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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겨울 어느날 - 이철의

지부장이 경찰에 출두했다. 싸움을 이긴 뒤에 보내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파업 300일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기에 가슴이 아프다. 지부장에게 ‘선의 나침반’을 권했더니 품에 꼭 안고 경찰서로 갔다. 더 따뜻하게 대하여 줄 것을 너무 냉정하게 지도력만 원하였다. 시련 속에서 더 단단해져 나오기를....

내년이면 오십인데 건강은 그럭저럭하고 아직도 잘 버티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되새기며 한 해를 보냈다. 전망이니 변혁이니 그런 표현은 쓰지 않지만 고집 은 아직도 남았다. 많은 후배들은 전망이 없다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 싶다 한다. 점점 더 말을 하는 게 부담스럽다. 논쟁은 무조건 사양이다. 그저 네 할 일이나 쉬지 말고 해라. 가끔씩 쉬고 싶거든 하루쯤은 푹 쉬거라. 남에게 혹은 운동에 폐만 끼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년 한해도 이런 심정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네 시간 정도 청소를 하였다. 묵은 쓰레기를 치우는데 한 시간 반, 창고 두 개를 정리하는데 두 시간 가량, 그리고 침실로 쓰는 창고를 정리하는데 삼십분 정도, 도중에 배가 고파서 막걸리를 한 사발 마셨다. 한 달쯤 묵은 술인데 겨울이라 그런지 먹을 만하다. 부산 부지부장에게 권했더니 먹는 시늉만 한다. 성실한 친구다.

창고를 치우다 보니 파업을 그만둔 조합원들 물건을 보게 된다. 승무원 정복을 세벌 정도 버렸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어차피 버릴 물건이다. 집회 때 나누어준 손수건, 엑스표를 친 마스크, 뿔나팔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잠시 쓸쓸해졌다. 이 물건의 주인은 파업을 포기하기 전에 얼마나 망설였을 것인가? 기초 화장품, 옷가지, 장갑, 모자 등 소지품을 그대로 두고 떠나 버렸다. 전태일 평전을 두고 간 친구도 있다. 파업 300일에 희망도 절망도 두고 간 친구들, 그 친구들이 한때 가졌을 분노나 감동조차 두고 간 것 같아 쓸쓸하기 그지없다.

은행잎이 모두 떨어지기 전에 싸움을 이기자고 하였건만 끝날 날은 요원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단 한 개의 은행잎도 남아있지 않다. “은행잎을 실로 묶어 놓으면 되지요.” 농담을 했던 친구는 아직도 남아 있다. 94년 처음 해고되었을 때 펄펄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고 유달리 스산했던 기억이 새롭다. 300일이 넘는 파업기간동안 고참 간부인 나는 조합원들에게 무엇일까?

상황실장이 방송 차 나팔을 깨먹었다. 모레쯤 집회를 해야 하니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나팔 값은 9만 원 정도, 조합 봉고차 세대를 주로 수리하고 있다. 급한 사람이 고쳐야 하니 그렇게 되었다. 갈수록 늙어가는 기분이다.

기름을 네 통 넣었다. 부산 조합원들은 이틀에 한번, 서울 조합원들은 4일에 한번 넣어 주어야 한다. 연휴 때 귀가를 하지 않은 조합원들이 있다. “기름 안 떨어졌나?” “그러잖아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겨울 날 일이 걱정이더니 그럭저럭 한 달은 지나갔다. 감기나 폐렴 같은 병에 걸려 아픈 친구나 없었으면 좋겠다.

“약골처녀, 이번 주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네.”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쓰러지는 친구가 있다. 되도록 집회에 오지 말라고 해도 굳이 와서 실신한다. “저 이제 안 아파요.” “그래그래 아프지 말아야지.” 귀가 때 집에 가서 푹 쉬고 오라 했더니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병간호를 했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병원신세. 파업을 이겨도 차를 제대로 탈지 걱정이다.

약간 땡땡이를 치던 친구들이 조장회의에 걸렸다. 조합원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게 조장들이다. 좋게 무마하려고 몇 마디 거들었는데 자기들끼리 회의하는 게 추상같다. 조장회의에는 원래 개입하지 못하는데 상황이 복잡하다고 참관하라고 했다. 조장회의에서 잘못된 결정을 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파업 300일을 버틴 중요한 회의 중 하나이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늙어간다.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을 잊게 되었다. 변절한 사람, 떠나간 사람, 탈퇴한 조직, 깨진 조직,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 한때 가졌던 열정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일 년에 한번쯤 못 마시는 소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다.
옛 말에 이르기를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난다고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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