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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을 먹고 브라질 광장 근처의 나이툰이라는 페냐로 들어갔다. 투박한 나무탁자와 소박한 촛불이 손님들을 맞았다. 이 단출하고 가식 없는 분위기야말로 나이툰의 매력이다. 파라 남매가 만들어 누에바 칸시온의 요람이 되었던 전설적인 파라 페냐의 분위기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 10시가 훨씬 넘어서야 공연이 시작되었다. 아니 공연이라고까지 말하기에는 너무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음악이 흘렀다. 가난이 몸에 밴 것 같은 청년에서 무명의 설움마저 즐기는 듯한 여인, 과거 잠깐이나마 대중적인 인기를 누려본 적이 있는 말쑥한 신사까지, 돌아가며 기타를 잡고 저마다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는 시대와 장르와 국경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민요를 들려주다가는 비교적 최근 노래를 선보이고, 서정성 짙은 노래를 부르다가도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노래나 혁명가요로 넘어갔으며,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노래도 거침없이 불렀다. 칠레의 페냐는 보통 전통이나 토착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전통 음악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인 태도가 전통이라면 전통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칠레가 스페인 식민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이나 이후나 남미 문화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전통의 색채가 상대적으로 엷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과거나 지금이나 칠레의 페냐들이 보통 파라 페냐의 전형을 따른다는 점이다.
카르맨 가 340번지에 있던 파라 페냐는 이사벨 파라와 앙헬 파라 남매가 1964년 문을 열었다. 이 두 남매는 칠레 민속음악을 집대성했으며 누에바 칸시온의 대모이기도 한 비올레타 파라의 자식들이다. 칠레 민속음악의 음악적, 예술적 가치를 입증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어머니 때문에 파라 남매는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방랑가수 생활에 밤무대를 전전하며 성장했다. 유럽을 순회하고 파리에서 밤무대에 선 것도 칠레 음악을 해외에 널리 알리고야 말겠다는 어머니의 당찬 포부 때문이었다.
귀구 후 이사벨과 앙헬은 파리의 라이브 카페를 본보기 삼아 페냐를 만들었다. 먹고살기 위해서이고 어머니 그늘에서 벗어나보려는 시도였지만 페냐는 그들만의 음악적 꿈이 담긴 곳이기도 했다. 라틴아메리카 전통에 기초하면서도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음악을 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음악을 위한 문화적인 공간을 창조하겠다는 꿈이었다. 사실 당시 칠레 상황에서 상업성을 포기한 음악이 설 자리는 별로 없었다. 미국 대중음악이나 이미 상업화된 차차차나 맘보 등이 대중매체의 환영을 받았다. 자국 음악으로는 신민요라고 불리던 와소 4인조 류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을 뿐이다. 와소는 무미하지만 묵묵히 농사와 목축에 종사하는 칠레 농촌의 전형적인 인간형을 말한다. 외국 음악이 유행하는 와중에서도 이들 그룹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칠레 농촌을 이상적으로 포장함으로서 도시에 정착한 지방 이주민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건전한’ 농민상을 제시해 지배문화로부터 배척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의 회로애락을 살갑게 어루만지고, 민속음악 전통을 계승하고 재창조함으로써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안문화를 모색하던 비올레타 파라와 자식들인 파라 남매의 음악과는 크게 거리가 있었다.
파라 남매는 사실 페냐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민속음악의 대모인 어머니조차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물론, 몇몇 영광의 순간이 있었다고는 하나 칠레의 문화계에서 여전히 비주류였던 것이다. 더구나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어두침침하고 투박한 공간에 비주류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아직 귀국하지 않은 어머니의 도움 없이 공연진을 구성하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페냐는 예기치 않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주말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기꺼이 노래를 경청했다. 훗날 누에바 칸시온의 주역이 된 빅토르 하라, 롤란도 알라르콘, 파트리시오 만스 등도 출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칠레 음악의 방향성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새로운 음악 흐름을 주도하던 이들이 사실상 모두 모여들었으니 파라 페냐는 누에바 칸시온의 요람으로 인정받았다. 파라 페냐의 성공으로 비슷한 성격의 업소가 산티아고는 물론 지방에도 생겨나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한 달 뒤에 생긴 발파라이소 대학 페냐는 그룹 킬라파윤을 누에바 칸시온의 주역으로 도약시켰고, 2년 뒤 국립기술대학(현 산티아고 대학) 페냐에서는 그룹 인티 이이마니가 결성되었다. 민중연합 시대를 상징하던 음악계 인사들이 거의 모두 페냐를 거쳐간 셈이니, 1960년대의 페냐는 누에바 칸시온의 요람을 넘어 민중연합 정부의 승리와 좌절의 역사가 점철된 역사적 장이었다.
나이툰의 투박한 실내 분위기도, 또 시대와 나라, 장르를 가라지 않는 레퍼토리도 모두 과거 페냐 파라의 유산이었기에 나이툰을 찾은 이들은 신세대보다는 중장년층이 많았다. 아마도 1960~70년대에 대한 향수가 그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끌었으리라. 그들은 그저 칵테일이나 맥주 한 잔 혹은 간단한 샌드위치 등을 앞에 놓고 친숙한 멜로디에 몸과 마음을 내맡겼다. 그렇게 몇 곡이 흘러간 뒤 내게도 친숙한 곡이 흘러나았다.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였는데 제목은 밝히지 않고 그저 토나다라고만 소개했다. 토나다는 칠레에서 가장 풍요로운 민요 가락의 산실인 중부 지방의 주요 음악 장르이다. 칠레 중부 지방은 안데스 본령과 지맥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지대라 전통적으로 농·목축업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인구도 많고 음악도 발달했다. 토나다는 형식적으로는 스페인 가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올레타 파라가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1940년대 말에도 외래음악이라는 이유로 토나다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비오레타 파라는 토나다에 이미 칠레 농민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배척하지 않았다.
다시 몇 곡이 흐른 후 이번에는 바네사라는 젊은 여성 노래꾼이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를 불렀다. 두껍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풍부한 성량의 소유자가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를 걸쭉하게 부르니 손님들은 못내 흥겨워했다. 사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올레타 파라와는 전혀 다름 음색이었다. 가늘고 어둡고 단조로운 목소리를 지녔던 비올레타 파라는 결코 노래를 잘하는 노래꾼이 아니었다.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집대성한 열정과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창조력이 매력적이지 못한 목소리를 보완해주었을 뿐이다. 다만 비올레타 파라 자신은 그런 목소리에 조금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권 음악이나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목소리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사실 아무 꾸밈없이 단조롭기만 그녀의 목소리가 오히려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 자신도 중부 지방의 소도시 치얀 인근의 작은 마을 산카를로스에서 태어나 16세에 상경했듯이, 비올레타 파라가 노래를 하기 시작할 무렵 산티아고는 고향을 등진 사람들로 넘쳐났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산티아고에서는 1930년대부터 민속음악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아마도 장식음 없는 비올레타 파라의 목소리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정직한 흙냄새를 떠올리게 해주었을 것이다.
전혀 다른 목소리의 소유자인 바네사가 오히려 비오레타 파라의 분위기를 강렬히 연상시킨 이유는, 무명의 노래꾼이지만 꼿꼿한 자세로 손님들을 도전적으로 쳐다보며 노래를 부르는 태도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일에 대한 열정을 분출하는 그 태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도 치근덕거리는 손님이 있으면 기타로 내려치고도 했다는 비올레타 파라의 모습이 투영되었던 것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우악스럽다는 말을 곧잘 들을 정도로 당차고 억척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은 어릴 때부터 형성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치얀 일대에서 한량으로 이름 높았다. 손에 잡히는 악기는 뭐든지 금방 연주할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능을 수많은 지역 축제를 섭렵하면서 즐기는 데만 사용했을 뿐 정작 집안을 돌보는 데는 벼로 관심이 없었다. 비올레타 파라의 어머니는 외출할 때면 아예 기타를 감춰버렸다. 혹시나 아이들이 음악과 가까워져 아버지를 닮을까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한량 아버지를 둔 덕분에 비올레타 파라를 비롯한 9남매 가운데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장남인 니카노르 파라뿐이었고,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릴 만큼 칠레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남매들의 삶은 몹시 고달팠다. 그나마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비올레타 파라는 일골 살 때부터 남매들과 같이 거리와 열차에서 노래를 불러 생계를 도와야 했고, 그때부터 시작된 가난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때로는 콩 한 포대만으로 한 달을 견뎌야 했고, 난방비가 없어서 기타 케이스를 덮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담배연기 자욱한 밤업소에서 새벽까지 노래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두 번의 이혼이 말해주듯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비올레타 파라는 점점 더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삶과 맞섰다. 적어도 파국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비올레타 파라는 여장부로 살았다. 혹독한 삶 속에서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것이 바로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었다. 칠레 민속음악의 보고인 치얀 출신인 데다, 명연주자인 아버지와 노래꾼 어머니를 둔 그녀에게 산티아고에서 유행하는 민속음악은 도시민의 취향에 맞춘 빈 껍데기였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비올레타 파라는 피상적인 민속음악을 일소하고 진정한 민속음악을 보존, 재창조,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비올레타 파라의 강인함과 열정을 늘 따사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오빠 니카노르 파라는 여동생에게 민속음악을 채집할 것을 권유했다. 그것은 늘 가슴 한 구석에 까닭 모를 공허함을 간직하고 살던 비올레타 파라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다.
1953년 그녀는 본격적으로 민속음악 채집에 나섰다. 비올레타 파라의 삶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산티아고 인근 동네의 이주민촌은 물론 중부 지방 일대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해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십리길이든 백리길이든 기타를 짊어지고 때로는 하염없이 걷고 때로는 노새에 몸을 실었다. 낯선 마을에 들어서면 첫 번째 집에 무작정 들어가 노인들이 사는 곳을 물었다. 노인들이야말로 민요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춤을 원하면 춤을 추고 노래를 원하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대신 옛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때로는 죽어가는 노인의 말벗이 되어주고 옛 기억을 더듬게 하기도 했다. 녹음기는 가난한 비올레타 파라에게 사치였다. 그러나 녹음기를 빌릴 수 없었을 때도 작업이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마주치는 노래마다 어김없이 그녀의 영혼 깊숙이 새겨졌으니,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면 충분했다. 몇 달 동안 그녀는 혈혈단신으로 칠레대학 민속연구팀보다 더 많은 노래를 채집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3년은 또한 비올레타 파라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해이기도 하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잊혀져가던 소리가 비올레타 파라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지 감격에 찬 청취자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애정이 담긴 커다란 편지 자루들이 가구도 변변치 않은 비올레타 파라의 집을 장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천 통의 편지에 모조리 답장을 보냈다. 가난한 사림에 우편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사정을 청취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녀의 집은 이번에는 청취자들이 보내준 새 봉투와 편지지와 우표로 넘쳐났다. 무명의 밤무대 가수가 억척 하나로 일궈낸 결실이었고, 그래서 비올레타 파라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인생은 35세에 시작된다”라고. 1955년 민속 부문에서 칠레의 예술 대상인 카우폴리칸 상을 수상했을 때 비올레타 파라는 드디어 안정된 삶을 일구어나갈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비오레타 파라의 자그마한 체구에는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꿈과 열정이 담겨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험난한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불행을 자초하기 일쑤였다. 카우폴리칸 상도 결국 화를 부르고야 말았다. 발단은 바르샤바 국제민속대회 초청장있었다. 그녀가 카우폴리칸 상으로 칠레 민속문화의 대표성을 인정받은 후 폴란드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달짜리 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칠레 음악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겠다는 집념이 더 컸다. 비오레타 파라는 기족을 두고 주저 없이 바르샤바로 떠났다. 그리고 대회 기간 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러나 그녀는 켤코 무너지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잊기 위해 오히려 미친 듯이 공연에 몰두했고, 대회가 끝난 후에는 유럽을 돌아다녔다. 유럽 전체에 칠레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두 번째 이혼의 발단이였다. 첫 번째 결혼생활과 마찬가지로 일에 대한 열정이 파국을 부른 것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그럴수록 일에 매달렸지만 유럽에서 버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유령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여관을 전전하고, 「파리의 칠레여인」(Una chilena en Paris)이라는 노래에 어렴풋이 나오듯 숱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결코 굴하지 않고 칠레 민속음악을 소개할 기회만 생기면 어디든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마치 민속음악을 채집하러 칠레 중부를 돌아다닐 때처럼. 예술가의 오만을 당연시하던 그녀는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파리에서도 숱한 사람을 만나고 숱한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비올레타 파타가 왔다”라고 수인사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예술의 수도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파리가 근본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쉽게 문을 열어줄 리 없었다. 대개는 거의 냉소에 가까운 반응과 맞닥트렸고, 그럴 때마다 비올레타 파라는 분통을 터뜨렸다. 칠레 민속음악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억척스럽게 유럽을 오가면서 결국 굵직한 성과를 남겼다. 파리에서 「칠레의 노래」(Cantos de Chile)라는 다큐멘터리풍의 음반을 취입하고, 인류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로 박물관 부속 전시실에서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했다. 또 영국에서도 방송에 출연하고 BBC방송국 자료실에 자신의 노래를 소장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은 결코 털어버릴 수 없었다.
비올레타 파라가 최종적으로 칠레로 돌아온 것은 파라 페냐가 문을 연 다음이었다. 패냐의 성공은 그녀를 설레게 했다. 드디어 칠레가 전통 음악에 간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녀는 또다시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65년 말 비올레타 파라는 산티아고 변두리의 팔레이나 구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그곳을 장차 민속음악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천막에서 기거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비올레타 파라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기대했던 행정적인 지원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변두리까지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 데다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라의 결혼 소식까지 들려왔다. 민속음악의 전당으로 키워보겠다고 생각한 그 천막에서 비올레타 파라는 마침내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평소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죽음일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비올레타 파라는 자살을 생각하는 나날을 보내면서 아마도 젊은 시절을 몹시 그리워했던 것 같다. 싸구려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다 술 취한 손님이 집적대면 기타가 부서져라 머리를 내려치던 당찬 청춘이었던 시절이 비록 찢어져라 가난했지만 꿈 많던 소녀 시절로 돌아가기를, 산티아라고 올라온 뒤 처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바로 그 나이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서였을까? 비올레타 파라는 「열일곱 살로 달아간다는 것은」(Volver a los 17)이라는 노래를 남겼다. 그녀의 많은 노래가 그렇듯이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한 편의 시였다.
한 세기를 살고
열일곱 살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명한 현자도 아니면서
암호를 풀어내는 것과 같고,
문득 찰나같이 연약한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고,
신 앞의 어린아이처럼
다시 오묘함을 느끼는 것이네.
그것이 바로 풍요로운 이 순간에
내가 느끼는 것이지.
(중략)
당신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뒷걸음질쳤네.
연대의 무지개가
내 둥지로 스며들어
그 풍요로운 색채가
내 혈관을 물들였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운명의 단단한 사슬마저도
내 고요한 영혼을 비추는
순정한 다이아몬드 같기만 하네.
(중략)
감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지식은 할 수 없었네.
가장 명확한 행동도,
가장 폭넓은 사고도 할 수 없었네.
순간이 너그러운 마법사처럼
모든 것을 바꾼다네.
부드럽게 우리를
증오와 폭력에서 멀어지게 하지.
단지 사랑만이 그 기예로 우리를
그렇게도 순수하게 되돌려놓네.
담장의 담쟁이덩굴처럼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낀 이끼처럼,
돌멩이에 낀 이끼처럼,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치얀에 갔다가 비오레타 파라가 태어난 산카를로스에 가보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태어났을 뿐 유년기는 라우타로라는 소도시에서 보냈기에 산카를로스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의 생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잠시 짬을 내서 터덜터덜 달리는 시골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집은 특별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길을 가보고 나서야 나는 칠레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칠레인들은 보통 남부의 대자연을 자랑스러워한다. 아름드리나무와 화산, 호수와 만년설이 존재하는 태초의 대자연을 보고 탄성을 발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지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지는 못한다. 반면 산카를로스를 오가며 본 칠레 중부의 풍경은 붓끝의 터치가 생생한 한 폭의 수채화였다. 한쪽에는 눈 덮인 안테스가 선명했고 그 사이에 펼쳐진 벌판은 오밀조밀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오레타 파라에게 영감을 주었던 작은 뉴블레 강이 굽이굽이 흐르며 정겹게 그 벌판을 적시고 있었다. 그 아늑함이야말로 비오레타 파라가 「열일곱 살로 돌아간다는 것은」에서 선보인 시심의 근원일 것이다 수채화 한 폭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았기에 억척스러운 여장부로 살았고, 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삶의 결말을 생각하던 순간까지도 「열일곱 살로 돌아간다는 것은」에 배어 있는 그 순정한 시심을 잃지 않았으리라.
-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중에서 (우석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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