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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원, 죽거나 폭주족이 되거나

집배원, 죽거나 폭주족이 되거나  
- 전국 집배원노동자 협의회 의장 박 석기씨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죽어가는 집배원 노동자들

전국 순회 투쟁으로 집배원 노조 조직 건설중  
  
   참세상뉴스  

  
폭설이 쏟아지는 강원도 산골 마을에 우편물 하나를 배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허벅지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가다 결국 눈 덮힌 계곡에서 죽어간 우체부 아저씨. 초등학교 교과서는 우체부 아저씨의 희생정신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가르쳤다.
그래서 편지나 연하장을 보낼 때면 우편물 뒤에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보내는 것이 그들의 희생정신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이제 집배원들은 더 이상 사랑과 희생의 메신저가 아니다. 우체부 아저씨들이 사랑의 메신저에서 국가 기관과 싸우는 노동자임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참세상 사람은 전국 집배원 노동자 협의회 박석기 의장이다. 박의장은 서광주 우체국에서 해고된 상시위탁 집배원이다. 박 의장이 보는 집배원 노동자들의 현실은 "정보통신부는 집배원을 '희망과 사랑의 메신저'라고 치켜세우지만, 우리는 국가기관에서 착취당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노동자들일 뿐"이라며 "지금 같은 살인적인 강제 노역이 끝장나지 않는다면, 과로로 죽어 가는 집배원 노동자 수는 물론이거니와, 우편사고, 배달지연은 계속적으로 늘어갈 것" 라 밝혔다.
그래서 박 의장은 상시위탁 집배원 모임을 넘어 '집배원 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을 하고 있다. 상시위탁집배원이란 전국 우체국에 근무하는 기능직 공무원(정규직 집배원)과 똑같은 일을 하는 1년 단위의 계약으로 근무하는 비정규 계약직 집배원이다.

늘어나는 우편물 늘어나는 살인적 노동강도

박석기 의장은 98년 6월12일 '일당 3만원. 월 78만원짜리 노동자'로 서광주 우체국에 입사했다. 98년 입사 당시만 해도 구분된 우편물을 지정된 장소에 배달하는 일만 해도 가능했다. "지난 몇 년 간의 집배원 사망 통계와, 우편 민원 발생, 그리고 배달시간 통계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웃으면서 시민들의 손에 우편물을 쥐어주는 친절한 '우체부 아저씨'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편지를 대충 던져놓고 오지 않으면, 폭주족처럼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지 않으면, 아마 우편업무 마비될 겁니다."

박 석기 의장에 따르면 99년 말부터 많아지기 시작한 우편물이 결국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2000년도부터 핸드폰이 보편화되기 시작하고 지금은 한집에 3대에서 5대까지 보급된 상황이다. 핸드폰이 늘어나면서 당연히 요금 고지서가 늘어났고 각 회사마다 발송일이 전부 달랐다. 또한 전화, 의료보험 등 각종고지서와 백화점 세일우편물은 사람을 미치게 할 지경이란다. "여기에 국회의원 정책보고서가 나오면 사람 환장해 부러요"

상시위탁 집배원이 살기 위해서는 노조 절실

박 의장은 이런 집배원 노동자들의 노동강도 증가를 감지하고 2000년도에 총무를 맡은 동료와 모임을 만들면서 노조 형태로 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서광주 우체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가입신청서를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2001년 3월 6일 서른 네 명이 모여 공식적으로 노조 창립 대회를 개최하고 광주 서구청에 설립신고를 냈다.

이와 함께 서울, 대전, 부산, 광주 전남, 제주대표들을 공동 위원장으로 한 '전국 정보통신부 계약직 노조 준비 위원회' 준비 모임을 함께 만들어 갔다. 그러나 서구청은 노조 설립인가를 계속 미루었고 한국노총 산하 전국 체신노조 대의원 대회에서 전원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하면서 4월 22일 서구청은 서광주 우체국 계약직노조의 설립을 반려 처분하였다.

체신노조의 결정에 대해 당시 부산과 서울, 대전의 위원장들은 무조건 체신노조로 들어가자고 했고 결국 5월 28일 체신 노조 가입을 결정했다. 하지만 체신노조는 산하에 상시 위탁만의 다른 체계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 상시위탁 모임체계를 불법화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2001년 6월 20일 체신노조 단협이 발생한다.

체신노조의 단협에는 상시위탁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게 되는데 도저히 상시위탁 집배원노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과 상시위탁 집배원 운영지침까지 첨가되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석기 의장은 그 해 7월에 있던 비정규직 전국회의에서 광주전남 비정규직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박석기 의장은 7월 9일부터 14일까지 국회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며 홀로 일인시위를 진행하게 되고, 14일 오후 서광주 우체국 관리자 두 명에게 잡혀 내려온다. 이로 인해 "집배원 복장을 한 채로 1인 시위를 해 우체국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는 이유로 감봉 3개월 처분을 받는다. 이때 서광주 우체국 14명의 상시위탁 집배원들이 광주지방법원에 집단소송을 시작하지만 연고를 통한 회유와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14명 전원이 소송을 취하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박의장은 8월에 혼자 임금청구소송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소송으로 인해 갖은 협박과 회유가 연고를 통해 박 의장에게 들어 왔다. 박 의장은 "당신들 이렇게 까지 하면 여기서 분신해 죽어버린다. 송장 치울 생각 있으면 계속 회유, 협박해라"며 소송을 취하하지 않고 계속 투쟁하였다. 이 시기에 박의장은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우체국은 8월에 178명의 상시위탁 기능직 공무원 경쟁 채용을 위한 면접 시험을 발표했다. "재미있는 것은 비정규직 대책위원회 위원장 중에서 서울과 부산 대표가 정규직 발령을 받게 됩니다. 조직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박 의장은 자기가 비정규직 집배원 중 가장 늦게 정규직이 될 것이라 했다. 그에게는 집배원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보통신부 비정규직 대책 위원회의에서 비대위로는 집배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발전적으로 비대위를 해체하고 정규직, 비정규직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되는 "전국 집배원 노동자협의회 준비위원회"를 10월에 만들게 되고 경선을 통해 대표에 뽑혔다.

11월 20일 임금청구소송 첫 재판이 시작되자 서광주 우체국은 무조건 소송을 취하하라고 강요했지만 "협상도 내용도 없이 취하하는 게 말이 되냐? 인원이 보강되었냐?"며 소송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리고 12월 31일 7시 30분에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박위원장은 2002년 1월 1일 출근을 했다. 그러나 서광주 우체국은 그에게 업무를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박의장은 1월 2일 출근시간부터 방송차량으로 지난한 100일간의 출근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4월 12일 출근투쟁을 마치고 이보다 열 곱절 긴 1000일간의 전국 순회 투쟁을 한다고 밝혔다.

살아온 길 = 농부의 자식에서 기천문에 푹 빠진 노동자로

박석기 의장은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항쟁 때는 손바닥이 갈라지도록 돌맹이를 던지던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냥 "그래 이건 아니야" 라며 많이도 울었던 한 사람의 광주시민이었다.

그 후 택시노동자로 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현장에서 광주지역 택시총파업을 주동하고 해고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28일간의 택시 노동자 투쟁을 하는 동안, 280여 대의 택시를 박살내면서 금남로를 장악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고 한다. 그때 투쟁으로 그는 늑깍이 대학생이 되기도 했다. 택시투쟁 당시 법정투쟁을 전개하면서 "왜 우리노동자에게 노동 전문변호사가 없을까?"하던 물음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으로 97년 방송대 법학과에 들어 갔지만, 아직도 졸업을 못한 상태이다.

한때는 국민의 염원을 담아 모금운동으로 태어난 한겨레신문사에서 생을 마치려 했으나, 그것도 자신의 운명이 아니었던지 96년 과로로 쓰러져 신문사를 사직하게 된다. 그때 과로로 쓰러진 후 '기천문'이라는 전통 민족무예에 푹 빠졌다. '기천문(2,500년 전부터 내려오는 무학)' 수련은 잃었던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건강을 되찾고 1998년 6월 12일자로 서광주 우체국에 상시위탁 집배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공무원의 일상생활이겠거니 했다. "이 나라 정치 권력이 앞장서서 노동자를 장시간노동으로 죽여 가고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노동현장을 도저히 방관 할 수는 없을 만큼 집배원 노동자들의 노동현실은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박석기 의장의 비정규직 투쟁은 시작된 것이다.

박의장이 투쟁하고 해고되면서 가장 안타까운 건 "내가 사랑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45세)가 그나마 나로 인하여 '갑상선 항진 저하증'이라는 몹쓸 병까지 앓게된 것"이란다. 박의장은 "아내가 지금의 현실을 독려해주고, 이해해주니 더욱더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또한 현재 외국어대 중국어과에 다니는 아들에게는 "가난한 노동자인 아비의 모습만 보여주게 된 것이 늘상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고 했다.

박석기 의장은 집배원들이 살길은 "하루 빨리 집노협이 상시위탁 집배원의 틀을 넘어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전국 2만 6천여 집배원의 투쟁하는 조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노동자들에게 작은 희망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노동자의 이름으로 살고 싶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병고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새 삶의 시간을 만들어 준 전통 민족무예 '기천문'을 노동자들과 민중들에게 건강법으로 전달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라는 소박한 노동자의 꿈을 꾸고 있다.

이런 박석기 의장과 집배원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민주노조를 만드는 날 사랑의 메신저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진정 부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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