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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야기 1 -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품는 바다

제 고향은 제주도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바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세상의 끝은 바다였고, 바다는 우리를 가두는 감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바다만 보면 답답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야 그 답답한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왔습니다.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대도시의 신기함보다 온통 바다로 막혀 있던 섬을 빠져나왔다는 해방감이 더 설레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신기함과 설레임도 잠시, 바다가 없는 대도시에서 한 달을 보내고 나니 바다가 미치게 보고 싶었습니다.
바다만 보면 답답했었는데, 막상 바다를 볼 수 없음에 답답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강을 찾았지만, 그곳은 내가 바라던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하철을 타고 무작정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난생처음 찾은 인천역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연안부두가 종점이 버스가 다가왔습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연안부두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온통 철구조물로 뒤덥혀 있는 시커먼 바다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바다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힘없이 서울에 돌아올 때의 그 절망감이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울산에 내려와서 동해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와 땅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삼색 수채화처럼 투명한 제주의 바다와 달리 동해는 참 낯설었습니다.
바다와 땅이 명확히 구분되고, 거친 바위가 쏟아 있는 동해의 검푸른 바다는 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어릴 적 꽉 막힌 답답함으로 다가왔던 바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탁 트인 시원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모두 같을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게 되면서 바다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세상은 보여지는데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낮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실개천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바다로 모인다’는 자연의 이치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강’이라는 노래가 좋아졌습니다.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우리는 흐른다
우리는 흐른다

잠시 구속되어 몇 개월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의 여유로운 생활 속에 처음으로 노자(老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아래로 잘 처하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
그러므로 앞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해롭다고 여기지 않고
위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무겁다고 여기지 않는다
천하가 즐겨 추대하여 싫어할 줄 모르니
다투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공략하는 데는
그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그 성질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것은
천하가 다 알지만
능히 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에 이르기를
온 나라의 치욕을 끌어안는 것을
사직의 주인이라고 하고
온 나라의 불길함을 끌어안는 것을
천하의 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올바른 말은 마치 비딱한 듯하다

출소 후에 다시 찾은 제주의 바다는 더 이상 답답한 감옥도 아니고, 그저 여유롭기만한 고향의 아득함도 아니었습니다.
바다가 바위를 둥글게 만들기도 하고, 깍아지른 낭떠러지를 만들기도 하고, 섬을 감싸기도 하고, 육지를 둘러싸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습니다.
삼색 수채화 같은 제주의 바다도, 철구조물에 둘러싸여 시커먼 인천의 바다도, 거친 바위를 품은 검푸른 울산의 바다도 모두 하나의 바다였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품기도 하는 것이 바다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 높은 산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바닷바람을 느끼면서 여유롭게 바닷가를 거니는 것이 편안하고 좋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어지지만, 바다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높은 연단이나 화려한 조명 속에 만인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는 높은 분들은 자신이 만인을 호령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수한 사람들의 땀 냄새 속에 그들의 연단과 조명이 만들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힘은 대중의 바다 속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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