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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혁명과 상품의 가치.가격,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명 - 채만수

 
'정보재' 혹은 '정보상품'은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사실상 비용과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 되기에 부적합한 재화다. 여러 논의들이 '정보재'의 특성과 관련, '비배제성'이니 '비경합성'이니 하고 논하는 것은 사실은 바로 '정보재'의 상품으로서의 그러한 부적합성을 웅변하고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프트웨어 등의 '정보재'를 상품화하는 데에 존재하는 강력한 저항은 결코 "도덕적, 관습적 제약"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 재화에 고유한 경제적, 사회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품이 되기에 부적합한 재화를 자본주의 국가는 특허 및 지적재산권이라고 하는 법률, 경찰, 사법 등의 폭력을 통해서 '인위적.작위적으로 상품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그렇게 상품화되기 때문에 그 시장은 애초부터 독점적이고, 그 가격은 그 가치나 생산가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매자의 구매욕과 지불능력에만 의존하는 독점가격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국가가 '정보재'를 이렇게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사실은 본래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서 생산되게 하는 조건이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기초에 놓여 있는 (사적)소유에 주요한 제한을 가하고 그 내용에 일정한 변화를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 (사적)소유는 그 대상에 대한 일체의 지배.사용.수익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소유자가 그 사용가치를 어떻게 지배.사용.처분하든, 사회통념에 비추어 반윤리적.반사회적인 것만 아니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소유자의 권리이다. 그 때문에, 심지어 저작권이나 특허권 제도가 성립된 이후에도, 어떤 저서나 악보, 기타 물건을 출판업자 등이 상업적 목적으로 무단히 복제하여 판매하는 것에 대해서는 금지.제한 조치가 취해졌지만, 사적 개인이 그것들을 복제하여 공유.사용 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금지.제한이 가해지지 않았다. 그것들을 복제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이나 노동시간 등 기술적 이유 때문에 그러한 복제행위를 금지.제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재'에 이르면, 보다 정확히 말해서, '정보재'가 상품화되는 시대에 이르면 상황이 전혀 달라져서, 이제 '정보재' 구매자의 소유권은 극히 좁은 의미의 단순한 사용.수익권으로 제한된다 심지어, 주지하는 것처럼, 만일 누군가가 예컨대 MS사의 윈도우-XP나 오피스 프로그램을 한 카피 구매하여 그것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두 대 혹은 그 이상의 컴퓨터에 설치한다면, 이제 그것은 '불법'으로서 단속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불법적'으로 복제.사용 하고 있고, 나아가 국가에 의한 '작위적 상품화'를 역이용하여 판매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그러한 작위적.폭력적 상품화에 광범하게 저항하고, 음험하게 편승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발전한 노동의 물질적 생산력이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그 생산관계, 그 생산양식과 조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과 그 생산관계.소유관계의 극대화된 모순.충돌을, 그리하여 사회혁명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선명히 드러내는 현상이다.
사실, '정보재의 상품화'가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과 그 생산관계.소유관계 사이의 극대화된 모순.충돌을 표현하고 또한 그것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기존의 논의에서도 이런저런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강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보를 상품으로 만드는 데에는 비생산적 비용인 상품화 비용이 필요하게 된다. 상품화 비용은 사회 전체로 보면 비생산적이고, 낭비적인 비용이다. 이러한 비용은 점점 더 사회화되어 가는 생산력을 고도로 발달한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사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 때문에 발생한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그러한 비용을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혁명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용을 기술적, 제도적으로 감소시켜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순을 점점 증폭시키고 있다. 빈부격차가 점점 커져서 사회적 부가 소수의 손에 더욱 집중되는 20대 80의 현상이 모순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조원희.조복현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보재의 특성은 중립적인 물적 특성이 아니라 그 생산의 사회성과 소비의 사회성의 고도화, 즉 생산력의 고도화와 그 생산력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의 일층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순은 사적 이윤을 목표로 한 자본간의 과도한 경쟁,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회화, 즉 거대한 독점을 창출하게 된다. 독점이윤은 정보통신산업의 경우 더욱 협소한 조건에 기초한 것이고, 이에 따라 경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더욱 증대한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며, 또한 얼마나 이러한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면서 '정보재'의 가치.가격을 고찰했는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결코 긍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말자하면, 모순과 충돌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만, '그러한 인식 따로, 정보재 가격에 대한 파악 따로'인 상태다. 주요하게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른바 상품화 문제에 대한 형식적인 이해가 그렇게 비유기적으로 사고하도록 작용했겠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생산양식, 그 경제적 사회구성을 넘어선 사회에 대한 전망의 부재도 그에 기여하지 않았겠나 생각된다.
예컨대, 한편에서는 "리눅스(Linux) 등과 같은 카피레프트(copyleft), 오픈 소스(open source)운동"에 대해서 얘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가격이 0인 상태가 장기간 계속된다면 그 정보상품은 정상적으로 재생산될 수 없을 것"이라거나, "가치라는 것은 상품의 정상적인 재생산을 보장하는 값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상품의 가치를 0이라고 볼 수 없는 것" 운운하며 터무니없는 독점가격으로서의 '정보재' 가격을 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기초한 비독점가격으로 변호.합리화 하는 것도 그러한 전망 부재 탓일 것이다. 리눅스를 위시한 오픈소스 혹은 프리(free) 소프트웨어들이 현실적으로 자유롭게 발전하고 있는 데에 반해서 MS사 등의 상용 소프트웨어들은 오직 법률과 경찰, 사법 등의 국가 폭력에 의해서만 그 "정상적인 재생산을 보장하는 값"이 보장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적소유와 그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야말로, 혹은 그것만이 정보재의 자유로운 발전과 그 '정상적인 재생산'에 유일한 제약이 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그리하여 사적소유 및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결정적으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 발전의 질곡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확고한 증거의 하나인데도,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상적인 설정이지만, 만약 전혀 노동이 들지 않고 가치가 투하노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경제가 존재한다면 그 경제는 이 자본주의일 수 없다"는 조원희.조복현 교수의 서술 역시, 그들이 사실상 무가치하게 생산되는 '정보재'들을 '평균이윤을 포함하는 생산가격 및 일시적 초과이윤'을 갖는 가치물로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본주의의 극복을 사실상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상적인 설정"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혀 노동이 들지 않고 가치가 투하노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경제"를 상정하는 것은 물론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상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노동생산물에 대한 사회적 규정으로서의 가치가 지양된 사회, 그리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공동소유와 계획경제를 통해서 그러한 가치를 의식적으로 폐기.지양해 가는 사회 - 그것은 결코 공상적 설정이 아니다. 더구나 사물.역사의 발전에서의 '양.질 전화의 법칙'을 상기한다면, "전혀 노동이 들지 ..... 않는 경제" 따위를 문자 그대로 상정하는 것이야말로 공상적인 설정일 뿐이다. 물질적 생활자료의 생산에 '전혀 노동이 들지 않기' 훨씬 이전에 기존의 생산관계는 변혁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과 그 생산관계 사이의 극대화된 모순.충돌은 '정보재'와 관련해서만 드러나고, 폭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근 수십 년 간 급격히 전개되어 온 과학기술혁명, 특히 디지털 혁명을 수반한 극소전자(ME)혁명은 사회의 주요한 물질적 생산 부문들에서 전면적 자동화, 즉 무인생산을 실현시켜 가고 있고, 따라서 '정보재'만이 아니라 주요 상품의 가치가 모두 사실상 0을 향해서 접근해 가고 있다. 시장경제의 가치법칙은 당연히 (과학기술혁명의 결과로) 무가치하게 생산되는 재화는 무가치하게 분배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기초하여 이윤, 즉 잉여가치의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그 생산관계는 이를 허용할 수 없다. 그리하여 '독점가격'이 설정되고 지배적으로 된다.
이는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을 절대적으로 격화시키게 된다. 독점자본이, 한편에서는 전면적 자동화, 즉 생산과정에서의 노동력의 전면적인 배제를 통해서 가치 곧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가치 곧 잉여가치를 대량으로 전유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학기술혁명과 그 성과로서의 전면적인 자동화, 노동력의 대량 배제는 생산 부문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무 자동화, 유통 자동화를 통해서 이들 영역에서도 그러한 상황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온 지 이미 오래다. 고도의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분배관계 간의 모순.충돌이 그리하여 만성적 과잉생산과 공황으로 폭발해 온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러한 모순과 충돌은 사회적.정치적으로는 대량의 실업과 비정규직.불완전취업, 즉 대량화하는 과잉인구, 광범한 그리고 심화되는 빈곤, 빈발.대형화하고 격렬해지고 있는 노동자.농민의 파업.투쟁, 만연해 가는 범죄, 노동자.민중에 대한 국가와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및 억압,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과 민족적.국제적 저항, 등등 - 한마디로, 여러 형태로 격화되고 있는 계급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노동과정이 단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순한 과정일 뿐인 한, 그 단순한 요소들은 모든 사회적 발전형태에 언제나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 과정의 각각의 특정한 역사적 형태는 모두 이 과정의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형태들을 더욱 발전시킨다. 어떠한 한 성숙 단계에 도달하면, 그 특정한 역사적 형태는 탈각되고 보다 높은 형태에 자리를 내준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이 왔다는 것은, 한편의 분배관계,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의 특정한 역사적 형태와 다른 한편의 생산력, 그 담당자들(Agentien)의 생산능력 및 발전 사이의 모순과 대립이 확대되고 심화되자마자 입증된다. 그렇게 되면 생산의 물질적 발전과 그 사회적 형태 사이의 충돌이 발생한다.

자, 그러면 '정보재'의 가격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새삼 만나게 되는 오늘날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과 생산관계.소유관계, 그에 의해서 규정되는 분배관계 사이의 극도로 심화된 모순, 격렬한 충돌은 결국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경제학 비판] 서문 속의 다음과 같은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은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로부터는 독립적인 관계, 생산관계에 들어간다. 이 생산관계의 총체가, 그 위에 법적 그리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조응하는 바의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현실적 토대를 형성한다 .....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들이 지금까지 그 안에서 움직였던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단지 그것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들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로부터 질곡으로 전환된다. 그러면 사회적 혁명의 시대가 도래한다. 경제적 토대가 변화됨에 따라서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격히 변화된다 ...... 하나의 사회구성은 그 내부에서 발전의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또 새로운 보다 높은 생산관계는 그 물질적 존재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대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류는 언제나 단지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곳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략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이 경제적 사회구성의 순차적(progressiv) 시대로 불릴 수 있다. 부르조아적 생산관계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최후의 적대적 형태인데, 개인적 적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생활조건으로부터 발생하는 적대, 그러나 부르조아 사회의 품속에서 발전하는 생산력이 동시에 이 적대를 해결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조하는 적대라는 의미에서 적대적이다. 그리하여 이 사회구성과 더불어 인간 사회의 전사(前史)는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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