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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 가정폭력에서 벗어나 맞이한 냉혹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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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정폭력을 소재로 한 뻔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1회는 그랬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어린 딸과 함께 도망쳐 나온 젊은 엄마는 막막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수순으로 얘기가 흘러가는데

무거운 이야기와 달리 화면은 너무 아름다웠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세련됐다.

그래서 조금 더 봤다.

 

2회에서도 역시 예상했지만 만만치 않은 상황이 이어지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거였다.

아이의 양육권문제로 법적 다툼을 벌이다가 지게 돼서 패닉상태에 빠진 엄마를

동정하거나 위로하는 게 아니라 다그치는 것이었다.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싸우라고! 여기 드러누워 울고 있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나도 그랬다고!

순간 주인공만 정신이 확 든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는 나도 정신이 확 들었다.

이건 그렇고 그런 뻔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다음부터 드라마는 싱글 맘이 겪어야 하는 온갖 어려움을 다 보여줬다.

주거문제, 어린이집문제, 생계문제, 취업문제, 직장 내 착취문제, 고객과의 관계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그런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역시나 칙칙하지 않고 밝으면서도 세련되게 보여줬다.

 

주인공의 처지는 막막하고 힘들기만 한데

주위에 도와줄 사람은 딱히 없고

정부의 지원은 형식적이거나 절차가 복잡하고

남편은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걸리적거리고

자기 정신세계에 빠져 사는 과대망상 엄마는 짐만 될 뿐이고

재혼한 아빠는 왠지 벽이 느껴지고

도와주겠다는 남자는 흑심을 품고 있고...

주위 조건은 하나같이 한숨만 나오지만

굴하지 않고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 나간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힘이 강했다.

억척스럽게 현실에 맞서보지만

반발 나아가는가 싶으면 한발 물러나야했고

다시 한발 나아가는가 싶으면 두발 물러나야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싸워나가 보지만

어느 순간 처음의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발버둥치고 발버둥치고 또 발버둥쳐봤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 현실을 마주한 주인공은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든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들었다.

차갑고 냉정한 세상을 향해 ‘내가 우스워 보이냐?’라며 당당하게 맞서봤지만

세상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나를 밀어내버렸고

내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촘촘히 옥죄어왔었다.

내가 절망의 늪에서 발버둥치기를 포기했을 때야 세상이 내게 눈길을 주며

‘아직도 세상이 우스워 보이냐?’라고 말을 걸어왔던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주인공이 그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를 포기하고 있을 때

작은 구원의 손길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 손길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어릴 적 아픔을 반복하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엄마는 다시 용기를 내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렇게 막막한 세상으로의 두 번째 탈출과 함께 이전과 똑같은 상황들이 반복되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은 엄마는 좀 더 용기를 내서 맞서나간다.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

나보다 나은 사람의 도움을 바라기보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

구질구질한 관계라도 애정과 신뢰가 남아있다면 그 애정과 신뢰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말고 내 위치에서 나와 주변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세상은 정말 만만치 않지만 그 속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을 사실적으로 풀어놓던 드라마가

마무리 즈음에 가서 약간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딸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엄마의 작지만 당당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그 눈물을 닦으며

주인공이 몸으로 부대끼면서 배워갔던 세상살이의 경험들을 되새기면서

나도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기라 다독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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