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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 - 현기영

아직도 곳곳에 영등굿이 한창인데 풍편인 듯 대정 화전민들이 삼읍에 통문을 돌린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이틀이 못되어 각 마을 동소임 집에 그 통문이 도달했다. 2월 6일, 삼읍 민인은 매호당 장정 한 명씩 내어 마을별로 성군작당(成群作黨), 주성(州城)으로 회동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민심이 흉흉하게 들끓어올랐다.
“목사인지, 개아들놈인지 천하에 쥑일 놈이여! 백성을 속여도 유분수지, 약조를 지킬 생각은커녕 도리어 뒤에서 칼을 갈아? 에따! 잘 됐져! 이참에 한번 죽을똥 싸봐라!”
“그놈이 이젠 흉계가 탄로나니까, 버썩 겁이 나서 육지로 튈 궁리를 허는 모냥이라. 행장을 꾸려 놓고 몰래 포구에다 배를 물색헌다는 거여. 집세(執稅) 색리들도 발세 자취를 감춰버린 놈들이 많다는구먼, 이병휘가 종내 먹은 돈을 게워놓지 않고 도망갈 눈치니까 이거 큰일이다 싶어 숨어버린 거라. 이병휘가 홀연 육지로 튀는 날이면 자기들만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판인디, 그 밤쥐같이 약은 것들이 그냥 앉아서 화를 당허겄는가.”
“즈이들이 감히 튀면 어디로 튄다는 거여? 발세 포구마다 통문(通文)이 떨어져 일절 배를 못 띄우게 단속하는디!”
“허지만, 이병휘 놈이 관령이라고 윽박질러서 배를 빼앗으면 그만 아닌가?”
“아니여. 설사 저놈들이 배를 구한다고 해도 발 묶이긴 마찬가지라. 때마침 연일 강풍이 몰아쳐 저렇게 바다가 탁 뒤집어졌는디 가긴 어딜 가!”
“참말로 올해 영등바람이 일지거니 터진 것도 한라산 산신님의 조화여! 산신님이 노하시어 영등하르방을 미리 부른 거라. 옛날 고려적에도 몽고놈들이 관음사 큰 구리부처를 빼앗아 배에 싣고 떠나자 백성들이 포구에 모여설란, 징 치며 하소연허니 한라산 산신님이 호령 매로 둔갑하여 몽고 배를 쏜살같이 쫓아가 일진광품으로 가라앉혔다지 않는가!”
“괘씸하고 토씸한 놈들, 즈이들이 도망가면 어딜 가! 이번참엔 난리 나도 대난리가 될 거여. 매호당 장정 한 명씩 몽둥이 들고 나오라고 했으니, 필시 여러 놈 죽을 거여!”
“하지만 목사놈을 어찌하진 못할걸, 그저 아전붙이 한두 명 물고낼 뿐이쥬. 관장(官長)은 백성의 어버이라고 했으니, 감히 이병휘 그놈의 상투 끝인들 잡아당겨 보기나 하겠어? 에이! 일산(日傘) 쓴 큰 도둑은 놔두고설란, 그 밑에서 잔전 부스러기나 챙긴 아전놈들이나 잡아 태질치면 뭘 해여?”
“아메도 이번엔 그리 시시부지 끝나지 않을걸.”
“그렇지만, 원통헌 일이 있이면 거듭거듭 애소(哀訴)로서 신원해사 백성의 도리가 아니카?”
“이 답답한 사람아, 여태 잠자코 있다가 기껏 헌다는 소리가 그거라? 나라에서 탐관오리를 징치하지 않으니, 우리 백성 손으로 다스릴밖에 더 있는가! 누구는 백성된 분수를 헤아릴 줄 몰라 이러나? 자고로 조정에서는 이 섬이 수륙 만리 변방이라 하여 전혀 안중에 없고 버리기를 똥 버리듯이 해오지 않었는가. 난리가 터져 아우성이 하늘을 찌르고 사람 몇이 물고나야 나라님은 삼일 강아지 눈 뜨듯 내려본단 말이여. 난리를 일으키지 않으면 도저히 골수에 맺힌 이 원한을 알릴 길이 없는거라!”
“허지만 냉중 후환이 두렵기도 허고..... 나라에서 병대를 보내오면 우리 섬 백성들 어육을 면치 못하느니.”
“허허, 이 사람, 갈수록 방정맞은 소릴 더 하네. 이번 일이 무슨 역적질이나 되어? 나라에서 병대를 보내게. 단지 백성을 침학하여 황상(皇上)을 욕되게 한 죄인을 정치하자는 것뿐인디.”
“그 말이 네귀 번듯한 말이여. 이건 민란이여. 병란(兵亂)에는 사람이 무수히 죽지만, 민란엔 난민들은 살아도 장두(狀頭)는 반드시 죽는거여. 아아, 장두.모사(謀士).집사(執事)들이 관덕정 마당에 작두칼로 목 버혀 죽는 거여. 방씨 하르방이 내 한몸 안위만을 위한다면 왜 죽기를 스스로 택하겄는가? 진구렁에 빠져 허덕이는 이 백성들이 아니면 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겠느냐 말이여. 그 어른이 몸바쳐 나오지 않은들, 우리가 무슨 수로 원통함을 풀겠는가. 아아, 우리 젊은 나이가 부끄럽고나! 팔십난 노인께 장두를 맡기다니. 우리 같은 겁쟁이는 오합지졸로 그저 우르르 따라댕기며 소리나 지르는 것 뿐이고.....”
“.....”
“바로 그 하르방이 영등하르방이여!”
영등바람은 연일 강풍으로 몰아붙였다. 바람에 휩쓸려 바다가 가마솥 물꿇듯이 꿇어오르고 하늘에는 낮게 뜬 구름 떼가 억만 군병이 내달리듯 급히 몰려갔다. 영등맞이 굿터의 북 소리, 징 소리는 덩덩 깽깽 바람 타고 사방에 울려퍼졌다.
“영등하르바님, 어진 하르바님, 하르바니 아니면, 누게가 눈에 든 가시를 내주며 누가 등창에 고름을 내줍내까. 영문(榮門) 차사, 범 같은 나장이, 군졸들일랑 저 문 밖으로 훨쭉 퇴송시켜 줍서.”

......
......
......

“사또! 시방 이장두가 한 말이 저 일만 회민의 목소리임을 명심하십서. 이장두나 내나 아무리 무지하고 완명(頑冥)하기로 큰 화란이 목전에 닥친 줄 왜 모르겠소? 왜 법국 군함이 두렵지 않겠소? 회민이 일만이라도 개미떼가 태산을 움직이겄습니까? 영감님 말씀대로 강화하는 길 밖에 타개책은 없읍죠. 허나, 강화는 장두 임의대로 못합니다. 저 분기충천한 일만 회민을 봅서. 광양촌에서 열세 명의 피를 본 뒤로는 모두 눈이 확 뒤집혀 진격 명령을 내려달라고 여간 아우성이 아니우다. 벌서 뒷전에서 교인 둘이 살해된 모양인데, 이런 판국에 장두란 자가 강화 두 자를 들고 나올 수가 있으꽈? 당장 몰래 맞아 죽지, 살지 못합니다. 십여 년 전 난리에 장두 김지가 왜 백성들한테 맞아 죽었우꽈? 저 회민들을 통솔하자면 장두도 똑같이 미치지 않으면 안되어, 마씸!”

- ‘변방에 우짖는 새’ 중에서,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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