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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못참겠다

도저히 못참겠다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7. Tue 14:00

나는 사실 씨네21 정기구독자일 당시 당신을 꽤 좋아했다. 아무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당신은 꽤 많이 앞서서 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백인위를 언급한 점 때문에
나는 당신이 진보적 남성 치고는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그 점에서 2년전에도
나는 입장이 있었으되, 발표는 유보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사회(운동)에 진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선배들의 의식화
때문이 아니라) 내가 노동자가 되면서부터였고
내가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성폭력을 여러번 당했기 때문이다.
... 말하자면 나는 '학습'이 아니라 '몸'으로 나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다. '몸'은
나의 계급성이 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엄밀히 말해 노동자는 아니지만) 나는 당시 나의 정체성에서
'여성'과 '노동자'를 분리하기 어려웠다. 회사 간부에게 티셔츠가 이쁘니
벗어달라는 둥 성희롱을 당하면 이것이 몇퍼센트 노동자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고
몇퍼센트 여성이기 때문에 당한 일인지 누가 정확히 나눌 수 있을까.
어떤 유색-여성-소수민족-장애 노동자가 있으면 누가 그의 가장 큰 모순이
무엇인지 떼어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최근 논의되어 온 맑시즘 페미니즘의 고민이라 생각한다.

1. 당신은 여성 모순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기사의 말미에 언급된대로 당신은 '남성 정치인보다 여성 정치인이 낫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 때문입니다'라고 '고명'처럼 얹어
말하긴 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는 당신의 다른 글들에서 본 적이 없거니와,
"수구·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이기까지 한 여성 정치인 다섯명보다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 한명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당신 생각의 핵심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걸 좀 물어보자.
살아오면서 단언컨대, 나는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은 커녕 '여성주의적인
남성' 그 자체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가사와 육아를 50% 이상 분담하는 남성은
희귀동물에 가깝다. 당신은 보았는가?

당신은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이 가능할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이 "사실은" 여성주의에 관심이나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민주노동당? 나는 당원이지만 안타깝게도 이점에 대해서는 남성 정치인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혹은 당신이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을 육성할 기획이라도 갖고 있는가? 설마.
당신은 여성운동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여성주의에 관심이 없다는 점, 이것이 당신이 비판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당신은 그저 '수구 보수'가 미울 뿐이고, 여성들 중 일부가 '수구 보수라도
좋다 여성만 되어다오'라고 했다니 기가 막혔을 뿐이다.
즉 당신은 네가티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포지티브까지 운운하려고 나서니
내가 기가 막힌 것이다.

2. 그리고 여기에 바로 당신의 오만이 있다.

나는 중산층 여성운동을 비판하는 입장이다.
(물론 군산에서 성매매 여성이 열두명 타죽었을 때 민중운동이 관심갖지 않은
그들을 장례지내 준 것은 그 '보수적인' 여성운동 밖에 없긴 했다. 성폭력과
성매매 문제는 다른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여성 모순이다.)

그러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의 자격은 여성운동 그 자체로부터 나올때 가장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비판이 여성모순에 고민도 없고, 여성운동에서 현재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자가 하는 비판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내지는 평소 장애인 운동 근처에도 안가본 진보적 인사)이 장애인 운동이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 진출을 앞두고 보수화되고 있다고 당신처럼 신문에 대고
비판했다고 생각해봐라. 화려한 말빨을 자랑하면서. 일부 주장에는 수긍이 갈만한
대목도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자기 자신이 장애인 운동할 생각이 꿈에도 없으면서,
그저 장애인 차별만 안하면 고맙겠는, 명백한 계급적 우위에 서서 씹으면 그게
지탄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지독한 오만이다.
나아가 바로 이런 것이 사회구조적 권력관계를 경제적 계급관계로 환원하면서
다른 모든 모순을 은폐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하면 당신은 (아래아래 당신의 글도 그런 기조이다)
"어, 여성운동 내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왜 내 귀에 안 들리지? 좀
소문나게 싸워보지"
그렇게 말한다.

분하다.
여성운동 내에도 진보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없는 듯이 말하는 것은 사실은, 의도적인 방기이다.
적어도 고은광순과 조이여울의 논쟁은 보았을 것 아닌가?

아니, 당신은 모를수도 있다. 우리의 목소리가 적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관심이
없어서.
언론엔 커녕 진보적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늘 그 존재를 헷갈리게 하는 좌파가
한무리 한무리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당신, 이것보다는 더 잘 알 것이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제도언론에서는 제대로 그 목소리가 보도되지 않은 사회당 입장을
열심히 설명해주던 모습을 기억한다.

강조한다.
여성운동 내에는, 적어도 당신이 예의를 갖출 만큼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주 노동자 운동, 장애인 운동 ... 모든 운동 안에서 논쟁이 있다. 그 안에서
더욱 큰 진보를 이루어 가려는 치열한 운동이 존재한다. 물론 나는 때로 이들 중
일부 입장을 지지 격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운동의 분화에 대해 함부로 비평하지 않는다. 동지적 예의를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주 노동자가 아니고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주 노동자 운동을 직접 하고 있지 않고 장애인 운동에는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추상적' 지지를 보이는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비장애인과 한국인으로서
그들을 차별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는가?

장애인 운동이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면서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함부로 평론하(거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진보적 남성을
지겹게도 보고 있다.
이것은 여성 개인에게 비평하던 남성 개인의 습성의 연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존' 사회구조적 권력 관계를 웅변한다.
여성(개인 혹은 운동)에 대해 남성이 비평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여성운동은 이주노동자 운동이나 장애인 운동보다 나은 형편이라고?
아니, 전혀! 1%쯤 나갔을 뿐이다. 수많은 여성 모순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노골적인
성폭력 얘기 조금 시작했을 뿐이다. 흔히 거론하는 '국제적 기준'에서도 여성
노동자 임금, 여성 정치 참여, 가사육아분담율 등 모든 면모에서 아직도 형편없는
수치다. 아니, 이번 대거 배출로 여성 정치 참여는 '이제 겨우' 평균수치에
근접했다. 그래서 불안한가?
조금만 흔들려도 백배쯤 과장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성하려는 것, 그것이
수구보수 아닌가? 여성문제에 관한한 진보적 남성들은 '수구 보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 당신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는가?

나는 XX노총이 임금 받아먹는 운동한다고 비판당할 때도 "그 비판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대응이 달랐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비판할때는 동의하고 함께 분노했지만, 조선일보나 다름 없는
놈들이 그런 얘기를 할때면 개처럼 달려들곤 했다.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에 대해서 당신은 "여성주의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자, 이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다고 해보자.

"조갑제씨는 정규직의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서 노동운동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느낌이 어떠한가. 그래, 나도 끔찍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지금 누가
누구더러 끔찍하다고 하는가. 조갑제가 이 말을 할 자격은 있는가. 당치않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만큼의 혐오를 느낀다.

그렇다. 비판에도 '계급성'이 있는 것이다. 세련되게 말해서 '맥락'이다.

"현정은과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중산층으로서의 (여성운동의) 출신성분이 신체에 각인되고 의식을 좌우한다고
비판하면서
당신은 남성이라는 당신의 출신성분이 신체에 각인되어 당신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에는 관대하다.
웃기는 모순 아닌가? 아니면, 남성이란 출신성분이 중산층으로서의 출신성분보다
'덜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좋아하며 언급한 '여성 노동자' 입장에서 볼때는 둘다 똑같을 것이다.

당신은 만일 다른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면 "아마 큰 일
났을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고 했다...
시민운동에서 보수화할때, 안에서 치열하게 싸울때, 당신처럼 밖에서 오만하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는지부터 먼저 성찰하라.

4. 마지막으로, 당신의 변명도 지겹다.

'슬픈 마초'에서 보이는 것은 권력자가 순교자로 포장하여 말하는 화법이다.
이른바 '노무현식 화법'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솔직함' 때문에 모든 포화를
(때로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맞는 것으로 포장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권력자 계급, 때로는 권력자 그 자신이라는 걸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발 '딸키우는 아빠'라는 레토릭은 쓰지 않으면 좋겠다.
'딸키우는 아빠'라는 것은 많은 보수적 남성들의 레토릭이 된지 오랜데, 그 의미는
이렇다. "나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꽤 고민해."
그러나 이땅의 전근대+근대의 아버지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여성들을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변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런 변명 좀 그만 하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진보적 남성들이 오만을 버리지 않는 이상,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진보적 여성들은 진보운동과 멀어질 것이다.
진보적 여성운동은 이미 99-00년 여성노조들의 출범에 즈음하여 한차례 이에
대한 논쟁을 했던 바 있다. 그때 많은 여성노동운동가들은 남성-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나는 가슴이 아팠고, '몰성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사실 나는 그때 여성문제에 추상적으로 접근하면서 많은 오류를
저질렀고 비판을 받았다) '일반'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았지만,
요즘은 나도 점점 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으며, 설명하는 힘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 68 이후 영국 사회운동계가 맑시즘-페미니즘 논쟁을 겪으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맑시스트들과 결별하고 또 많은 맑시스트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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