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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81회 – 타인의 죽음 앞에서 나는 왜 이리 무덤덤할까?

 

 

 

1

 

근처에서 농사를 짓던 부부가 싸움을 크게 벌인 후

남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폭염 속에 하우스 안에서 일을 하던 분이

갑자기 쓰러져서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가까운데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도 제 마음은 그냥 무덤덤했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들이 모르는 분들이어서 그랬기는 하지만

너무 무덤덤한 제 자신에 살짝 놀랐습니다.

 

다른 죽음들 앞에서도 제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지인들의 부고소식이 들려왔지만

그때도 때 이른 죽음들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슬프거나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덤덤하게 보내드렸습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나는 왜 이리 무덤덤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들이어서?

세상에서 살짝 떨어져 지내고 있어서?

감정들이 무뎌져 버려서?

그저 나만을 생각하고 있어서?

 

저의 이 덤덤함이 무엇 때문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러쿵저러쿵 하기보다는

살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그 삶을 보듬어 안는 것이

몇 배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주변의 삶들을 적극적으로 보듬어 안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렇고

타인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무덤덤할 수 있는 제가

저의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할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2

 

장자가 초나라로 가는 도중 길가에 누워 있는 해골 하나를 발견했다. 장자는 마차에 쓰는 채찍을 들어 올려 해골을 가볍게 건드렸다. 장자가 물었다.

“여보시오. 그대는 욕심 때문에 죽었소? 나라가 망했을 때 칼에 맞아 죽은 것이오? 아니면 못된 짓을 해서 부모까지 고생을 시켜서 자살한 것이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오, 굶어죽은 것이요? 아니면 수명이 다하여 이곳에 누운 것이오?”

주위에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해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장자는 해골을 베개 삼아 바닥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장자는 꿈에서 해골을 만났다. 해골이 그에게 말했다. “낮에 그대가 하는 말을 들으니 변사와 같은 말솜씨를 가졌구려. 그런데 그대가 한 말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민일 뿐이오. 죽고 나면 그것들은 모두 사라진다오. 죽은 사람의 말을 듣고 싶소?”

장자가 말했다. “그렇소, 내게 들려주시오.”

해골이 말했다. “죽은 뒤에는 왕도 없고 신하도 없고 사계절도 없이 유유히 천지자연과 함께 지낸다오. 천지자연의 시간이 곧 나의 시간이 된다오. 이런 즐거움은 왕이라도 누릴 수가 없지요.”

장자가 말했다. “죽어서 그렇게 편안하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소. 생명을 주관하는 신인 사명을 불러서 그대를 다시 살아나게 한 뒤, 그대를 그대의 부모와 아내에게 돌려보내겠소. 고향으로 보내 주겠소.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해골이 듣고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며 크게 소리 질렀다.

“안 돼!”

그러고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장자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피식 웃으면서 잠시 생각을 해봤습니다.

죽은 뒤에 ‘인간의 욕망도 사라지고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연과 어울려 여유롭게 살아간다’면

살았을 때 그가 욕심 때문에 죽었든, 전쟁 때문에 죽었든, 못된 짓을 하다가 자살을 했든, 수명이 다해서 죽었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런 세상에서 전두환과 윤상원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승에서의 원한이 너무도 사무쳐 그곳에서도 서로 철천지원수가 됐을까요?

아니면 전두환은 지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윤상원은 천국에서 평화롭게 살아갈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이 지워져서 서로가 편안한 이웃으로 지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미물로 환생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장자는 “삶과 죽음이 자연의 섭리이니 너무 아등바등하며 살아가지 말라”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실 속에서 적당한 오물들과 적당한 자유로움과 적당한 욕심 속에 살아가는 저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삶을 알 수가 없기에 이곳에서의 삶이 편안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귤 선과장에서 지내는 어미 개와 강아지들입니다.

지난 9월에 여섯 마리 강아지를 낳았었는데

여기저기 분양을 보내고 두 마리가 남아 어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혈기가 왕성해지고 있는 강아지들은

어미 개 주변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밖으로의 모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미 개가 산책을 나서면 졸졸 따라붙어서 같이 산책을 즐깁니다.

둘 중 더 적극적인 성격의 강아지는 산책코스를 이미 익혀놓아서

산책을 나서면 제가 먼저 앞으로 달려가서 어미 개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모처럼 즐겁게 산책을 즐기려는 어미 개를 살짝 귀찮게 하기는 하지만

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제 기분도 상쾌해집니다.

 

산책을 하는 사랑이를 발견하면 두 마리 강아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옵니다.

그렇게 달려와서 꼬리를 흔들며 사랑이에게 다가가지만

사랑이는 그런 녀석들이 귀찮아서 가볍게 으르렁거리며 도망가 버립니다.

사랑이가 도망가면 또 쫒아가고 그러면 사랑이가 또 으르렁거리며 도망가기를 반복하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죠.

 

저렇게 귀여운 두 녀석이지만 어미 개와 마찬가지로 돌봄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감귤 선과장이 한창 바쁠 때라서 차들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도 강아지들은 그냥 방치돼 있고

강아지들 몸에는 진드기와 각종 부스러기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곤 합니다.

그런 녀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한 번씩 같이 산책을 즐기는 것과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때어주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얼마가 될지 모르는 인연 동안이라도 서로가 즐거웠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놀아달라는 강아지를 피해 도망가는 사랑이)

 

 

(까데호의 ‘고추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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