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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어쩌면 희망?

직장, 탈출구이자 감옥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여 결혼하기 직전까지 직장을 다녔다.
학력과 성별에 의해 철저히 위계화 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노동시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우리 주인공 여성들도 대부분 결혼 직전까지 생산직, 사무직(경리), 판매직 등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권애리 씨를 제외한 여성들 모두는 자신이 번 돈으로 결혼하였다. 그들이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의 일부는 가족경제를 일으키는 데 사용되거나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데 사용되고, 나머지는 전부 결혼 비용으로 저축되었던 것이다.

이진자 : 직장 다닐 때 월급 받으면 언니를 다 줬어요. 언니를 다 주면 언니가 ‘얼마 너 써’하면서 생활비 3만원 주고... 그래서 딱 그거 가지고 살았을 거야. 그래, 옷 같은 경우에는 3만원 가지고 안 되니까 보너스 같은 거 타면 ‘야 기분이다. 너 이거 입어’ 그러면서 골라주는 식으로 하면 그냥 입고, 그러니까 꼭두각시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걸 전혀 몰랐어. 다 통장에 적금하고 언니가 ‘너 얼마 써’ 그러면 그거 가지고 쓰고.

이진영 : 사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근데 여상 나왔거든요. 나는 인문계 가고 싶어서...... 중3 때 ‘희망 학교’ 그거 적어 내잖아요. 그래서 인문계 적어서 냈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거 알고는 난리가 났었어요. ‘대학은 못 보낸다. 대학을 보내도 학교도 차비도 안드는 학교!’ 아버지가 공무원이니까 학자금하고 다 나오거든요. 그런데도 차비 안 드는 학교!
필자 : 아버지가 알뜰하셨던가 봐요?
이진영 : 알뜰하다기보다는 전기도 그렇고 수도도 그렇고 낭비하는 거 싫어하고..... . 어느 정도냐면 화장실의 화장지도 일요일마다 신문지 잘라서...... 아버지는 볼일 보시고 나서 그걸로 닦고, 진짜 다 큰 딸....... 처녀 되면 화장실 가면 문 잠그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잖아요. 문도 열어 놓으라고 해요.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그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학교도 ‘딸내미들은 대학 보낼 필요 없다’라고 해서 여상 보내고......
필자 : 그럼 돈 때문이셨던 건가요?
이진영 : 돈 때문이죠. 돈도 있고, ‘여상 나와서 빨리 회사 가서 돈 벌어라. 돈 벌어서 자기 시집 갈 꺼 자기가 벌어라’, 뭐 그런 식이었거든요. 그래, 내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가고, 그라고 여동생도 마찬가지였고. 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월급 타면 바로 아버지한테 월급봉투채로 드리면 적금 넣고 내 용돈 조금 주고 결혼할 때까지 그러셨거든요. 한번도 십원 짜리 이런 거 꺼내서 내가 먼저 가져 간 적도 없고, 항상 봉두채로 드려야 용돈 얼마 주시고 나머지는 부모님이 알아서 하셨지.

대도시 부산에서 성장한 진영 씨는 친정이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봉건적 의식의 소유자여서 딸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막았으며, ‘알뜰함’이 지나쳐서 성인이 된 딸에게 화장실에서 불 켜지 말고 문 열고 볼일을 보라고까지 했다 한다.
주인공 여성들의 경제활동에는 가족과 보인 생존의 필요라는 ‘의무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여성들이 진정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인공 여성들은 모두 결혼 전에 경제활동을 했으면서도, 자신의 경제권에 대한 통제권을 부모형제로부터 박탈당했다. 그렇다면 통제가 심한, 가난한 가족적 배경을 지닌 여성들이 ‘단순반복’적 노동을 수행하면서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회로 다가온, 결혼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결혼이란 누구나 언젠가는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진다. 특히 여성들은 모두 결혼해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것으로 기대되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비주류나 아웃사이더로 여겨진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성들은 흔히 ‘주인 없는 여자’, ‘뭔가 문제가 있는 여자’, ‘일부일처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여자’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따라 보이지 않는(혹은 드러나게) 차별을 받기도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제도와 맞물려 체계화되어 있는 준강제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며 핑크빛으로 가득 찬 낭만적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급속히 증가하는 이혼율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의 이혼율은 지난 30년 동안 급속한 증가추세를 보였다. 2001년 현재 연간 이혼건수는 12만 건으로 99년의 11만8천 건에 비하여 2천 건 이상 늘어났으며, 1970년의 1만2천 건에 비해서는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2001년 현재 1일 평균 329건이 이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주변에 가까운 친구나 친지 중에서 이혼한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만 같던 사람들의 이혼 소식을 듣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최근엔 평소 자신들이 ‘잉꼬 커풀’임을 자랑하던 유명 여자연예인이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폭행을 당하고 중상을 입은 일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누가 때리고 산다더라, 누가 맞고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신문 사회면에는 남편이 아내를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거의 죽도록 구타한 사건이 종종 등장한다.
급증하는 이혼율이나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이 동반자적인 평등한 관계와 평화로움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정순이 : 나도 희생을 하면서 동생 학비 보내고... 정말 내 애인이 회사다, 천날 만날 10시, 12시까지 연장을 해 가면서 나는 그리해서 집을 도왔거든. 그랬다! 그래도 남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근데 그렇게 생활을 하는데 이게 너무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회사-집, 회사-집 이게 싫은 거야.
(한숨을 푹 쉬며) 어휴! 나는 여기서 너무너무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또 뭐가 있겠어요? 시집이야! 제 2의 삶을 살자. 그래 가지고 또 변화를 줘야 되는 거야. 흥! 시집가서 내가 못 했던 거 하면 돼.

이 인터뷰 대상 여성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공통점 중 하나가 이들이 결혼을 하나의 ‘탈출구’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결혼은 가족생계를 위해 참아야 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과 봉건적이고 통제적이며 가난한 가족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이들에게 결혼은 ‘못 했던 것을 할 수 있고’, ‘나도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하나의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승숙 : 그러니까 대구 가서 정식으로 학교를 못 다니는 거예요. 그 다음 해에 야간고등학교를 들어간 거지, 대구에서. 그러면서 몸도 약하고 하니까 집에서 쉬면서...... 쉰다고 있었던 건데 신 게 아니고......
그때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계속 했으니까 18살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한 거라요. 좀 일찍 시작하면서 언니랑 친정생활을 책임지다시피 했어요. 큰오빠는 벌어도 혼자 쓰기 바빴고, 우리 직장생활 해서는 먹고살기 빠듯할 정도로 그랬으니까. 그래 해 가지고 내 동생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갈 때 되니까, 나도 이제는 내가 마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니까 내가 시집갈 마음을 먹게 되더라구요. 나도 결혼 좀 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어느 정도 되니까. 자리 잡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들 여성들의 생애에서 결혼은 삶의 휴식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자원획득의 의미를 가진다. 남편의 벌이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중간계급에 가까운 삶으로의 계층상승의 의미를 띄게 되는 것이다.

가족 부양의 의무감에서 벗어나기 - 이승숙 씨의 결혼 전 이야기

이승숙 씨는 안동에서 여섯 남매 중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승숙 씨가 10살 때 막내 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가 동생을 낳을 때의 모습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대장장이여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내내 술 마시고 여자 있고 해서”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 번 돈을 아버지 혼자 다 쓰고 엄마한테는 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6남매가
크는 데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게다가 오빠들까지 엄마 속을 많이 상하게 했다.
말썽 피우던 세 오빠들이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엄마가 오빠들 밥 해 주러 대구에 내려가자 승숙 씨는 혼자 안동 집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승숙 씨는 외롭고 힘들었던 소녀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때 중학교 다니고 있었으니까 저 혼자 있은 거예요. 내 혼자 있으면서 중학교 1학년 들어가니까 그때만 해도 결핵검사 한다고 엑스레이를 많이 찍었어요.
(목소리를 낮추며) 이거는 우리 아저씨밖에 모르는 얘긴데......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다시 재검사를 해 보라고 학교에 통보가 왔더라구요, 보건소에서. 그래서 보건소에 가서 다시 검사를 했더니 결핵이래요.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데, 옛날에는 결핵이라고 하면 못 먹어서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혼자 있으면서...... 병이 있으니까 잘 먹어야 된다는데 내가 끓여먹는 게 시원찮죠. 옛날에는 또 찬거리 없고 옛날에는 또 못 사니까 고기 육류를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 보건소에서 약은 꼬박꼬박 받아먹고 하는데 먹는 게 부실하니까 좀 오래 걸렸어요, 다 낫기까지가.
그러니까 뭐 중학교 때 공부도 거의 안하고...... 그때만 해도 내가 인식이 잘못된 게 별로 공부를 안했어요. 내가 잘못 판단한 게, 왜 결핵 그러면 많이 심하게 앓다가 폐결핵 걸려서 죽는다, 이래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 가지고 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원래 우리 식구들 중에 내가 공부를 제일 못하는데다가 우리 오빠들이랑 언니는 공부를 굉장히 잘해요. 친정 식구들이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데 내만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도 안하고 저녁 때 되면 불도 안 켜진 집에 들어오기가 싫으니까 우울증 비슷하게도 오고, 지금도 외롭게 있는 거는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청소년기의 승숙 씨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병행하게 된다. 친정살림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언니와 함께 한복에 그림 그려 넣는 일을 했다. 언니에게도 승숙 씨에게도 결혼은 친정의 생계를 이끌어간다는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먼 친척 오빠가 소개해서 언니랑 형부랑 만났어요. 내가 먼저 한 번 봤는데, 참 괜찮더라고요. 그래, ‘언니가 한 번 만나 보라, 사귀어 보라’ 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친정집 생활을 책임지니까...... 직장생활도 나보다 좀 더 했으니까 돈 버는 것도 나보다 훨씬 많고......
그런데 언니가 친정 걱정이 되니까 못가는 거예요. 그래 내가 밤에 몰래 가방을 싸 줬어요. ‘언니 가라, 언니가 있어도 그렇고 없어도 그렇다. 내가 하는 데까지 해 볼 테니까......’
(승숙 씨는 여기서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언니를 위로해서 보냈어요.

결혼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승숙 씨와 남편은 중매로 만났다. 두어 번 만나 후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는데, 장남인 데다 ‘집안의 첫 장가’니까 남편 될 사람 쪽에서 혼수를 많이 받기를 원하며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라며 요구하였다. 시집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 해 갈 능력도 없고, 마음이 썩 내켜서 하는 결혼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던 남편을 그만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이 왔더라구요. 직장 출근도 안 하고, 대구에 올라와서 나를 만나자고 하더라구요. 집 앞에 왔는데 엄마가 ‘너, 나가서 뭐라고 이야기 할래?’ 하면서 만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 ‘이까지 왔는데 안 만날 수가 없다. 내가 딱 강하게 자극이 되는 이야기를 해 보고 그래도 한다고 하면 내가 알아서 판단할게’ 하면서 만났어요.
결핵이라는 게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몸이 약해졌을 때...... 그래서 나는 아저씨한테 그걸 딱 이야기했어요. ‘내가 과거에 이런 병을 앓았는데 그런 나를 데려갈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거마저도 당신이 허용한다면 시집가고 안 그러면 안 간다.’고 했더니 우리 아저씨가 다 해 준 대요. 그리고 나중에 아파도 자기가 거기에 대한 후회라든가 그런 거는 없을 테니까 결혼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돌아서 결혼을 했어요.

가난과 방치 속에서 소녀 승숙은 홀로 병을 앓았다. 한창 건강하고 활기찼어야 할 10대에 앓았던 결핵의 경험은 승숙에게는 꽤나 무섭고도 남모를 고통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앓았던, 또 혹시나 재발할지도 모를 그 질병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느냐, 없으냐가 신뢰할 수 있는 남편감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잣대였다.
그 무렵,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렇게 말썽을 많이 피우던 큰 오빠가 후로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어머니도 마음을 편하게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승숙 씨 자신도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집에 대한 의무감이 줄어들면서 결혼을 결심했다.

안정, 대기업 노동자와의 결혼 - 정미진 씨의 결혼 전 이야기

부산 출신인 정미진 씨는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마흔이 넘어서 미진 씨를 낳았던 어머니가 6살 때 돌아가시고, 7살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미진 씨는 어머니.아버지의 얼굴과 느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가 노산인 데다가 몸이 많이 아파서 항상 누워 계신 것을 봤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된 그녀와 오빠는 각각 친척 집을 전전하였고 언니는 공장 기숙사로 들어갔다. 미진 씨는 친척 집에 있다가 아들만 하나 있는 집에 수양딸로 보내졌다. 그러나 미진 씨가 그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보내달라고 울고불고 해서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미진 씨를 마지막으로 입양하였던 가족의 경우에도, “아줌마는 좋았는데 아저씨가 탐탁지 않았는지”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언니는 어린 동생이 결국 남의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고는 ‘아무리 힘들어도 해어지지 말고 남동생과 셋이서 함께 살기’를 약속한다. 그래서 삼남매는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서 함께 생활을 시작한다. 미진 씨는 생계 부양자 역할을 하는 언니가 자신과 남동생을 키우고 책임지느라 많은 고생을 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세 남매는 부모 없이 가난하고 힘든 환경을 견뎌 나가면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들에게 종교는 정신적 지주이자 인생의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언니는 세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빴고, 오빠는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 비뚤어지지 않게 자라도록” 각별히 신경을 기울였다.
미진 씨는 종교와 엄한 오빠의 존재가 “방황하기 쉬운 사춘기 시절을 엇나가지 않게” 한 힘이었다고 회상했다. 미진 씨 스스로도 “남한테 부모 없이 자라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무척 엄격하였다고 한다.

언니가 결혼해서도 오빠랑 나는 언니 집에 있었지. 조카는 내가 떠맡아서 키우다시피 했어.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게 일체 여유가 없었지.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학교-집, 학교-집’. 집에 오면 청소하고 밥하고 반찬하고 그 다음에... 그리고 인자 토요일, 일요일에는 딱 교회 가고!
유일하게 시간이 나는 때가 토요일 날 조금? 그것도 꼭 몇 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되고...... 우리 오빠 통금 시간이 무지 엄했거든! 그러니까 평범하게 한 사람들에 비해도 답답하게 자란 거고...... 내 같은 경우는, 내 환경에서는 내처럼 살아가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고...... 내 자신을 컨트롤하고 지키고 하니까, 성격도 내 감정 이야기하기 전에는 부모 없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밝고 잘 지낸 편이었고.

언니는 결혼해서까지 두 동생을 책임졌다. 언니는 미진 씨를 고등학교까지 뒷바라지 하였고 남동생의 결혼까지 책임졌다. 미진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약국과 병원 물리치료실에서 보조 일을 하다가 같은 직장에 있던 친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노조 활동에 열성적인, 그러나 착실한 대기업 노동자였다.

민지 아빠는 아마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나 봐. 우리 신랑 보면 고지식한 그런 게 있거든요. 여자들 너무 나부랑대고 시끄럽고 말 많고 잘난 척하고 그런 거 딱 질색이거든, 이미 어느 남자도 다 그렇겠지만 우리 신랑도 그런 게 있어. 그래도 내가 착하고(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뭐 편하고 좋으니까 그런 접이 좋았나 봐.
저는 솔직히 그때 우리 신랑에 대해 많이 몰랐지. 그때는 주말에만 만나고 몰랐는데... 일단 편안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나는 그때 그런 걸 따졌거든요.
남들은 돈, 돈, 돈 할 필요 없고 돈 필요 없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거짓말인 것 같아. 모든 생활이 돈 없으면 안돼. (중략) 남자들 직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남들 하는 이야기가 <현대자동차>라 카면 “좋네, 좋네” 하니까 좋은갑다 싶었지.

미진 씨와 나는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다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미진 씨와 나는 다른 여성들에 비하여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통의 화제들이 더 많았다. 노동운동하는 남편, 1998년도의 무급휴직 경험,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들 등 생활상에서의 몇몇 유사점이 우리의 거리를 빨리 좁혀 주었다.
미진 씨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다른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강한 듯했다. 그녀의 남다른 가족사랑은 평소에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남편이 특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계가 넉넉하지 않았으면서도 남편의 체질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비산 보약을 6개월 동안 지어 먹었고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녹즙을 먹이고 있었다.
미진 씨의 유일한 불만이라면 노동운동하는 남편의 늦은 귀가와 잦은 음주였다. 하지만 남편의 직장에 대하여 ‘대기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월급 액수에도 작은 만족감을 표하였다.
미진 씨는 ‘근검절약’을 신조로 내핍 생활을 하는 다른 가족과는 달리 남편과 자녀, 가족이 건강하고 단란하게 사는 생활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지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때 부모님을 일찍 여읜 후 형제들과 똘똘 뭉쳐 험한 세파를 해여 나온 미진 씨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희롱, 여성 노동자의 비애-김해숙 씨의 결혼 전 이야기

김해숙 씨는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둘째 아이를 돌보게 한 후 나와 마주앉았다. 해숙 씨는 가까운 곳에 거주하고 있고, 연령도 비슷했기 때문에 평상시 마주치면 늘 반갑게 눈인사를 나누곤 했다. 인터뷰를 요청하였을 때도 쾌히 승낙하였고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숙 씨는 울산 변두리 농촌지역에서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나 줄곧 울산에서 성장했다. 해숙 씨는 특히 결혼 전 10년 동안이나 직장생활을 해서인지 근무했던 직장의 업무와 분위기, 직장을 옮긴 이유 등등, 다른 여성들에 비해 직장 경험에 대하여 소상하게 이야기하였다.

저는 시골에서 계속 자랐어요. 울산 <00아파트> 그 앞쪽으로, 지금은 도로가 많이 됐는데 옛날에는 완전 산골이었죠. 30분은 걸어 들어가야 되는 곳이었어요. 안 그러려면 2시간마다 있는 버스를 타고 다녔죠. <00아파트> 생기면서 마을이 그렇게 커진 거였는데, 나 직장 다닐 때는 버스가 별로 없어서 항상 퇴근하고는 버스 시간 맞추려고 친구 사무실에 가서 놀면서 기다리고 그랬거든요.
저희 엄마는 너무 여리고 진짜 좀 사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자기 가족밖에 모르고, 아버지는 많이 완고한 편이거든요.
필자 : 어떤 식으로요?
개방을 많이 안 했다고 해야 되나? 놀라간다고 그러면 잘 안 보내주고...... 남자들은 그런 게 없는데 딸 세 명한테는 저녁 10시까지 안 들어오면 집에서 난리가 날 정도로 그렇게 했어요.

울산에서 정작 만나기 힘든 울산토박이인 해숙 씨는 짧은 치마나 반바지를 입고서는 아예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던 아버지, 굉장히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해서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간 오빠 이야기부터 가족사를 풀었다. 해숙 씨도 다른 주인공들처럼 어려서부터 쉼 없이 집안일을 도와야했다.

우리는 그냥 별 수입도 없이 농사만 지었어요. 남의 농사도 많이 짓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돈이 엄청나게 들잖아요. 수입이 없으니까, 땅 팔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미나리 같은 것도 하고 엄마는 미나리 딱 들고 와서, 너의 수학여행 보내려면 이거 해서 수학여행 보낼 돈 마련해야 된다, 그러고. 일요일만 되면 미나리 씻어 오라고 막 그러더라구요. 그러면 언니랑 나랑 많이 도와줬거든요. 아버님이 논에다가 미나리를 키웠어요. 미나리가 장날 같은 때 많이 팔리잖아요, 봄이니까...... 아버지가 어두울 때 가서 미나리 베어 놓으면 엄마는 하루 종일 씻는 거예요.

다른 형제들처럼 해숙 씨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취업준비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다니기도 싫고 빨리 취직을 하고 싶어서 원하던 직종은 아니었지만 취업을 ‘해 버렸다’. 3교대로 기계를 돌리는 일었는데, 일은 잘했지만 야간근무 때 너무 잠이 오고 힘들어서 1년이 안 돼서 건설회사로 옮겼다.
이때부터 해숙 씨는 신이 난 듯 자신의 직장 경험을 실감나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주야간 3교대 생산직으로 시작해서 사무직(경리), 컴퓨터 입력 업무 등을 거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직장생활 동안 모두 8번이나 직장을 옮겼다.
처음으로 사무직으로 근무했던 건설회사는 친구들이 놀러 와서 “이게 어디 빌딩이냐, 호텔이지(웃음)”라고 할 정도로 넓고 쾌적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건설 현장으로 가고 나면 혼자 빈 사무실을 지키면서 전화를 받는 게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해숙 씨가 너무 무료할까 봐 걱정한 사장이 새를 사 와서 사무실에서 키우라고 하기도 하였다. 쾌적한 사무실에서 편하게 직장생활을 했지만 1년 정도 근무한 뒤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그래서 1년 정도 있다가 사장님이..... (순간 머뭇거림) 이런 이야기고 해도 되나?
필자 : 그럼요, 편하게 하세요.
거기를 1년 정도 다녔거든요. 가을이었나 그랬는데..... 공사도 어느 정도 되고, 집도 멀고 하니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그때 사장님 차가 공코드인가 좋은 차였어요. 그때는 아직 해가 많이 있어서...... 우리 집이 경주 못 가서 빠졌잖아요. 경주 드라이브나 가자고 하더라구요. 나는 좋다고. 21살 정도밖에 안 됐으니까.
근데 거기 갔다가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 기다렸는데..... 나는 시골에서 크다 보니까 너무 사회적으로 몰라가지고, 너무 착했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보문 그쪽에서 손을 잡고 걷자하고 그러는 거예요. 어떻게 사장님이 여직원한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렇지만 뿌리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그때 하는 말이 '오늘 놀다가 가자‘고, 나보고 ’옷도 사 주겠다‘고. 그때 좋은 옷 있잖아요. 이삼십만 원 하는 옷, 그것도 사 주겠다 하고.....
근데 그 다음날부터는 아무도 없으면 무조건 사장실로 불러서 나를 안을라 하고... 그래서 도저히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해가지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제가 나가겠다고 하니까 사장님은 ‘결혼할 때가지 있으면 아파트 한 채 주겠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없었거든요. ‘가전제품도 다 사 주겠다’ 그렇게 했지만......
돈보다는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싶은 생각이 더 많더라구요. 일년 이상 동안 거기 있으면서 내가 해 놓은 게 너무 없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일이 너무 배우고 싶은 거라. 사장님 노리개감도 아니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장의 성희롱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장의 계속된 성희롱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바로 퇴사할 수 없었다. 다음 해 봄 3월까지 계속 다른 직장을 알아보다가 자동차 협력업체에 들어가 경리업무를 하게 된다.
사무실을 지키는 게 다였던 지난 직장에 비해, 새 직장에서는 전표 끊는 방법부터 회계업무를 차근차근 다시 배워나가며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일이 손에 익을 무렵 다시 한 번 직장 내 성희롱을 경험하게 된다.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공장장이 머리를 손으로 쑥 쓰다듬는데 그 느낌이 너무 이상했던 것이다. “껄떡대는 남자들의 짓거리를 받아쳐야”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하루 종일 장부나 정리하고 세금계산서를 맞추며 은행을 왔다 갔다 하는 경리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무렵, 컴퓨터 도면 그리는 작업을 보게 된 해숙 씨는 거기에 매력을 느끼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직종에 도전해 본다. 그렇지만 도면을 보며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설명서에 나와 있는 영어를 빨리 이해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히자, 바로 그 일도 “때려치우게”된다. 그 뒤에는 <유공>에 일용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근버스 배차간격에 맞춰서 “우당땅거리면서” 출퇴근 준비하는 게 ‘사람 할 짓이 못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통근 버스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 사로고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한 달 동안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목 수술을 받고 퇴원한 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업하게 되었다. 해숙 씨는 28살이 되었다. 이때 하게 된 아파트 관리사무소 일이 “출퇴근 시간도 적당하고, 노는 것도 적당하고, 시간도 딱 적당한 것 갔다”며 “이게 완전히 내 천직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해숙 씨는 10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해 보았지만 그 일이 자신과 가장 잘 맞는 것 같다며, 아이들이 더 크면 한 번 더 그쪽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일 하는 기쁨과 ‘천생연분’ 남편과의 만남 - 이진자 씨의 결혼 전 이야기

이진자 씨는 강원도 원통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자신의 생애사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던 여성들 중 한 명이었던 진자 씨는 세 자녀를 키우고 있다. 그녀는 시원한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세련된 화장을 하고 있었고, 자신감이 가득한 말투를 가진 여성이었다.
진자 씨 역시 농촌에서 자랐다. 진자 씨는 조상 대대로 가난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워 ‘이씨 집안의 혁명’을 일으켰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그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속상하고 눈물이 나올라고 캐가(눈시울이 붉어짐). 내 과거 이야기는 안 할려고 카거든요. 너무 한이 맺힌게 많아가. 큰 맘 먹고 해야 되는데......
내가 눈물이 만아(눈물을 닦는다). 7남매구요. 내가 중간인데, 뭐 진짜 내 자랄 때는요, 넘 부럽지 않게...... 아버지가 대 혁명을 일으켰어. 우리 이 씨 집안에. 새마을 운동..... 박정희 대통령 한창 할 때 혁명을 일으켰어. 너무너무 부지런하게 아버지가 그래 했는데..... 황무지, 황토 개간해 가..... 아버지가.
근까 다른 애들은 토요일,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겠지만 우리는 일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 싫었거든요. 우린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몰랐었으니까..... 근데 우리 아버지가 너무 부지런하게 사셔가 그리 ‘딸 부잣집에 이씨’라고 하면 모르는 사라이 간첩일 정도로..... 머슴도 많이 거느렸구요.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가 너무 없이 살아가 많이 배푸셨어요.
거기는 강원도 군부대가 많아. 그래서 지뢰도 많아. 그래서 툭하면 지뢰가 터져가 누가 어쨌다는 등 누가 여기(발목을 가리키며) 나갔다는 둥, 전신이 나갔다는 둥, 이러면 군인들도 이걸 회피하고 그러는데.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앞장서서 그 뼈를 다 찾고...... 그런 것도 앞장섰구요.
누가 좀 힘들고 못산다고 하며는, 일단 쌀! 60, 70년대는 일단 쌀이었어요. 쌀 같은 것도 많이 이래 해가..... 그래서 어린 마음에 내가 자라면서 본 거는요. 내 아버지 돈 시알리고[세고] 그러는 거..... 돈이 있어야만 친구들이 있는 거야. 항상 보면 아버지가 리더를 하시더라구. 그때는 없이 살았으니까 없는 사람한테 많이 베풀고, 새마을 운동 때 못 사는 사람 참 많았거든. 그래가 걷어서 많이 멕이고 했는데,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어(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통 크고 시원시원한 성격인 진자 씨에게 항상 남에게 베풀고 군인들도 회피하였던 힘든 일을 앞장서서 하셨던 아버지는 닮고 싶은 이상적 모습이었던 것이다.
‘할 일이 많은데 일찍 세상을 떠난다’는 한 때문에 눈도 못 감은 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집안엔 가난이 찾아왔다. 남부럽지 않게 밝게 성장하던 진자 씨는 그로부터 조금씩 세상살이의 상처를 경험하게 된다. 아버지를 여읜 상실감과 함께 주변 사람들의 나몰라라 하는 태도, 돈을 비려갔던 사람들이 보여준 뻔뻔함은 사춘기 소녀 진자 씨가 일찍 경험한 큰 아픔이자 배신감이었다.

그리고 나서 너무 아팠어요. 반 이상을 학교를 못 다니다시피 했어요. 중.고등학교뿐 아니라 초등학교 때부터 신경성으로 부모님을 많이 고생시켰어요.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신경성이래요. 그러니까 마음에서 오는 병 같아요.
부황 같은 거..... 저는 침도 많이 맞았어요. 별 짓을 다 해 봤거든요. 요즘엔 부황단지로 부황을 뜨고 이런 것도 미용이라고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죽은피라고 해야 되나? 그런 세포를 빼냈기 때문에 부황단지가 피로 물들다시피 했고..... 10개 넘는 부황단지가 전부 피였으니까.
자라면서 반 이상을 병원 신세를 지면서 그것도 안 돼서 나와서 침으로 다스렸는데..... 그래가지고 고생도 많이 했어. 내가 가서 보면요 다들 노인분들이 오지요, 젊은 사람들은 없어. 근데 내가 그 대열에 껴서 젊은 사람이 침을 맞는다는 게 너무너무 끔찍했고. 근데 세포가 침을 거부하는 것도 많대요. 속에서 거부하면 침이 다 튕겨서 나가요. 그걸 참고 맞아야 돼요.

결핵을 죽을병이라고 생각하고 어두운 10대를 보낸 승숙 씨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원인 불명의 신경성 질환을 앓았던 진자 씨에게 소녀시절의 기억은 가난과 병마와 싸웠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진자 씨는 일찌감치 “여기도 아파, 저기도 아파하는 노인네들” 대열에 합류하여 한창 뛰노는 자기 또래들과 무관한 ‘열외’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하늘이 꺼져라, 당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며” 살았다. 그래서 “살아가는 게 재미가 없고 마 희망이 없는” 생활을 하는 와중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사람들이 “배신 땡기는” 모습을 보이자 절망이 극에 달하게 된 것이다.
구수한 입담에 활기찬 진자 씨의 모습은 그녀에게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게 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진자 씨와 진자 시를 소개시켜 준 남편 동료의 부인과 함께 동네 치킨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수 뺨치는 노래 솜씨로 시종 좌중을 이끌었던 진자 씨가 현재처럼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바뀌게 된 것은 10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언니들이 미리 ‘터를 닦아 놓은’ 울산으로 오게 된다. 언니들이 다니고 있던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 생산직으로 입사한 진자 씨는 남성들과 함께 어울려 당당하게 일했던 그때의 경험을 낭만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직장만 한 5년 다녔구요. 0000 다닐 때 참 재밌었어요. 회사하고 집밖에 몰랐으면서도.....
성격이 이러다보니까 남자들 사이에 껴서 같이 일하는 게 멋진 거야. 막 기계 만지면서, 기계도 내 손으로 고쳐 가며 막... 여자 일은 아니에요. 기계 만지고 프레스 찍고 이랬거든요. 마, 땀을 흘려가며 일하거든, 우리는 뭐 방울방울 이게 아니야. 마, 그냥 흘러, 쫙쫙 흘러, 근데 그게 더 시원해요.
사무직에서 우리 그런 경험은 모를 꺼야. 우리 생산직은 사무직보다 정말 멋져. 되게 멋져요. 땀 흘려 가면서, 담 냄새 맡아 가면서 일하면 얼마나 멋진지 알아요? 그래 일을 하면서.....
어때 오늘 됐나? 됐재! 오늘은 2통1반이다, 이래 가며... 막걸리 2통에 사이다 1병이 2통1반이거든. 오늘은 2통1반이다, OK? 이러면 다 OK야. 오늘은 호프집이다, 맥주집이다 그러면 또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만 가는 게 아니거든, 남자랑 함께 가거든. 야, 허희도 됐나, 그러면 됐다 카거든, 그래가 마 조반장들은 그때 돈이 좀 되잖아. 함께 뿜빠이도 하지만 조반장들이 많이 쏴. 다음날을 생각하면 단합이잖아.
그래가 마, 됐나? 됐다! 카거든. 얼마나 멋지게. 그래가 마, 오늘은 반장님이 쏘소! 이라면 쏜다네. 그래가 우리 라인 다 가가 쫙 하면 하루 피로가 쫙 풀리지. 그래가 마, 내일도 멋지지? 그라면 멋지게 살자, 그라면 또 그러자 하거든, 그러면서 단합이 되는 거야.
그래가 마, 다음날 누가 지각하고 안 나왔다 카며는 그건 왕따지. 그건 또 절대 못 봐 주거든. 그래가 마, 우리 같은 경우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들은 마 술이 떡이 되든 떡이 안 되든, 가며는 아침에 상쾌하게 씻고 화장까지 해서 산뜻한 마음으로 오잖아.
그런 생활이 참 좋더라구, 돌아가고 싶어. 그런 마음이 있구요.

진자 씨는 원했던 회사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생산직에 대한 비하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쫙쫙 땀 흘려가며 일했던” 생산직 노동현장의 경험을 사무직과 비교하며 ‘보람’으로 회고했다. “남녀 이성을 떠나서 야유회도 가고 가을에는 체육대회도 했었던” 기억을 평등한 남녀관계의 이상적 상태로 기억했다.
회사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각별한 데에는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을 만났다는 점도 한몫했다. 남편은 10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며 동료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곤 하면서도 만 10년 개근을 했다고 한다. 진자 씨는 남편의 부지런함과 강인한 생활력뿐만 아니라 “시집 어른도 불만이 없고 나도 불만이 없도록 하는” 남편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진자 씨는 생계부양자인 남편에 대한 내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권태기가 왔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남편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결혼 전의 직장에서 땀 흘리는 노동의 보람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남편까지 만났기 때문에 진자 씨는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까지 갖고 있었다.
이렇게 직장생활을 재미있게 하였지만, 회사 기숙사에도 못 들어가게 할 정도로 “놔 주지를 않았던” 언니의 지나친 통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동생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주겠다는 식의 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진자 씨는 ‘회-집, 회사-집’만 오가는 생활을 벗어나 제2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결혼제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현대가족 이야기’ 중에서, 조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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