다봅니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무름하게 서있는 말의 모습이 멋있어보였습니다.

산책의 즐거움에 한껏 빠져있던 사랑이가 말을 발견하더니 으르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성민이 : 사랑아, 괜찮아.

사랑이 : 으르렁, 저 녀석 뭐야?

성민이 : 쟤는 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냥 풀을 뜯어먹고 있는 거야.

사랑이 : 그런데 왜 우리를 쳐다보는 거야?

성민이 : 야, 쟤가 혼자 조용히 풀을 먹고 있는데 우리가 갑자기 나타난 거거든. 그러니까 쟤가 경계하는 거지. 우리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조용히 지나가야 돼.

사랑이 : 달려들진 않겠지?

성민이 : 흐흐흐, 고삐에 묶여 있어서 우리가 가까이 가지 않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가까이 가볼래?

사랑이 : 아니.

성민이 : 여기서 말을 보니까 가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네.

사랑이 : 왜?

성민이 :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그러거든.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이야.

사랑이 : 하늘이 높다는 건 알겠는데 말은 왜 살쪄?

성민이 : 음... 글쎄, 말을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여름에 너무 더워서 살이 빠진 말이 가을에 풍성한 풀들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사랑이 : 여름에 더워서 살이 빠졌다가 가을이 되니까 입맛이 돌아와서 밥을 많이 먹는 건 나도 마찬가진데.

성민이 : 어, 그렇지. 그러면 가을은 말도 살찌고 사랑이도 살찌는 계절이라고 해야겠네.

사랑이 : 그렇게 얘기하니까 말이랑 친해지는 기분이다.

성민이 : 그러냐? 그럼 우리 말한테 가서 인사하고 올래?

사랑이 : 아니, 그냥 이 길로 계속 가자.

성민이 : 그래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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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뒤로 하고 계속 걸어갔습니다.

마을 외곽에 조그만 도로가 있었지만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는 여유로운 도로였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과 사랑이는 살찌고 마음은 평화로워지는 그런 가을의 여유를 만끽하며 걸었습니다.

 

 

 

 

(윤도현, 이정열, 서우영, 엄태환의 ‘나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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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조그만 골목길이 정겨워서 들어섰는데 더 조그만 골목길이 나왔습니다.

이 길은 집으로 이어지는 올레길이라고 합니다.

관광코스로 개발된 올레길이 아니라 제주의 전통적인 가옥에 연결된 길입니다.

이곳은 워낙 바람이 심한 곳이라서 이렇게 좁고 구부러진 길을 집 앞에 만들어서 바람을 순치했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집 앞에 이런 길이 있으면 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밀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용케 살아남았네요.

예전에 할머니집에 갈 때 이런 길로 걸어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볼 수 있어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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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정도 걸었더니 조금 뻐근한가요?

여기 팽나무 아래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네요.

여름이면 마을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인데요

사랑이도 가끔 이곳에서 쉬어가는 걸 좋아합니다.

 

 

성민이 : 사랑이, 오늘 산책 좋았어?

사랑이 : 응, 너무 좋았어.

성민이 : 나도 너 덕분에 기분이 상쾌해졌네, 고맙다.

사랑이 : 내가 산책 나가자고 하길 잘했지?

성민이 : 그래, 집에 가면 맛있는 간식 줄게.

사랑이 :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이렇게 길게 산책했으면 좋겠어.

성민이 : 내가 좀 더 부지런해져서 사랑이 산책 많이 시켜줘야 하는데, 미안해.

사랑이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너는 산책을 자주 해주고 있어서 괜찮아. 그냥 오늘처럼 날씨 좋을 때는 여유 있게 산책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성민이 : 그래, 그러자. 일 년 중에 요맘때가 제일 여유 있고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라도 충분히 하자.

사랑이 : 너랑 산책할 때가 제일 행복한 거 알지?

성민이 : 그럼, 그래서 내가 가능하면 산책 자주 하려고 하는 건데. 그리고 나도 너를 핑계 삼아서 이렇게 산책하는 게 좋아. 솔직히 나 혼자였다면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았을 거야.

사랑이 : 그러냐? 니가 그렇게 좋아한다니까 기분 좋다. 나 좀 쓰다듬어줄래?

성민이 : 그래, 사랑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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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랑이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약간 더운 기운이 있는 날씨여서 갈증이 많이 났나봅니다.

저도 집에 들어가서 매실청에 물을 타서 시원하게 들이켰습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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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해는 졌고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면 저녁산책을 짧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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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백건우의 ‘Chopin: Nocturne No.1 in B flat minor, Op.9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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