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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과 비어 있음 - 신영복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데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이 「무일」편에서 개진되고 있는 무일사상無逸思想은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평가됩니다.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일 사상은 주나라 시대라는 고대사회의 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문화와 중국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1957년과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운동下方運動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방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와 관료주의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일」편은 주공의 사상이나 주나라 시대의 정서를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편을 통해 가색稼穡의 어려움, 즉 농사일이라는 노동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산노동과 유리된 신세대 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나한테 건설 회사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는 후배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무일’이란 이름을 추천했지요. 건설 현장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싫다고 하더군요. 건설 회사가 ‘일이 없으면’(무일)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무일無逸이 물론 그런 뜻은 아니지만 어감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일이란 의미에 대하여 아무런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러분과 같은 신세대 정서로는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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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해석상의 논란이 약간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역시 노자 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穀은 바퀴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軸을 끼웁니다. 곡에 축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곡이 비어 있어야 축을 기울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명한 사실의 배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이는 것이지요. 숨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찻잔 한 개를 고를 때 무엇을 보고 고르지요? 모양이나 질감, 색상, 무늬 등을 보고 고릅니다. 말하자면 유有를 보고 고르는 셈이지요.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이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노자』를 상품과 노동의 화두로 읽는 것이 『노자』를 매우 얕게 읽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학玄學을 경제학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치란 소유와 소비라는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추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실천적 관점이 바로 『노자』의 현대적 독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으로부터 무소유無所有의 철학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예찬은 자칫 사회의 억압 구조를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진 장삼 한 벌과 볼펜 두 자루만 남기고 입적하신 노스님의 모습은 무소유에 대한 무언의 설법입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소유의 탑을 쌓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설법은 매우 중요한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나는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 숨겨진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몇 년째 화두처럼 걸어놓고 있는 나의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이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분이 참석했는지 참석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무無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 신영복,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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