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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30대

지난 10년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와 메일들을 찬찬히 읽어 보면서 나의 30대를 돌아봤습니다.
10년 동안 해왔던 크고 작은 투쟁과 여러 고민들을 다시 곱씹어 보는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30살 (1998년)

96년에 현장운동을 하겠다고 울산에 내려와서 울교협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96년~97년 총파업투쟁을 지켜보면서 울산 노동운동의 거대한 힘과 관료화의 우려를 확인했었습니다.
그렇게 외각에서 보낸 3년 만에 현대자동차에 정리해고라는 광풍이 몰아쳤고, 나는 현대자동차 민투위를 통해 처음으로 현장과 결합된 투쟁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울산에서 보낸 10여 년의 활동에서 가장 거대하게 경험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거대 자본의 위력과 대중투쟁의 상상하기 어려운 활력을 몸으로 느끼게 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과 활력은 이후 울산에서 활동을 하는데 엄청난 자양분으로 작용했습니다.
완강한 투쟁에도 지도부의 배신으로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현장은 초토화됐습니다. 현장에서 쫓겨난 이들은 정리해고무급휴직자복직투쟁위원회와 생계대책위원회 등을 구성해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합니다.

엄청난 경험을 하면서도 나는 상황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면서 소극성과 자신감 없음에 대한 고민에 빠집니다.
그해 연말 저는 ‘희망’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장문의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때 내가 생각한 희망은 ‘현실에 뿌리내리면서 주위에 있는 이들과 작지만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30대를 보내면서 나의 주요한 과제가 됐습니다.

31살 (1999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의 패배 이후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금속연맹, 금속연맹 울산본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등의 주요한 대중조직 선거에 개입하지만 모두 패배합니다. 현장에서 쫓겨나 있는 동지들이 많은 상태에서 생계문제를 비롯해 현장활동의 전망 등에서 모두들 힘들어 하는 기간을 보냅니다.

사회는 IMF의 광풍 속에서 풍지박산 나고, 주위 동지들은 힘겹게 버티고 있고, 나 역시 생계문제를 비롯해 점점 줄어드는 자신감 때문에 고민이 심각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슬럼프라는 것이 찾아왔고 저는 고민 끝에 장기휴직을 신청하고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집안 역시 농협을 다니시던 아버지가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그만두시게 되면서 어려움이 있었고, 대학졸업하고 집안 생계를 챙기고 있던 큰 동생은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내 고민만을 부여잡으려 했던 나는 퇴직 후 힘겨워 하는 아버지와 집안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큰 동생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어야 했습니다.

32살 (2000년)

현대자동차 민투위 동지들의 권유로 민투위 간사로 울산으로 복귀합니다.
길지 않은 방황의 기간을 보내고 복귀한 후로 의욕들이 많이 앞섰습니다.
대공장 현장조직 활동을 하면서 여러 활동에 참여를 하면서 현장활동에 대한 경험들을 쌓아가기 시작했고, 현대미포조선 김석진 동지의 복직을 위한 장기 단식투쟁을 비롯한 지역의 여러 투쟁에도 결합합니다.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지역과 전국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매우 열정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학교 후배들과의 관계도 복원하기 위해 OB모임을 만든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또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으로 대체를 거부하면서 지문날인거부운동에도 참여를 하게 됩니다. 러시아로 유학을 간 막내 동생과의 애정 어린 편지들도 발견되고, 소개팅으로 만나서 잠시 메일만 주고받다가 끝났던 한 여성과의 메일도 보였습니다.
끝임 없이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과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고민들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지난 10년의 기록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 시기였습니다.

33살 (2001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선거에서 민투위 후보가 당선되면서 새로운 활동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비롯해 울산의 화섬3사 구조조정 저지투쟁 등 매우 격렬한 투쟁이 울산과 전국에서 벌어졌습니다.
매우 열정적으로 그런 투쟁들에 결합했지만 결국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집행부가 7월 5일 총파업을 철회하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집행부가 저와 함께하는 현장조직 출신이어서 그 충격은 더 컸습니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이후 가장 큰 투쟁이 울산에서 벌어지는 상황이어서 개인적인 기록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개인적인 관계들보다 현장활동 속의 관계들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개인적인 기록들은 애정으로 넘치고 있었고, 관념적 표현들이 줄어들고 감성적인 표현들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후배들과도 가장 많은 양의 메일을 주고받았고, 러시아로 유학을 가서 매우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막내 동생과는 가장 정겨운 메일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한 여성 동지에게 연민의 정을 잠시 품기도 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리기도 했습니다.
지난 10년의 개인기록들 중 이 시기 기록이 가장 가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34살 (2002년)

현대자동차 현장활동에 대해서도 2001년 7월 5일 총파업 철회 이후 고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현대자동차 현장활동보다는 발전노조 파업투쟁을 비롯한 지역투쟁에 참여를 많이 했습니다.
학교 후배들과의 관계의 끈도 계속 부여잡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둔지 8년 만에 졸업한 후배들과 같이 MT를 가기도 했더군요. 러시아에 가 있는 막내 동생과도 메일을 계속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장활동의 한계와 여러 가지 정파적 대립들이 격화되면서 점점 재미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관계들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성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10년 기간 중에 가장 기록이 적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시기였습니다.

35살 (2003년)

현장활동에 대한 고민들이 많은 상황에서 현대자동차 근골격계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예상치 못한 파급력을 몰고 왔고, 그 중심에 어느 순간 제가 서 있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투쟁을 생각하면 즐겁다’라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 즐거움은 곧 엄청난 힘겨움으로 발전하고, 결국 네 번을 울면서 끌고 간 투쟁은 구속으로 이어졌습니다.

28살에 울산에 내려와서 현장 밖의 노동단체에서 활동을 하가다 32살 때 현장조직 간사로서 현장활동가들과 직접적인 현장활동을 벌인 8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들을 직접 조직하는 투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대중들의 아픔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아픔 속에서 다시 엄청난 힘겨움과 활력을 느끼게 됐습니다. 30살에 맞이한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이후 가장 커다란 활력을 느낀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구속 이후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은 점점 배신감으로 커지기 시작하면서 쓰라린 상처를 남기게 됐습니다. 구속된 상태에서 썼던 글들에서는 초기에 분노가 넘쳐흘렀고, 나중에는 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6살 (2004년)

출소 이후 결핵치료를 위해 제주에서 요양을 하게 됩니다.
몸의 상처와 가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보낸 8개월의 기간은 잠시 여유를 안겨주는 한편 또 다른 고민들을 힘겹게 안겨줬습니다.
2003년 근골격계 투쟁 이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선거에 당선된 동지들은 점점 배신감만을 키워줬고, 저는 여러 고민 끝에 저의 8년을 헌신했던 동지들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반기에 울산으로 다시 복귀했지만 복귀 후 새로운 활동공간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주위 동지들과도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가입해 있던 정치조직도 탈퇴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고민스러운 기간을 보내면서도 이 당시에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합니다. 그렇게 2003년 근골격계투쟁이 나른 단련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37살 (2005년)

새로운 활동공간으로 선택한 곳이 한국노동안전보건 부산연구소였습니다.
울산활동을 정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낯 설은 활동공간과 지역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과정으로 이어졌고, 저는 결국 4개월 만에 그곳 활동을 정리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던 현대자동차 민투위 동지들과 결별하고, 몇 년간 활동했던 정치조직도 탈퇴하고, 새로운 활동공간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결과는 엄청난 방황이었습니다. 이때 매우 심각하게 운동을 그만두는 문제를 고민했고, 나의 30대 삶에서 가장 힘겨운 기간으로 남게 됐습니다.

심각한 고민 속에 방황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울산노동뉴스에서 기자활동을 하기로 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현대자동차가 아닌 지역의 여러 사업장을 돌아다니게 되고 그러면서 다양하게 투쟁하는 동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현장 밖으로 나와 새로운 사업장의 동지들과 만나서 조금씩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저에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과정이었습니다.

38살 (2006년)

울산에서의 활동 10년차를 맞이하는 2006년, 다시 자신감과 활력을 되찾게 되면서 그동안 현대자동차 활동 속에서의 고민들을 극복하기 위한 실험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발적 대중운동’이라는 화두 속에 진행된 다양한 실험들은 의외의 성과들을 남기기 시작했고, 다양한 투쟁사업장들을 취재하면서 같이 몸으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새로운 동지적 관계들이 넓혀져 갔습니다. 특히 보육노조 해고자투쟁, 공무원노조투쟁, 효정재활병원 해고자투쟁은 새로운 형태로 현장투쟁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 계기가 됐습니다.

2006년은 참 많은 글들을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쓰기 시작했고, 나의 무수한 기록들 속에서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30대 초중반에 소중하게 유지하고자 했던 학교후배를 비롯한 과거의 관계들이 소원해지기도 합니다.

2006년 연말에 한해를 돌아보면서 처음으로 ‘행복했다’라는 기억을 간직하게 됐습니다.

39살 (2007년)

2년여에 걸친 울산노동뉴스 활동으로 지키기도 했고, 좀 더 새로운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과감하게 울산노동뉴스를 그만 둡니다. 하지만 그 이후 새로운 활동을 위한 현실적 조건들을 혼자 힘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그 현실의 벽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시 여러 고민들과 방황의 기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의 30대를 돌아보니 참 부침이 심한 10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대 초반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고, 30대 중반에는 ‘현실’과 ‘관계’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고, 30대 후반이 돼서는 ‘대중’ ‘호흡’ ‘간절함’이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그렇게 나의 ‘희망’은 ‘현실’로 내려와 ‘대중’속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30대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극적이었던 나는 매우 열정적인 인물로 변했고, 현실 속의 대중이 전해준 그 열정으로 인해 나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10년 전 나의 20대를 돌아보면서 “아쉬움은 많지만 후회는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10년이 지나 다시 30대를 돌아보면서 역시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30대를 맞이하면서 “나의 원칙이 현실 속에 뿌리내리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이제 40대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나의 열정이 현실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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