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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정공 이기만 이야기

디젤엔진에 장착되는 펌프를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두원정공은 엄청난 부를 축적해 오다가 환경규제 강화 등의 이유로 사양부품이 되면서 계속된 구조조정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2001년 민주노조가 들어선 이후 구조조정에 맞서 공세적 투쟁으로 일관하여 현장의 힘관계를 완전히 역전시켜 노동조합과 현장조합원들이 완전하게 현장을 통제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97년부터 시작된 구조조정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유일한 사례로서, 노동자들이 현장권력을 장악한 현장평의회의 모범 사례로서 두원정공은 많은 가능성과 상상력을 안겨주기에 충분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는 나름대로의 힘겨움과 고민들도 많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두원정공 이기만 동지를 만났다.

65년 서울 출생인 이기만은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만난 선생의 영향이 이후 인생에 주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한신대 학생이었던 교회선생은 사회문제에 대한 얘기와 함께 이런저런 이념서적들을 권하기도 했다. 그런 영향 속에서 이기만은 그 선생을 따라 한신대 신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경험하게 된다. 4학년에 들어서면서 현장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간 후 제대와 함께 현장으로 들어간다.

“졸업하면 (공장에) 못 갈 것 같아서. 졸업하면 그(전공)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서 졸업하지 않고 현장으로 들어왔죠. 현장에 가서 뭐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노동자가 되자’였던 거죠.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 학교 선배들이 현장에 많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현장 가서 1년 이상을 견디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냥 노동자가 된다는 생각을 학교 다닐 때 많이 했죠. 그때는 정말 운동을 한다는 개념보다는 현장에 가서 일하고, 소중하게 내가 일한 대가로 임금을 받고 살아보는 게 목표였어요.”

노동자가 되기 위해 90년 안성에 있는 두원정공에 입사한 이기만은 말 그대로 열심히 일만 했다. 그러던 중 93년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88년 만들어진 두원정공 노동조합은 한국노총 소속으로 지역세력들을 중심으로 적당히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 내에 지역세력 간 견제가 있는 속에서 집행부는 노골적인 어용노조 보다는 다소 실리적 모습을 보여주면서 운영되고 있었다.

“그때 회사가 의도적으로 노동조합 깨려고 했었고, 현장은 자발적으로 텐트 치면서 버티고 있었고, 위원장은 도망가 있었어요. 현장은 버티고 싸우고, 회사는 고소고발 하고, 위원장은 고소고발 핑계 삼아 고망 가서 여관방이나 전전하고... 그야말로 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으로 한 달을 버틴 거예요. 나중에 위원장이 와서 수습을 했죠. 수습을 했는데 내용은 아무 것도 없이 끝나고 말았죠.
그때 더 이상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해서 현장을 조직했어요. 현장모임을 만들어서 학습하고 조직 확대 하면서 쭉 왔어요.”

처음에 5명으로 시작한 현장모임은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20명 가까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97년말에는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해 선거출마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후보가 개인적으로 문제로 출마를 포기하게 되면서 민주노조 건설 시도를 뒤로 미뤄진다.

“97년에 파견법이 도입되면서 식당, 경비, 청소, 운전기사 등이 전부 외주화 시켜 버렸죠. 97년 경제위기가 닥치고 98년 들어오면서 회사가 굉장히 어려워 졌어요. 부도니 뭐니 하는 얘기까지 갔었거든요. 그때를 기점으로 해서 ‘회사가 망한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 떠나라’하면서 개별면담 등을 하면서 희망퇴직 형식으로 사람들을 많이 내보냈어요. 98년부터 2001년까지 40%가 나갔어요. 떠나면서 사람이 모자라니까 아웃소싱 시키고, 그러면서 더 자르고, 그래도 안 되니까 현장라인을 바꾸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직선라인을 U자형이나 O자형 라인으로 바꾸기 시작해요. 그렇게 라인을 바꾸다보니까 사람이 또 남아. 계속 잘라도 사람이 계속 남는 거예요. 여유인력이 생기면 잔업 특근 없애고, 그 다음에 ‘인원 남는다’ ‘망한다’ 하면서 또 자르고, 그리고 라인 바꾸고, 그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40%가 나가게 된 거예요.”

현장은 계속 움추러들었고, 이에 따라 인원은 계속 줄고 일은 더욱 힘들어져만 갔다. 그 결과 97년 959명이던 인원이 2001년에는 623명으로 줄게 된다. 그래도 회사는 인원을 더 줄여한다고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1년 노동조합 임원선거에 민조노조 기치를 내걸고 이용석-이기만 후보조가 최초로 나서게 된다. 지역출신을 중심으로 묶여 있던 관성과 기존 어용조직의 틀이 강해서 매우 힘겨운 선거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현장이 너무 힘들어서 바꿔야 한다는 기류 또한 만만치 않았다. 힘겨운 선거에서 30여 표 차이로 박빙의 승리를 거두지만 당선 직후부터 고민은 쌓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 당선됐는데, 현장이 워낙 반으로 나뉘어져 있고... 불안했죠. 그래서 현장에서 어떻게 우리 지도력을 세울 것인가가 관건이었죠.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현장은 알고 있으니까 지도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았고, 현장은 딱 갈라져 있으니까 한동안 불안한 상태가 이어졌죠.
현장을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아내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해서 2002년도 임단협을 중심으로 싸움을 만들어요. 그때도 회사는 망한다고 그러고 있었고, 실제 전망도 좋지 않았어요. 그때 임단협을 준비하면서 두원정공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요구를 하죠. 과거에는 하는 척만 하다가 끝내고 그런 거였는데, 2002년에는 제대로 파업까지 하면서 요구안 쟁취하면서 현장의 완전한 승리로 만들어내죠. 그러면서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현장이 조직되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집행구조가 안정이 되죠.”

2002년 임단투를 통해 현장조직력을 갖추게 되기는 했지만 계속되는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은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었다. 생산부품 자체가 사양부품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위기감이 현장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느냐 하는 것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기존에 한국노총 시절에 쭉 해온 게 있어서, 산재가 나오는데 산재승인이 나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산재승인은 잘 나지 않는데, 민주집행부라고 해서 아프면 찾아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첫 번째 있었어요. 두 번째는 매출이 계속 줄고 노동자는 계속 남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계속 있었는데, 지역의 활동가들과 논의하다가 ‘근골격계투쟁이라는 게 있더라’ 하는 얘기를 들었죠.
그래서 그게 뭔지 알아보자고 해서 근골격계투쟁 공동연구단 이라는 곳에 연락해서 오라고 그랬어요. 그 사람들이 와서 ‘이거는 산재 내주기 위한 투쟁이 아니다. 산재라는 고리를 통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저지하는 투쟁으로 가야 한다. 그것을 하지 못하고 산재 내주는 것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그만둬라. 자기들은 결합하지 않겠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원하는 바다. 계속 인원이 남고 망한다고 한다는데 반전의 계기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근골격계 투쟁이 시작되죠.”

그렇게 근골격계 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2002년 9월부터 공동계획수립과 현장교육 등의 사업을 꾸준히 진행한다. 또 그 때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근골격계 투쟁과 결합하기 위해 투쟁사업장들과 함께 토론도 하고 공동투쟁체를 만들며 전국적 결집을 이뤄내기도 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몇 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2003년 1월 20여 명을 집단요양신청을 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을 벌이고 환자와 간부들을 중심으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집중투쟁을 벌인 결과 전원 요양승인을 받아낸다.

“집단요양 승인이 나면서 500여 명 중에서 20여 명이 나가버리니까 회사에서 깜짝 놀라 버린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서 ‘너희 요구하는 게 뭐냐’라고 그래서 요구안을 만들기 시작해요. 현장개선 관련해서 조합원들의 요구를 다 들어요. 현장 조합원들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다 써내라고 해서 230개 정도의 현장개선 요구안을 모아요. 그 다음에 U자형 O자형 라인을 1자형으로 필 것을 요구해요. 만약에 이 요구를 받지 않으면 2차 요양자를 준비해서 산재 나간다 그러면서 회사를 압박하고, 노동부 등에도 산재가 이렇게 나는데 저희들 뭐하냐 하면서 압박을 해요. 그렇게 안팎에서 압박을 하니까 회사가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거든요. 그래서 요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해요.”

이런 과정에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산재자들이 현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현장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이는 회사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빠져나간 동료자리를 메꾼다는 것 때문에 힘들어졌다는 것도 있고, 꾀병환자 시비도 엄청 일었고, ‘너희들 그 투쟁 왜 하는 거냐’ ‘이러다가 회사 망하는 거 아니냐’는 문제가 현장에서 일면서 굉장히 힘들었죠. 다른 공장들은 대부분 거기에서 멈추잖아요.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현장개선으로 나가면서 현장이 개선되기 시작하니까 조합원들의 불만이 없어져요. 진짜 중요한 투쟁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해요.”

노동조합은 라인형태를 바꾸는 것에 가장 큰 비중을 눴다. 1자형 라인이 U자형이나 O자형으로 바뀌면서 여유인원이 늘어나고, 노동강도가 엄청 높아졌을 뿐 아니라, 회장의 직접 지시로 바뀐 라인을 다시 편다는 것은 구조조정에 맞선 상징적 의미도 매우 강하기 때문이었다.
조합원들이 라인을 바꾸는 것에 쉽게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바뀐 U자형이나 O자형라인에 익숙해져 있을 뿐 아니라 라인이 펴지게 되면 움직이면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라인을 바꾸는 것은 회장이 직접 지시해서 하는 것이었는데, 노동자들이 라인을 직접 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것을 바꾼다 하니까 현장에서는 ‘설마 가능하겠냐’하면서 굉장히 놀랬죠. 실천단과 현장개선위원들이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라인 재배치에 대해서 계속 토론을 벌였어요. 조합원 속에서 라인을 펴는 것에 대해서 반대가 많았지만 개선위원들을 중심으로 라인을 바꾸는 이유를 설명하고 라인 변경에 따르는 문제를 토론했어요.
그렇게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라인이 실제 바뀌고 나니까 조합원들이 좋아해요. 바뀌기 전에는 갇혀 있다는 느낌이 많았고, 소음이나 분진이 작업하는 가운데로 모였는데, 1자로 펴지니까 뻥 뚫린 느낌이 들어서 시원하잖아요. 그전에는 구조조정이 계속되면서 현장 여유인력이 계속 생기고, 매출이 줄어들면서 또 여유인력이 생기고 그랬는데, 라인이 펴지니까 오히려 인원이 더 필요해지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서 매출에 줄어들면서 발생하는 여유인력 문제나 작업 특근 축소 등의 문제를 라인을 펴면서 다 흡수했던 거예요.”

이런 공세적인 투쟁을 통해 현장을 완전히 장악한 노조에 대해 회사에서 순순히 물러선 것을 결코 아니었다.
2003년 노조 임원선거에서 재출마해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2004년 그룹의 부회장이 회사사장으로 내려오면서 대대적 구조조정을 다시 시도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구조조정 대응팀을 구성하면서 대응방안을 마련하면서 더욱 공세적으로 맞선 사장을 다시 경질하게끔 만들어냈다.
2005년 그룹 회장의 최측근이 다시 사장으로 발령되면서 도 다른 형태의 구조조정 공세와 함께 매각움직임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회사가 살기 위해 노조가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현장에 돌아다니고 매각 조건으로 단협과 인원 정리를 요구하는 등 또 다른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노조는 강경한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현장토론을 활발히 벌이며 구조조정 공세를 이겨냈다. 결국 구조조정과 매각은 무산됐다. 2005년 노조 임원선거에서 이기만이 위원장후보로 출마해서 다시 당선되어 구조조정 저지투쟁은 계속 이어진다.
2006년에도 만만치는 않았다. 실제 2001년 1750억이던 매출액이 900억 가까이 떨어진 상황에서 전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노동조합이 더욱 강하게 나오자 회사가 원청인 현대자동차와 보쉬를 상대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그 결과 한 달간의 파업 끝에 원청으로부터 물량을 확보하면서 합의에 이르게 된다.

“회사에서 중간 중간에 구조조정 시도를 하면서 통제력을 확보하려고 시도하는데 우리가 잘 대응하면서 막아왔던 거죠. 노조가 계속 현장을 주도하면서 현장을 바꿔내니까 자본이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2004년에 사장이 바뀌면서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시도하는데 실패해요. 그 후에도 회사는 매년 구조조정을 시도하는데 노동조합은 오히려 전면전으로 대응하면서 요구안을 계속 따내요. 회사는 망한다고 그러는데 양보교섭을 한 번도 안했어요. 오히려 엄청난 요구와 투쟁을 계속 벌이면서 그 힘을 유지해온 거죠.
2004년에 노조에서 구조조정 대응팀을 꾸려서 전국의 구조조정 사업장을 다니면서 여러 경험을 들으면서 배우죠. 여러 사업장들을 찾아다니면서 구조조정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다 듣고, 그걸로 자료를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확인하죠. 구조조정 투쟁이라는 것이 사소한 문제로부터 무너진다는 것을 확인한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의 구조조정 시도에 맞서 전면적으로 맞장 떠서 박살내는 방식으로 벌여왔던 거죠. 그런 투쟁방식으로 지금까지 계속 유지해왔죠.”

조합원 500여 명 수준인 두원정공에서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 중의 하나는 현장실천단과 현장개선위원이다. 2001년 근골격계 투쟁에서 도입된 이 제도는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의견수렴과 현장토론 제도로 자리잡아 왔다.
라인별로 1명씩 선출되는 현장실천단은 현장의 작은 문제들을 찾아내 의견을 올리는 한편,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조합원들과 함께 수시로 현장토론을 벌인다. 라인을 펴는 문제를 위해 공장별로 3명씩 전임 인정을 받은 현장개선위원들은 노동조합 상집 이상의 역할을 하면서 현장을 장악하는데 중요한 힘으로 작용한다.
노동조합에서 투쟁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이데올로기를 선점하기 시작하면, 현장개선위원들이 현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실제 현장을 변화시켜내기 시작한다. 그를 바탕으로 현장실천단은 끝임 없는 현장토론으로 조합원과 함께 하는 힘을 만들어내고,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모아서 노동조합으로 계속 전달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라인별로 실천단이 중심이 돼서 ‘우리가 너무 힘들게 일한다. 물량을 좀 낮춰야 하니 않냐’ 그러면서 물량을 낮춰요. 그런 것이 전체 라인으로 확산되죠. 그러면서 700개 생산하던 라인을 300~400개로 줄여요. 매출이 떨어지는 만큼 물량을 낮추면서 자연스럽게 고용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왔던 거죠. 또 현장에서 필요하다가 싶으면 실천단과 함께 판단해서 자유롭게 분임토론을 해요. 그렇게 되니까 조·반장 권력이 완전히 무력화 되서 서로 조·반장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아래로부터의 현장장악력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을 몇 년 간 벌이면서 서서히 피로와 관성화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회사에서도 2006년부터는 구조조정에 대한 얘기를 자제하면서 현장 긴장력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전술적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식의 대응이 한계에 오지 않았나 하는 고민을 해요. 현장에서 일부 조합원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현장을 방치할거냐’라고 문제제기를 해요. 마치 노조 때문에 생산이 잘 안되고 현장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과제예요.
현장의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현장토론을 자주해요. 우선 투쟁해왔던 과정들을 설명하고, 그 결과로 우리 고용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 가를 설명하죠. 이걸 밑바탕으로 깔고 있으니까 그런 기본적인 신뢰는 갖고 있어요. 그런 것을 기본으로 해서 토론을 하니까 현장이 얘기가 되요.”

평택과 안성지역은 대규모 민주노조 사업장이 많지 않다.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와 안성에 있는 두원정공이 그나마 규모 있는 사업장이다. 그런 가운데 규모가 작은 사업장들이 민주노총 평택·안성지구협의회로 모여 있어서 두원정공과 같은 사업장의 역할이 지역연대사업에서 중요하다. 또 사회복지시설인 에바타 민주화 투쟁과 평택미군기지 저지투쟁 등 지역에서 굵직한 투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지역적 사안에 대한 연대투쟁도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민주노총 평택·안성)지구협의회 시절에는 지구협을 중심으로 지역연대사업이 굉장히 잘 됐어요. 지역에서는 미군지지문제나 에바다 투쟁 같은 큰 투쟁만이 아니라 소규모 사업장들이 많기 때문에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나 신규노조 지원투쟁 등의 사안이 계속 생겨요. 그래서 그런 연대투쟁에 최대한 결합했죠. 우리는 그런 지역연대투쟁 자체가 우리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두원정공 노조 내에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주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도 우리 사업이기 때문에 최대한 결합해서 거의 다 같이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현장에서는 너무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문제제기를 하죠. 간부들도 많이 지쳐하고 해요. 그래도 많이 설득하고 하면서 같이 하려고 노력하죠. 노동조합이 그거 하지 않으면 뭐 할게 있겠어요?
그런데 금속노조로 와서는 잘 안돼요. 금속노조 중심의 사업이 너무 많아서 금속노조 밖으로 다닐 여유가 없어졌어요. 또 금속노조 체계 자체가 지역사업을 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어요. 재정도 중앙으로 집중되고, 시간도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금속노조 사업이 아니면 지역사업은 거의 불가능해지죠.”

이기만은 구조조정 투쟁에 대한 사례를 수집하고 교육 등을 하기 위해 전국의 사업장을 비교적 많이 돌아다녀 봤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구조조정 문제에 대한 입장을 세울 수 있었지만, 전국적 전망에 대해서는 어두웠다고 실토했다.

“우리나라의 구조조정이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진행됐어요. 전국의 거의 대부분이 사업장들이 한 방향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는 것을 확인했죠. 또 노조의 대응방식도 거의 비슷하게 하다가 다 망한 거죠. 어떤 일관된 법칙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런 일관된 법칙 속에서 구조조정 당해왔던 것을 깨는 것이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방법이다라는 것을 확신했죠.
교육가면서 두원정공 사례를 얘기하면 현장 간부들이 ‘그건 두원정공 특수한 사례 아니냐. 아무 사업장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독점적인 사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투쟁이 가능하지 않았냐’ ‘구조조정 사업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냐’는 등 비꼬거나 평가절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구조조정을 쭉 당해오면서 간부들이 너무 패배적으로 바뀌어 있어요. 지금의 상황만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매몰돼 있어요. 공세적으로 지금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꿈도 못 꿔요. 우리 상황들이 너무 수세적이에요.
공세적인 투쟁이 잘 안되니까 법적인 체계로 들어가는 것이 유해요인조사예요. 근골계계투쟁이 너무 폭발적으로 일어나서 엄청난 투쟁의 고리가 되니까 자본도 그걸 끌어안으면서 흡수하는 거죠. 지금 대다수의 현장간부들은 유해요인조사를 통해 자기 합리화를 시켜내면서 정리해버려요. 투쟁고리로 만들어서 투쟁을 만들어 나가려 하지 않아요.”

두원정공의 사례가 확산되기는 고사하고 서서히 묻혀져 버리는 현실에서 앞으로 어떤 극복방향을 고민하고 있을까?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운동의 전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예요. 이런 진흙탕 속에서 뭘 얻겠다고 내가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예요. 그 반면에 전선이 명확해지고 있어요. 현재 민주노조운동 주도 세력들의 문제가 명확하게 대중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여러 현장에서는 전선이 쳐지고 있고, 전선이 쳐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 문제가 해결될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폭발력을 가지고 질적 변화가 이뤄질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더 힘을 가지고 현장을 잘 조직하고 전진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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